뉴스

[그, 사람] 낡은 차 타고 귀향한 대법관…'어른'이었다

[그, 사람] 낡은 차 타고 귀향한 대법관…'어른'이었다

이홍훈, 철인이 된 모범생

윤춘호(논설위원) 기자 spring84@sbs.co.kr

작성 2020.08.22 10:45 수정 2020.09.04 13:31 조회수
프린트기사본문프린트하기 글자 크기
기사 대표 이미지:[그, 사람] 낡은 차 타고 귀향한 대법관…어른이었다
1. 이 글은 자신의 소멸을 두려움 없이 응시하고 있는 한 사람의 이야기다. 그는 3년 전 담도암 판정을 받았다. 다행히 수술은 가능한 상태였다. 10시간이 넘는 대수술을 받았고 1년 넘게 항암 치료를 했다. 암은 끈질겨서 죽지 않고 간으로 번졌다. 간의 일부를 잘라내는 수술을 받았다. 칠순이 넘은 그에게는 견디기 힘든 일이었다. 암과의 악연은 그것으로 끝이 나지 않았다. 지난해 폐에서 암세포가 발견되었다. 세 번째 수술을 하는 것은 무리였다. 불행 중 다행으로 폐의 암세포는 진전 속도가 그리 빠르지 않다. 지금은 암세포의 진행 속도를 지켜보면서 석 달에 한 번 면역 치료를 받고 있다.

지난 3년 동안 있었던 암과의 싸움을 그는 담담하게 말했다. 이야기를 듣는 사람이 탄식을 금할 수 없었는데, 정작 당사자의 말에는 희비가 없고 감상이 묻어나질 않았다. 어조의 변화도 느끼기 어려웠다.

이홍훈을 만난 것은 10년 만이다. 그가 대법관으로 있던 2011년 그의 서초동 대법원 집무실에서 만났다. 대법관 퇴임을 두어 달 남겨둔 상태였다. 대법관의 아우라가 강했지만 법관이라기보다 수도자 같은 느낌이었다. 그가 우주와 명상에 대한 이야기를 주로 했기 때문일 것이다.

대법관 퇴임식을 마친 직후 낡은 소형차 타고 고향으로 내려간 그의 소식이 가끔 궁금했었다. 두 달 전쯤 지인에게 그가 암 투병 중이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가 암이라는 적을 만나 어떻게 싸우고 있을지 궁금했다. 문자로 한 번 찾아가도 되겠느냐고 물었더니 정담이나 나누자는 답이 왔다. 다소 의외였다.

퇴임 뒤 귀향해 살고 있는 이홍훈 전 대법관(왼쪽). 필자와 대화를 나누고 있다.
2. 자신이 태어나고 평생 부모님이 살던 바로 그 자리에 집을 지었다. 원래는 스물세 평이었는데 외양간이 있던 자리에 방을 하나 더 들여서 지금은 스물아홉 평이다. 천장을 높이고 외벽을 바꿨지만 모양은 옛집 모양 그대로다. 방 두 개를 터서 거실로 쓰고 아버지가 쓰던 방을 이제는 그가 쓴다. 내부는 소박했다. 고관대작을 지낸 사람들 집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직함이 큼직하게 새겨진 명패 같은 것도 보이지 않았고 현직에 있을 때 찍은 사진도 없었다. 안주인의 안목이 엿보이는 다기가 몇 점 눈에 띄었고 그가 항상 사무실에 두었다는 한글 서예 글 한 점이 벽에 걸려 있었다.

