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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잇] 다급한 장애인, 느긋한 법원

[인-잇] 다급한 장애인, 느긋한 법원

최정규 | '상식에 맞지 않는 법'과 싸우는 변호사 겸 활동가

SBS 뉴스

작성 2020.08.19 11:01 수정 2020.08.19 11:03 조회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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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6월 우체국 은행은 '피한정후견인(정신장애인)에 대한 예금거래 개선 계획'을 발표했다.
인잇 최정규 인잇 최정규
재산 관리의 어려움을 겪는 정신장애인은 민법상 후견제도를 이용할 수 있다. 그런데 우체국 은행은 최근까지 후견 판결을 받은 정신장애인에 대해 아주 작은 소액도 현금인출기(ATM기) 및 체크카드 거래 등 비대면 거래를 허용하지 않았고 후견인 '동의' 서면을 통해 진행할 수 있는 거래조차 후견인 '동행'을 요구하여 불편함을 초래했다.

정신장애인들은 은행이 문을 닫는 야간이나 주말에는 아예 돈을 인출할 수 없는 불편함을 겪어왔고, 100만 원 이상의 돈을 인출할 경우 매번 후견인에게 연락해 은행에 함께 가자고 번거로운 부탁을 해야만 했다. 국가가 재산 관리를 돕기 위해 한정 후견 제도를 이용하라고 해 놓고 오히려 더 불편함을 준 것 아니냐는 볼멘소리가 나올만한 상황이었다.

정신장애인 당사자들이 이 문제를 처음 제기한 건 2018년 4월, 2년이 지나서야 불편 부당한 우체국 은행 서비스 개선이 이루어진 셈이다. 그런 개선안이 나올 수 있었던 건 국가인권위원회가 작년 5월 후견 판결을 받은 정신장애인에 대한 서비스 개선책 마련이 필요하다는 의견을 금융감독원장에게 표명하였고, 정신장애인 18명이 제기한 장애인 차별 중지 소송에서 작년 8월 승소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작년 5월 국가인권위원회의 의견 표명이 있었고, 8월에는 소송에서 승소했는데 10개월이 지난 올해 6월이 돼서야 뒤늦게 우체국 은행 거래가 개선된 이유는 무엇일까? 우체국 은행이 거래 개선에 대해 적극적으로 움직이지 않았기 때문이고 더 주요하게는 장애인 차별 행위를 신속하게 중지시킬 수 있는 권한을 부여받은 법원의 '소극적 태도' 때문이기도 했다.

장애인 차별 금지법 제48조 제1항은 아래와 같은 조항을 두고 있다.

 
"법원은 이 법에 따라 금지된 차별행위에 관한 소송 제기 전 또는 소송 제기 중에 피해자의 신청으로 피해자에 대한 차별이 소명되는 경우 본안 판결 전까지 차별행위의 중지 등 그 밖의 적절한 임시조치를 명할 수 있다"

차별을 당하고 있는 장애인이 하루빨리 차별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법원이 가진 권한이 바로 '임시조치 명령제도'이다. 그러나 장애인 차별 금지법이 시행된 지 12년째를 맞이하는 현재까지 임시조치명령이 내려진 적은 단 한차례도 없다.

이 사건 소송 과정에서도 정신장애인들은 두 차례나 임시 조치 명령 신청서를 법원에 제출했다. 비대면 거래는 시스템 개발 등의 시간이 필요하더라도, '동의서'가 아닌 무조건 후견인의 '동행'을 요구하는 부당한 거래 관행만큼은 즉각적으로 멈춰달라는 다급한 호소였다. 그러나 법원은 당사자들의 호소를 두 차례 묵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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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급한 장애인, 느긋한 법원'

차별 피해를 받는 장애인들의 다급한 호소에 법원이 느긋한 태도를 보인 건 이번뿐 만이 아니다. 루게릭병으로 인해 심한 지체장애를 겪고 있는 임현섭 씨의 경우도 관련 조례에 의거해 장애인 콜택시를 탑승할 수 있는 자격이 있음에도 2년 넘게 탑승을 거부당했다. '휠체어를 타지 않은 장애인'이라는 이유 때문이었다.

근육 경련, 어지럼증으로 휠체어를 타고 싶어도 탈 수 없는 장애 당사자의 사정을 고려하지 않은 부당한 처사라며 국가인권위원회는 차별 시정을 권고하였지만 성남시는 받아들이지 않았고, 결국 임현섭씨는 법원에 작년 4월 '임시 조치 명령'을 내려 줄 것을 요청했다.

그러나 임시 조치 명령 신청서를 접수받은 수원지방법원은 두 달 넘게 성남시조차 문제 삼지 않았던 '관할' 판단에 시간을 허비하고 사건을 성남지원으로 이송시켜버렸다. 관련 보도가 나온 후 성남시가 태도를 바꿔 장애인 콜택시 탑승을 허용하기 전까지 성남지원도 임시 조치 명령을 발동하지 않았다. 오죽 답답했으면 임현섭 씨는 차별 시정을 신속하게 진행시키지 못한 법원으로부터 불합리한 차별을 받았다며 국가인권위원회에 진정서까지 제출했다.

장애인 차별 금지법은 올해로 시행 12년째를 맞이했다. 그러나 법원은 임시 조치 명령을 내려달라는 피해 장애인들의 다급한 호소를 묵살하고 있으며, 사건을 어느 법원에서 다루어야 하는지에 대한 기본적인 시스템조차 정비하지 않은 채 우왕좌왕하고 있다. 과연 법원이, 법이 부여한 권한을 제대로 행사할 의지가 있는지 묻고 싶다.


* 편집자 주 : 최정규 변호사는 △고양 저유소 풍등 화재사건 △성추행·가정폭력 피해 이주여성 노동자 사건 △신안 염전 노예 사건 등의 변호를 맡아 사회적 약자를 위한 활동을 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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