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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파일] 그녀를 죽음으로 몰고 간 '카르텔'은 또 면죄부?

[취재파일] 그녀를 죽음으로 몰고 간 '카르텔'은 또 면죄부?

엘리트 스포츠 왕국의 그늘

정명원 기자 cooldude@sbs.co.kr

작성 2020.08.15 11:35 조회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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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대표 이미지:[취재파일] 그녀를 죽음으로 몰고 간 카르텔은 또 면죄부?
"우리 딸 문제가 그때 제대로 밝혀졌다면 숙현이가 세상을 떠나지 않았을 수도 있었을 텐데 이제 와 후회도 된다. 숙현이가 우리에게 도와달라고 연락을 안 한 건 아마 미안했기 때문이었을 것" (전 경주시청 트라이애슬론팀 선수 전 모 씨 어머니)

수화기 건너 들리는 목소리는 울음이 섞여 있었고 가끔 한숨이 들렸습니다. 지난 8일 故 최숙현 선수를 죽음으로 몰고 간 체육계 카르텔의 실체를 보도한 이후 걸려온 한 통의 전화에서 전 경주시청 팀 전 모 선수 어머니는 그렇게 딸의 아픔을 털어놓았습니다. 지난 2016년 6월 5일 딸이 극단적 선택을 시도하기 전까지 경주시청 팀에서 당했던 폭언과 폭력, 따돌림은 故 최숙현 선수 사건과 판박이였습니다. 괴롭힘의 이유가 주장 선수 성적을 잘 내도록 들러리를 서면서 운동하라는 요구를 거절했던 것이란 것만 약간의 차이가 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경주시청팀에서 젊은 유망주와 선수들이 폭력을 당하고 폭언을 들으며 힘들어했던 건 주장 선수를 위해, 또 경주시청 감독을 위해 성적을 내도록 하는 '운동 기계'의 역할을 닥치고 따르지 않았다는 어이없는 이유가 주를 이뤘습니다.

"가해자가 운동 성적이 좋은 선수가 아니었어도 협회와 경주시청 팀, 대한체육회 등이 우리 숙현이의 피해 호소를 묵살했을까요?" (故 최숙현 선수 아버지 최영희 씨)

철인협회
故 최숙현 선수 아버지가 취재진에게 던졌던 이 질문에는 많은 의미가 담겨있습니다. 폭행 가해자로 지목된 감독과 운동처방사, 주장 선수가 모두 구속됐고 재판에 넘겨질 예정입니다. 하지만, 가해자 사법처리가 스포츠 폭력 사건의 재발을 막을 수 없을 것이라고 보는 이유는 그 질문에 담겨 있는 현실 때문입니다. 우리 체육계의 현실은 과정에서 어떤 문제가 생기고, 그로 인해 어린 선수들이 고통받고 희생당하더라도 성적만 좋다면 가해자들이 과정에서 초래한 문제는 어느 정도 덮어줄 수 있다는 반복된 나쁜 선례가 많습니다. 이런 체육계의 나쁜 선례가 줄기가 됐고, 엘리트 스포츠 육성 방식이란 뿌리가 그걸 받쳐주며 스포츠 폭력이 자라고 있는 구조입니다. 故 최숙현 선수가 지난 2월부터 숨지기 직전인 6월 25일까지 수사기관 외에도 경주시청, 경주시체육회, 철인3종협회, 국가인권위원회, 대한체육회에 피해를 호소했지만, 어느 한 곳 적극 나서지 않아서 그녀를 절망하게 한 것도 이런 구조 때문입니다.

"나를 보호해 줄 수 있는 기관이라고 하는 곳에 문을 두드리지 않습니까? 그런데 여섯 군데의 안전망, 보호망이 한 군데도 작동하지 않은 거죠. 그 선수가 느꼈을 절망감이 얼마나 컸을까요? 사실 이 스포츠 폭력 문제가 어제 오늘 이야기가 아닙니다. 반복적으로 계속 왜 이 문제가 나타나는 건가? 언론에 알려진 심한 사례는 빙산의 일각이고 그 수면 아래에 문제도 엄청나게 많은데 그렇다면 이 엘리트 스포츠 육성 시스템을 변화시켜야 근원적으로 문제가 해결될 수 있는 것이지 아니면 제2, 제3의 피해자가 나올 수밖에 없다" (문경란 전 스포츠혁신위원장)

냉전 시대 국제대회 메달 숫자가 국력으로 비춰지던 시절에 탄생한 엘리트 스포츠 육성 시스템은 지금은 옛 동구권 국가들도 더 이상 하지 않는 방식입니다. 국가가 체육특기자란 제도를 만들어서 운동을 택한 학생들을 공부에서 밀어낸 채 '운동 기계'로 육성하고 그들에게 외길 인생을 강요하고 있는 이 시스템에선 진학, 진로를 결정하는 '권한'을 가진 지도자와 체육계가 '절대 권력' 입니다. 취재 중 만난 선수와 부모들은 부당한 대우를 받거나 폭력을 당해도 운동을 그만두겠다는 마음을 먹지 않는 한 어떤 신고 체계를 만들어도 피해를 털어놓기 어려운 여건이라고 말합니다. 사실 스포츠 폭력의 근본 원인이 엘리트 체육 육성 방식이란 진단은 지난해 1월 문 대통령을 시작으로 한 범정부 대책 발표에서도, 그리고 대한체육회장의 사과 기자회견에서 등장했고 그걸 전면 개선하겠다고 약속까지 했습니다. 하지만, 정작 5개 부처 차관과 민간 전문가들이 참여한 민관합동 스포츠 혁신위원회에서 학업과 운동을 병행하도록 하는 첫 단계 권고안을 내놓자 체육계는 강력히 반발했고 결국 한 걸음도 앞으로 나가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故 최숙현 선수 사건이 일어나게 됐습니다.