이홍훈 전 대법관 방에 걸려있는 한글 서예. 그의 삶이 녹아 있다.
칠순 노인의 힘으로 감당하기 힘든 일은 일꾼을 사기도 하지만 가급적 남의 힘 빌리지 않고 직접 한다. 낫질하고 삽질하고 톱질하는 게 주로 하는 일이다. 근 10년 하다 보니 제법 이력이 붙었다는 게 부인 박옥미의 이야기다. 시골 일이 하자고 들면 끝이 없어 때로는 힘에 부친다지만 여기에서 그의 삶은 말 그대로 유유자적이다. 아침저녁으로 동네 뒷동산 산책하고 참선에 든다. 일하다 지치면 눈 붙이고 배고프면 밥 먹고 마음 내키면 책도 본다. 이곳의 사계절 풍경이 제법 볼 만하다고 말할 때 그는 행복해 보였다.

그의 집은 큰 동네에서 조금 떨어져 있어 이웃들과 왕래가 잦지는 않다. 초등학교 동창이 몇 명 고창 읍내에 살고 있다는데 교류가 많은 눈치도 아니었다. 50년 만에 귀향이었으니 동창도 낯설 것이다. 다소 고적할 듯싶은데 그는 고적함을 평화롭다고 표현했다. 벌써 열한 마리로 늘어난 길고양이들과 두 마리의 진돗개가 그와 부인 박옥미의 가장 친한 친구이자 가족이다.

3. 지난 2005년 노무현 대통령은 수원지방법원장이던 그를 유력한 대법원장 후보로 검토했다. 당시 문재인 민정수석이 직접 그에게 의사를 타진하기도 했다. 그는 대법관을 거치지 않고 대법원장이 되는 것은 전례에 없는 일로 바람직하지 않고 자신은 대법원장이 아닌 대법관에 관심 있다며 그 제안을 고사했다. 문재인 대통령이 암 판정을 받은 그에게 쾌유를 비는 뜻을 담은 난을 보낸 것도 그때의 인연 때문일 것이다.

그의 아버지는 부농이었고 정미업을 하는 등 사업 수완도 있었다. 아들 셋을 모두 서울 유학을 보낼 만큼 형편이 넉넉했다. 그는 경기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법대를 나왔다. 사법시험에 합격해서 법관으로 35년을 재직했고 모든 법관들이 선망하는 대법관까지 지냈다. 그 이후 거친 사법발전위원장, 서울대 이사장, 법무법인 화우의 공익재단 이사장 등의 직함은 대법관을 지낸 인물에게 따르는 후광 같은 것일 텐데 어쨌든 그의 인생의 성취는 작지 않다.

2006년 나이만 60살에야 대법관이 되었다. 유력한 대법원장 후보였을 만큼 사법부 안에서 명망이 높았지만 대법원 입성은 쉽지 않았다. 네 번을 대법관 후보로 추천받았는데 매번 영 순위라는 말만 듣고 결정적인 순간에 번번이 다른 사람에게 밀렸다. 2005년 9월 대법관 3명이 한꺼번에 바뀔 때는 틀림없이 될 줄 알았는데 3명 모두 진보 인사로 채우는 것은 부당하다는 논리로 또 밀렸다(이때 대법관이 된 사람이 박시환, 김지형, 김황식이다). 이때는 정말 크게 낙담했던 모양이다. 옆에서 보기가 안쓰러울 정도였다는 것이 박옥미의 이야기다. 사표를 내려는 그를 이용훈 대법원장이 붙잡았다. 한 번만 더 기다려 보라고 간곡히 설득했고 2006년 5월 마침내 대법관이 되었다.

판사들의 삶은 대법관을 향한 질주라고 할 수 있다. 대법관이라는 자리를 향한 판사들의 열망은 일반인들은 이해하기 어렵다. 판사들의 세계는 그들만의 리그다. 그들만의 문화가 있고 그들만의 자부심이 있고 그들만의 경쟁이 있다. 그들 사이에서 최후의 승자를 가리는 자리가 대법관이다.

