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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잇] 직장인 애환, '한 큐'에 날려보자

[인-잇] 직장인 애환, '한 큐'에 날려보자

김창규│입사 21년 차 직장인. 실제 경험을 녹여낸 회사 보직자 애환을 연재 중

SBS 뉴스

작성 2020.08.13 11:08 수정 2020.08.13 15:46 조회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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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형 프로젝트 한 건을 마친 뒤 그동안 고생에 대한 회포를 풀기 위해 퇴근 후 회식을 했다. 술 한잔 들어가니 너 나 할 것 없이 그동안의 이런저런 에피소드를 털어놓으면서 웃고, 눈 흘기고, 화해하고 그랬다. 그렇게 즐거운 시간을 마치고 자리를 끝내려고 하는데 지점장이 나한테 복수전을 하자고 한다. 나는 흔쾌히 '콜' 했다.

갈 사람은 가고 나 포함 4명이 당구장을 향했다. 전에 당구 경기를 했던 그 멤버 그대로다. 우리는 이번에도 전처럼 같은 사람을 한편으로 해서 승부를 내기로 했다. 게임 시작하기 전 내가 지난번 실력을 보니 서로 다마 수를 내려야 할 것 같다고 제안했다. 하지만 동료들은 내 말을 단칼에 거절했다. 그때는 너무 오래간만에 쳐서 실력이 나오지 않았던 것이니 그냥 하자고. 난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으나 "끝도 없이 칠 것"이라고 우스갯소리를 했다.


오늘 당구 한판 콜? 콜!
내가 초구를 치며 게임을 시작했다. 못 쳤다. 내가 공을 모아 준 것은 아니지만 내 적수인 지점장은 3점을 내리쳤다. 그러자 내 편인 A가 말 견제를 시작했다. 어쩌고저쩌고 말로 신경을 긁으니 지점장과 한 편인 B가 한마디 한다. "그러지 마세요. 당구는 왕족 스포츠예요. 품행불량자처럼 하지 말자고요." 나는 이 말에 의구심을 품고 물었다. "당구는 대중이 즐기는 게임인데?" 그러자 그는 서로 순서를 기다리는 시간마다 자신의 당구에 관한 역사 지식을 나한테 뽐냈다. 정리하면 이렇다.

당구는 B.C 400년경 그리스에서 시작되었다고 하나 정확한 것은 알 수 없다. 아무튼 오늘날 스포츠로 당구가 발전한 것은 프랑스에서 1570년경 국왕이 당구를 즐겨 그의 부관들이 연구를 거듭한 후에 궁중 스포츠로서 점차 자리를 잡았다고 한다. 우리나라는 1915년 조선의 마지막 임금인 순종이 당구대를 일본에서 수입하여 창덕궁 내에 대신들과 즐겼다고 전해지고 있다.


'당구를 프랑스 국왕과 우리나라 임금이 즐겼다니 정말 왕족 스포츠 맞네'라는 생각이 들었다.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어서 지적 만족은 했지만 정신적으로는 더 힘이 들었다. 50분이나 흘러갔는데 서로 소위 말하는 알다마도 다 못 쳤기 때문이다. 그러자 내 편 A에 대한 불만이 속으로 쌓여갔고 결국 싫은 소리를 해 댔다. "아니, 왜 그렇게 세게 치는 거야. 그렇게 힘 조절을 못해." 그러자 A는 "저 당구공이 자꾸 우리를 업무적으로 괴롭혔던 처럼 보이잖아요. 그래서 나도 모르게 자꾸 힘이 들어가요. 박살 내야지 하면서 말입니다." 우리는 이 말에 웃음을 터트리며 더 세게 치라고 응원도 했다. 언젠가 읽었던 책에서 현대사회의 인간관계를 당구공에 비유한 것이 떠올랐다.

우리가 맺고 있는 인간관계도 이러합니다. 속사람을 만나지 못하고 그저 거죽만을 스치면서 살아가는 삶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표면만을 상대하면서 살아가지요. 나는 자본주의 사회의 인간관계를 '당구공과 당구공의 만남'이라고 표현하기도 합니다. 짦은 만남 그리고 한 점에서의 만남입니다. 만남이라고 하기 어려움 만남입니다. 부딪힘입니다.

- 신영복


게임에 집중하지 못하고 잠시 이렇게 딴생각을 하다 보니 내가 제 역할을 못했다. 내가 쳐야 할 분량의 반 정도밖에 못 친 것이다. A는 상사인 나를 구박하지도 못하고 고군분투했다. 미안한 마음에 정신을 차려 게임에 집중했으나 상대편인 B는 정말 공을 주지 않았다. 그러니 맨날 헛방.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내 차례인데 공이 모였다. 아주 예쁘게. 그러자 지점장이 같은 편인 B에게 장난조로 비난한다. "야. 너 직장생활 할 줄 아네. 계속 그렇게 해라" 난 그와는 반대로 "이제야 네가 정신을 차렸구나. 처신을 잘해야지"라고 말하며 함박웃음을 지었다.

1시간 30분이 훌쩍 지나고 놀이가 노동이 되어버리자 서로 지쳐 푸념이 나오기 시작했다. 그래도 막상 자기 순서가 되면 집중해서 쳤다. 역시 누구나 게임을 지기는 싫은 모양이다. 또다시 내 순서다. 당구대 모서리에 빨간공 2개가 45센치 정도의 간격을 두고 나란히 위치해 있다. 이거 있는 공이다. 하지만 난 각도를 잘 계산할지 몰라서 주춤대고 있었는데 이때 A가 여기를 찍으라는 거다. 난 반드시 이기겠다는 욕심을 버리고 초심으로 돌아가려고 노력했다. 긴장된 손으로 큐대를 잘 잡고 온 신경을 집중해 공을 쳤다. 흰 공이 다람쥐같이 달려가더니 벽을 세 번 맞고 빨간공 하나가 맞았다. 그러더니 흰 공이 내가 생각한 대로 가지는 않았지만 한번 더 벽에 맞더니 정확하게 또 하나의 빨간공을 맞췄다. 야호~ 드디어 거의 2시간 만에 끝났다. 승리다.

최근 들어 재미를 솔솔 느끼는 당구. 왜일까? 아마도 나 포함 대부분 직장인들의 삶이 너무 뻔하고, 지나치게 가식적이며, 안전이 완벽하게 확보된 상태에서 일을 하는 반면 당구는 이것과 대조되어서 그런 것 같다. 다른 스포츠처럼 당구 또한 누가 이길지 예측 불가능한데다가 무장해제한 상태에서 거리낌 없이 헛소리나 잡담을 즐길 수 있고, 물고기 떼에 메기 한 마리 풀려 있듯이 마음을 졸이거나 간담을 서늘하게 하기도 한다.

그러니 무미건조한 삶을 사는 우리 같은 직장인들에게는 돈도 많이 들지 않으면서 잠시 해방감, 승부의 쾌감을 맛볼 수 있는 당구를 예찬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지루한 날이 계속되는 요즘 과거 젊었을 때 즐겨했던 당구 한판 권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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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잇] 어딜 가든 이상한 상사는 꼭 있다 (ft. 직장인 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