이런 엘리트 체육 육성 방식으로 배운 지도자들은 폭력의 대물림을 하고 있는데 지금 자라나는 젊은 세대들에겐 감당할 수 없는 '시대착오적 부당함'입니다. 이 갈등이 젊은 선수들을 절망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폭력의 대물림 방식에 익숙한 체육계 지도자들 입장에선 속으로 젊은 선수들이 나약하다고 한탄할지 모르겠지만, 대단히 잘못된 생각입니다. 이젠 더 이상 우리 사회가 엘리트 체육 육성 방식의 부작용을 좋은 성적을 이유로 용인하지 않는 수준이 됐다는 걸 받아들여야 하는데 말과 행동이 다른 대한체육회는 아직 그럴 자세가 안 된 것처럼 보입니다.

경주시청
근본 원인 개선은 하지 못한 채 체육계는 어렵게 용기 낸 스포츠 폭력 피해자들을 '카르텔'로 절망케 하고 있습니다. 故 최숙현 선수의 피해 호소 과정을 취재하면서 알게 된 새로운 사실은 지난 2월 경주시청이 진정을 받고 작성한 '민원처리 결과보고서'가 거짓 내용으로 작성됐다는 것이었습니다. 경주시청 팀은 경주시청이 경주시체육회에 위탁을 해 운영하고 있고 현 경주시장은 지난해까지 경주시체육회장이었습니다. 그래서 경주시청이 작성한 민원처리 결과 보고서 내용은 경주시 체육회는 물론 철인3종 협회, 대한체육회가 이 사안을 들여다볼 때 기본 자료로 활용될 수밖에 없는데 그 보고서를 보면 '폭행은 별게 아니고 약간의 왕따만 있었다'고 정리돼 있습니다. 경주 시청을 거쳐 간 5명의 선수(최숙현 포함)에게 진술을 받아서 작성했다고 했는데 이 가운데는 최숙현 선수의 폭행 피해를 일관되게 증언해 줬던 2명의 유일한 선수들도 있습니다.

그런데 경주 시청이 받았다는 그들의 진술서를 보니 두 명 모두 '감독으로부터의 폭언과 폭행은 없었다' 고 진술을 시작합니다. 당사자들에게 확인해 보니 경주시청이 진술서를 받았다고 한 날 경주시청과 통화한 적도, 감독의 폭행이 없었다고 진술한 적도 없다고 했습니다. 혹시 몰라서 경주시청과 당사자인 선수들을 오가며 여러 차례 확인을 했는데 같은 대답을 들었습니다. 경주시청 담당자는 자기는 갖고 있는 번호로 통화를 했고, 그 기억을 바탕으로 진술서를 작성했다고 해명했지만 왜 당사자들은 통화한 사실조차 없다는데 '실체적 사실'과 다른 내용을 진술서라고 작성했냐는 질문에는 명쾌한 답을 하지 않았습니다. 최숙현 선수 측 진정 당시 뉴질랜드에서 전지훈련 중인 감독은 당시 경주시청과 철인3종 협회에서 연락을 받고 진정 사실을 들었고 자신의 입장을 전했습니다. 경주시청이 작성한 보고서와 감독이 전해 온 입장은 초기부터 이 사안을 규정하는 척도가 돼 이후 故 최숙현 선수를 고립시키게 됩니다.

감사 당일 문건 돌린 철인3종 협회
전국에 감독과 선수 숫자가 얼마 안 되는 철인3종 경기 바닥에서 인맥으로 서로 얽힌 힘은 어린 선수 한 명을 몰아세우기 충분했습니다. 실제 최숙현 선수 죽음이 알려진 뒤 열린 지난달 2일 경주시청 운영위 회의록을 보면 경주시체육회장과 위원들이 가해자들을 참석시켜놓고선 폭행 사실을 따져 묻지 않고 오히려 숨진 최숙현 선수가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었고 습관적으로 거짓말을 한 걸로 판단된다는 식으로 몰아가는 내용이 적혀 있습니다. 카르텔의 힘이 사건을 어떻게 은폐해 왔는지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전국 곳곳 모든 종목 협회와 체육회에 얽혀 있는 카르텔은 지금도 굳건합니다. 그래서 스포츠 폭력 조사의 경우 조사 기구가 사건 초기 단계부터 미국처럼 체육 단체 관련자들은 모두 배제하고 조사하는 '배타적 조사권'을 도입하고, 징계권도 갖도록 해야 한다고 스포츠 혁신위원회에서 권고했지만 이것도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1년 넘게 국회에서 법 통과가 늦어져 늑장 출범한 스포츠윤리센터가 이달 출범했지만 배타적 조사권과 징계권 없이 체육계의 카르텔을 뚫고 실체적 진실을 밝혀내는 역할을 하기엔 한계가 많다는 전문가들의 지적이 나오는 이유입니다.

부당한 폭력에 분노한 사회적 여론에 "벌금 2~30만 원" 수준이라고 담당 경찰이 언급했다는 가해자들의 폭행은 구속 기소돼 재판을 받게 됐습니다. 재판부가 어떤 판결을 할지는 지켜봐야 하겠지만, 한 가지 확실한 건 그런 가해자들을 '육성'한 엘리트 스포츠 시스템과 체육계 카르텔은 이번에도 면죄부를 받았다는 점입니다. 도대체 얼마나 더 젊은 선수들이 고통받고 호소해야 근본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행동에 나설지 답답한 마음이 드는 취재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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