"사람으로 태어나서 할 수 있는 최고 직업이라고 생각하지요. 남에게 간섭 안 받고 독립적으로 일할 수 있고 국가와 사회가 나아갈 방향을 법의 이름으로 판결문에 담을 수 있으니 세상에 이런 자리는 없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일 많이 하고 고생하는 자리예요. 실력은 말할 것도 없고 체력도 뒷받침돼야 하고 세상을 보는 안목도 있어야 되는 자리지요."

그래서 아무나 맡을 수 없고 아무나 맡아서도 안 되는 자리라고 말할 때 그가 대법관이었다는 것을 얼마나 자랑스럽게 여기는지 알 수 있었다.

대법관 퇴임사 맨 마지막 줄에 대법관 이홍훈이 아닌, 법관 이홍훈이라고 적었다. 그럴 만큼 뼛속까지 판사인 사람이다. 그래서 지금의 법원에 대한 걱정이 많아 보였다. 사법발전위원장으로 법원행정처 폐지를 골자로 하는 법조 개혁방안을 마련한 주역인 그에게 사법부의 혼란상에 대해 물었다.

"사법 농단이라는 것도 결국은 사법권 독립 때문에 터진 문제잖아요. 법관의 생명은 사법권 독립에 있어요. 그런 점에서 법관이 행정부로 가고 국회의원이 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해요. 정치적으로 유착되었다는 오해를 받을 수 있는 행동 자체를 하면 안 되는 거지요. 그래서 저는 판사들이 정치에 관심 갖고 SNS에 뭐 올리는 것도 바람직하지 않다고 봐요. 판사가 어디 기웃거리면 안 돼요."

필자와 대화를 나누고 있는 이홍훈 전 대법관(왼쪽).
4. 이홍훈 대법관은 1년에 추석 하루 쉬었다는 말이 있었다. 정말 그랬냐고 물었더니 1년에 하루 쉬었다는 말은 과장이지만 거의 쉰 적이 없는 것은 사실이라고 말했다. 타고난 통뼈에 체력만큼은 남에게 뒤지지 않는다고 자신했던 그가 과로로 쓰러져 응급실에 실려 가기도 했다.

노동자들의 파업을 불법으로 다스리는 근거가 됐던 대법원의 업무방해죄 판례를 일부 변경해서 노동자들의 권리를 높인 것, 국민들이 국가로 인해 피해를 입었을 경우 민사 소송만이 아니라 행정소송을 통해서도 피해를 구제받을 수 있도록 해 국민의 선택권을 확대한 것은 남들도 인정하는 대법관으로서 그의 업적이다.

대법원은 법과 논리의 일대 결전장이다. 그가 대법원에 있을 때 최대 현안은 4대강 사업 집행 정지 신청 사건이었다. 대법관들 사이에서 집행 정지 신청을 받아들일지 여부를 두고 격론이 벌어졌다. 그는 이 재판의 주심이었다. 4대강 사업을 일단 중단해야 한다는 그의 의견은 소수 의견에 그쳤다. 정부의 국책 사업을 사법부가 막아서는 안 된다는 것이 대법관 다수의 생각이었다. 그가 쓴 소수 의견은 4대강 사업 반대론의 집대성이라 할 만하다. 그가 각별히 공을 들인 반대 의견은 이렇게 시작된다.

"헌법 1조는 대한민국이 민주공화국임을 선언하면서,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고 규정하며… 따라서 모든 국가 작용은 법에 따라야 함은 물론이고 국가가 그 법을 집행함에 있어서는 합법성, 법적 안정성과 함께 정당성 및 합목적성을 갖추어야만 비로소 실질적인 법치주의를 실현할 수 있다고 할 것이다."

중요한 국책사업일수록 적법한 절차를 거쳐야 하고 특히 후대에 큰 영향을 줄 수 있는 사업일수록 신중해야 한다는 그의 소수 의견에는 인간과 자연, 법과 역사에 대한 그의 고민이 녹아 있다.

"(제 생각을) 역사에 남기고 싶었습니다. 후대에 4대강 사업이 잘못된 것이라는 말이 나올 수 있는데 그때 대법원은 무엇을 했느냐고 할 때 대법원이 이렇게 고민하고 노력했다는 것을 알리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나름 정성을 들이고 열심히 기록 검토도 했지요."

대법원은 법과 논리로 싸우는 곳이지만 그곳 역시 사람이 사는 동네인지라 감정이 격해질 때가 있었다. 그는 일부 대법관들이 4대강 사업 같은 중요 사건에 대해 너무 고민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그들과 마주 앉기조차 싫었다. 한 달 동안 대법관 전용 식당에 내려가지 않고 집무실에서 도시락으로 점심을 때웠다.

"예산이 수십조 원 들어가고 국민들에게 미치는 영향이 큰 사건인데 일부 대법관들이 보고서도 제대로 안 보고 법리 검토도 충분히 하지 않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국책사업이니 무조건 해줘야 된다는 분위기가 있었던 게 사실이죠. 대법원이 과거처럼 정권의 눈치나 보고 그래서야 되겠느냐고 제가 이야기한 것은 사실이지요. 그때 화가 많이 났어요."

이 무렵 '독수리 5남매'라는 말이 생겼다. 2천 년대 초반 대법원에서 진보적인 의견을 많이 냈던 김영란, 김지형, 박시환, 전수안과 이홍훈 대법관을 부르는 말이다. 이홍훈은 자신이 독수리 오 남매의 일원으로 불리는 것이 썩 마음에 드는 눈치는 아니었다. 이홍훈은 나머지 네 명과는 결을 달리 하는 법관이었다. 연배로 다른 네 명에게 적게는 6살, 많게는 12살이나 많았고 연수원 기수에서도 큰 차이가 났다.

다른 네 명이 대법원 구성의 다양화라는 명분에 따라 법원장을 거치지 않고 파격적으로 대법관에 발탁된 반면 이홍훈은 서울중앙지방법원장을 비롯해 수원과 제주의 법원장을 거쳤다. 다른 네 명에 비해 대법원 입성이 늦긴 했지만 네 차례나 대법관 후보로 추천되었고 이용훈 대법원장과 사법부 수장 자리를 놓고 경합을 벌일 정도로 중량급 인사였다.

법률 해석에서 진보적이라는 공통점이 아니라면 그를 이른바 독수리 오 남매의 한 명으로 묶기에는 적절치 않은 것이 사실이었다. 그는 이홍훈이라는 이름 석 자로 충분하다며 그를 굳이 다섯 명 가운데 한 명으로 볼 필요는 없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나이 환갑을 지나 기대하지 않았던 좋은 동지 네 명을 만난 것은 그에게는 축복이라고 봐야 하지 않을까. 동생 같은 젊은 동지들을 만나서 그는 힘을 얻었고 그의 판결은 그들로 인해 더 의미를 가질 수 있었으니 말이다.

대법관을 마친 뒤 고향으로 내려오긴 했지만 변호사 활동을 접은 것은 아니었다. 고문으로 있는 법무법인 일 때문에 일주일에 절반은 서울에서 지낸다. 대법원 상고심 사건 기록을 검토해주고 자문에 응하는 게 그의 일이다. 같은 법무법인에서 일하는 후배 변호사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그가 이름만 빌려주는 것은 아닌 듯싶다. 후배 변호사들이 가져온 기록을 꼼꼼히 살피고 아이디어도 수시로 낸다고 한다.

얼마 전에 있었던 이재명 경기도지사의 상고심 사건 변호인 명단에 그의 이름이 올랐다. 대법원판결이 있던 그 날 저녁 이재명 지사가 그에게 감사 전화를 한 것을 보면 재판 과정에 상당한 역할을 했음을 알 수 있다. 대법관으로 정년 퇴임한 뒤 법무법인 화우 공익재단 이사장, 서울대 이사장, 사법발전위원장 등의 직함을 갖기도 했지만 지금은 모두 내려놓았다.

5. 처음 담도암 판정을 받고 수술을 해도 남은 삶이 2년 정도라는 말을 들었다. 담도암 환자의 80%가 2년 이내에 사망한다는 것도 그때 알았다. 그는 여생이 2년이면 족하다고 생각했다. 한화 김승연 회장이 미국에 가서 치료를 받을 수 있도록 주선하겠다고 제안했지만 거절했다. 주변 사람들이 암에 좋다는 이런저런 비법을 알려주기도 하고 어디에 가보라고 권유가 많았지만, 역시 고개를 가로저었다.

죽음이 정말 두렵지 않습니까. 그는 두렵지 않다고 했다.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고 물으니 사법연수원 시절부터 40년 넘게 해온 마음 공부 덕분인 거 같다고 말했다. 삶과 죽음이 하나라는 뜻의 생사일여(生死一如)에 대해 길게 이야기했다. 도를 깨친 선사의 말을 듣는 듯했다. 그의 말을 따라가기 어려워서 그의 말보다는 그의 표정과 태도에 더 주목했다. 그의 목소리는 차분했고 눈빛에 흔들림이 없었다.

그는 한결같이 차분한 모습이다.
그에게는 몸이 아픈 딸이 있다. 자녀 넷 중 셋이 짝을 찾지 못한 것도 마음에 걸린다.

"걱정되기는 하지만 어쩌겠습니까. 운명이지요."

암을 치료하기 위해 아무것도 안 하는 것은 아니다. 석 달에 한 번 면역 치료를 받고 있다. 짜고 맵고 기름진 음식을 피하고 무엇보다 마음을 내려놓으려고 한다. 최선을 다하지만 그렇다고 삶에 연연해하지도 않겠다는 자세였다.

생사일여(生死一如)니 우주일화(宇宙一花)니 하는 말이 재능이 넘쳐나는 사람의 우아한 말장난 같은 것은 아닐까 하는 의심을 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만약 그를 직접 만나지 않고 공익논문집 <宇宙一花>에 그가 쓴 서문을 읽었더라면 이게 무슨 귀신 씻나락 까먹는 소리이냐고 생각했을 것이다. 원고지 20쪽 분량의 이 서문에는 화엄경부터 시작해 칸트의 윤리론을 거쳐 소립자물리학까지 거론되어 있다. 여기에서 그는 이렇게 썼다.

"생명체의 생성 기반은 다른 생명체의 죽음으로 마련된 것이며, 나타남과 사라짐, 삶과 죽음의 모든 것이 하나로 연결된 전체임을 알 수 있습니다."

김근태가 의원 시절 어려운 일이 있으면 만나던 친구가 있었다. 그의 측근들도 잘 모르던 인물이었다. 그 베일에 가려진 친구가 이홍훈이다. 김근태는 그와 고등학교, 대학교 동기로서 학생 운동의 동지이기도 했다. 답답한 시절 서로의 답답한 가슴을 털어놓던 사이였다. 판사 시절 정치인과는 거리를 두고 살던 그가 유일하게 만나던 정치인이 김근태였다.

김근태 의원이 떠난 지 10년이 지났다. 또 한 명의 절친 조영래 변호사가 세상을 떠난 지는 30년이 됐다. 두 사람은 이홍훈의 고등학교, 대학교 동기로 서울대 시절 민주화 운동을 같이했던 각별한 친구들이다. 이홍훈은 두 친구의 부재를 안타까워하지도, 슬퍼하지도 않았다. 아까운 인재들이 너무 일찍 세상을 떠났다는 말도, 그 친구들이 이 세상에 없어 허전하다는 말도 하지 않았다. 덤덤하게 그들과 있었던 이야기를 지나가는 말을 하듯 했다.

각별하게 우정을 나누고 뜻을 함께 세우고 이 세상을 걱정하던 동무들이 이 세상에 없다는 것은 크나큰 상실일 텐데 그런 상실감이 없어 보였다. 삶과 죽음이 한 가지라는 그의 인생관 때문일 것인데 그에게는 삶과 죽음의 경계가 모호한 것처럼 보였다. 아니 경계를 훌쩍 뛰어넘은 듯 보였다.
죽음과 소멸을 바라보는 자세가 지식인의 멋 부림이 아닐까 하는 의심이 확 걷힌 것은 부인 박옥미의 말과 행동 때문이었다. 그가 자신의 암 투병기를 말할 때 걱정이 되었다. 고통스러운 시간을 떠올려야 되는 것일 테고 무엇보다 그의 이야기를 같이 듣고 있는 부인이 힘들 것이라 생각했다. 병마와 관련된 이야기를 하는 것이 불편하거나 내키지 않으면 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했는데 그는 괜찮다며 상세하게 자신의 상황을 설명했다.

그 이야기를 박옥미는 옆에서 다 듣고 있었다. 마치 남의 이야기인 양 듣고 있었다. 박옥미는 요즘 이홍훈에게 이렇게 말한단다. 당신이 암에 걸려 먼저 갈 테고 그러면 내가 당신 뒤처리 다 해야 되고 아이들도 챙기는 수고를 해야 하니 당신 살아 있는 동안에 내게 잘하라고 한단다. 이 말 때문일까. 요즘 이 집의 설거지는 이홍훈 담당이란다.

남편이 암에 걸려 투병 중인데 이런 말을 태연하게 하는 부인이 박옥미 말고 또 있을까 싶다. 55년을 해로한 부부가 지난 시절을 어떻게 보내왔는지, 이홍훈의 생사관이 겉멋이 아니라는 것을 박옥미를 통해 확인할 수 있었다. 남편의 생사관이 어떻다는 것을 잘 알기에 부인이 이런 말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이홍훈이 수도승이면 박옥미는 보살이다.

"평소에 대화를 많이 해서 서로의 생각을 잘 알지요. 제가 암에 걸렸다는 말을 듣고도 생각이나 드러냄에 변화가 없더라고요. 당황하거나 걱정하거나 그러지 않아요. 그런 표정의 변화가 일절 없어요. 제가 은혜를 많이 입었지요."

이홍훈 전 대법관(제일 왼쪽)과 그의 부인 박옥미.
6. 이 사람이 왜 인터뷰 요청에 응했을까 궁금했다. 삶에 연연해하지 않고 죽음조차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이 왜 자신의 존재를 세상에 알리려는 것일까. 자신을 드러내고 싶은, 자신을 표현하고 평가받고 싶은 의지는 꽤 강렬해 보였다. 그의 이런 태도는 일견 모순되는 것처럼 보였다.

그것은 자신의 삶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조바심의 표현인지도 모른다. 그는 누군가의 입과 손을 빌어 자신의 삶을 정리하고 싶은 듯했다. 문제는 스스로를 어떤 그릇에 어떻게 담아야 할지 그 자신이 모른다는 것이다.

대법관 퇴임 후 두어 차례 방송에 나갔고 신문 인터뷰도 꽤 했다. 그는 자신을 표현하는 데 서툴렀다. 자신을 어떻게 표현해야 될지 모른다고 하는 게 더 정확하다. 다른 재주는 천재일지 모르겠는데 자신을 설명하고 표현하는 재주는 별로였다.

자신에게 맞는 이름을 누군가 불러주길 원했다. 본인이 자신을 무어라고 불러야 할지 모르기 때문일 것이다. 무언가 실체는 있는데 그 실체에 맞는 이름이 무엇인지 자신도 모르는 상태, 이홍훈 마음이 그런 것이 아닐까 싶다. 예수도 때로 그것이 궁금해서 이렇게 물었던 거 아니겠는가.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남의 일이라면 거울 들여다보듯 훤하게 보이는데 자기 일이니 잘 보이지 않는 것이다. 때로는 훤히 보이다가 어떨 때는 한 치 앞이 안 보이는 그런 상태 말이다.

7. 그는 청빈한 법관이었다. 자녀 네 명의 등록금을 감당하기 힘들어 집을 팔아야 했다는 이야기나 아들에게 컴퓨터를 사주지 못한 사연을 지금껏 가슴 아프게 기억한다. 사교육은 생각도 못 했단다. 타고난 능력을 일신의 영달과 안위만을 위해 사용하지 않았다. 개인보다 공동체를 앞세우는 그의 생각은 전쟁과 독재의 어두운 시절을 거치면서 형성되었을 텐데 자신의 삶의 목적이 공동체에 대한 헌신이어야 한다는 강박과 무관하지 않다.

그는 여전히 신발 한 켤레 낡아 헐 때까지 신고 다닌다.
공동체를 위해서라면 자신과 가족들의 희생은 불가피한 것이라고 생각했단다. 사실 청빈한 삶은 법관 이홍훈에겐 어떤 면에서는 훈장 같은 것이었다. 능력 있는 사람이 청빈하기까지 하면 더 칭찬받는 게 법원의 문화였다. 그러나 청빈하고 자기 자신에게 엄격한 아버지의 존재는 가족들에겐 고통이었다. 이홍훈은 자신이 좋은 아버지라고 생각했다지만 자녀들의 생각은 많이 달랐다. 그의 자녀 가운데 한 명은 이렇게 말했다.

"…아마도 저의 아버지가 아닌 사회적으로 알게 된 분이라면 무척 존경했을 겁니다. 아버지께서 법조인이 아니라 수도승이 되었다면 훨씬 더 큰 뜻을 펼치셨을 거란 생각도 합니다…. 제게 아버지의 자리가 작았던 대신 사회는 훌륭한 법조인 한 분을 얻었다고 하면 가장 잘 표현한 게 아닌가 싶습니다."

살아온 삶에 후회는 없지만 같은 삶을 다시 살고 싶지는 않다고 했다. 아내와 자녀들에 대한 미안함 때문이었다. 아내를 비롯한 가족들은 경제적인 이유로 변호사 개업을 원했지만 그는 법복을 고수했다. 자녀들에 대해 말하면서 불화, 갈등, 반항이라는 말을 썼다. 그 말로 표현되는 구체적인 일들에 대해서 묻지 않았지만 회한이 많은 듯했다.

그는 부끄러움을 아는 사람이다. 1977년 영등포 지원 초임 판사로 긴급조치 위반 사건을 다뤘다. YH 사건과 관련해 유언비어 유포 혐의로 끌려온 인명진 목사에게 검찰은 6년을 구형했다. 그가 속한 재판부는 징역 8개월을 선고했다. 좌배석 판사로 그에게만 책임을 물을 일이 아니었지만 그는 그 사건을 잊을 수 없다고 말했다.

1983년부터 약 2년 동안 서울형사지법 단독 판사로 근무했다. 전두환 군부 정권이 극성을 부리던 시기였다. 이 시절 재판을 하는 일이 지옥 같았다고 회고했다. 한 번은 그의 절친 김근태에 대한 재판을 그가 맡아야 할 상황이 되었다. 수석부장이 그를 불러 잘 처리하라고 특별히 당부까지 했다. 아무리 그래도 김근태에 대한 재판을 자신이 맡을 수는 없었다. 못 하겠다고 버텼다. 그가 버티는 바람에 누군가 그 지옥 같은 재판을 대신해야 했다.

그가 이런 말을 했다. 자랑은 아니지만 판사 생활하는 동안 법정에서 한 번도 화낸 적이 없다는 것이다. 법정에서 판사는 전지전능한 왕이자 신이다. 판사가 자리를 잡고 있는 법대의 위치가 피고인은 말할 것도 없고 검사나 변호사와 평등하지 않다. 판사는 내려다보면서 재판을 진행하고 판결을 한다. 불과 몇 년 전까지 적어도 법정에서 판사는 언제나 성낼 수 있고 누구나 무시할 수 있고 누구에게나 훈계할 수 있는 특권을 가진 존재였다. 그는 이런 특권을 초임 판사 때부터 내려놓았다.

반말하지 않는 판사였다. 죄를 지어 징역은 살더라도 인권은 보장되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소신이었다. 7시간 넘게 대화를 하는 동안 몇 번 그의 말 중간에 끼어들기도 하고 때로는 그의 말허리를 자르며 화제를 돌리기도 했다. 그런데 녹취록을 유심히 들어보니 그가 필자의 말을 자르거나 끼어든 적은 없었다. 그는 법정에서도 그랬다. 말이 되는 소리든 되지 않는 소리든 소송 당사자들의 이야기를 경청했다. 정의란 '사회에서 가장 어려운 상황에 놓인 사람들에게 가장 큰 이익을 보장해주는 것'이라는 그의 소신을 당사자들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는 방식으로 실천했다.

8. 그와의 인터뷰는 오후 2시쯤 시작해서 밤 9시가 다 돼서 끝났는데 암 환자에게 너무 힘든 시간이 아닐지 걱정이 되었다. 몇 차례나 너무 힘들게 하는 것 아니냐고 물었는데 괜찮다고 말했다. 인터뷰가 끝날 즈음에는 이 정도는 버틸 수 있다고 말했다. 헤어질 무렵에는 그의 얼굴에서 다소 피곤함이 보였다.

그가 담도암으로 숨진 레슬러 이왕표에 대한 이야기를 길게 했다. 암 판정을 받고도 5년 넘게 멀쩡하게 버티는가 싶더니 어느 한순간 무너지더라는 것이다. 자신도 지금은 건강한 듯 보여도 오늘 갈지 내일 갈지 모른다고 했다. 그런 말을 두려움 없이 했다.

"처음에 2년 산다고 했는데 벌써 3년이 됐어요. 그러니 지금 가도 크게 아쉬울 거 없어요. 지금은 맡은 일이 있으니 한 이 년 정도만 더 살았으면 좋겠어요. 그 일 마치면 제명을 다해도 상관없어요. 그런데 금년 말까지 갈 수 있을지 어떨지 모르겠어요. 어떤 때 상태가 좋으면 2년은 견디겠다 싶을 때도 있고 기운이 떨어질 때는 연말까지도 못 가겠다 싶기도 해요."

그의 40년 된 마음 공부가 암이라는 병마를 만나 오히려 활짝 꽃 피는 듯싶다. 암이라는 몹쓸 친구가 아니었다면 그는 우리 사회의 전형적인 모범생으로, 좋은 판사 정도로 남았을 것이다. 그런데 암에 걸리고 나서 그는 철인으로, 현자로 거듭나는 거 같다. 어디선가는 멈춰 서야 한다는 것을, 그리고 멈춰야 될 시간이 그리 멀지 않다는 생각이 이 모범생을 현자로 만든 듯싶다.

언론의 역할 중 하나는 사람을 알아보는 일이다. 사람을 제대로 알아보고 알리는 일이 언론의 의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이홍훈에 대해 알면 알수록 언론이 제 일을 다 하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조금 늦은 듯하지만 이제라도 이홍훈에게 주목하려는 이유다.

우리 사회에 어른이 없다는 말은 반은 맞고 반은 틀리는 말이다. 어른다운 어른이 없기도 하지만 어른이 필요 없는 시대이기도 하다. 지혜는 포털에서 구하고 권위는 그 쓸모를 잃은 지 오래다. 그래도 가끔 어른이 그리울 때가 있었다. 전북 고창에서 서울로 돌아오면서 어른다운 어른이 거기에 있구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많이 본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