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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잇] 인생은 무의미하고 세계는 허구이며 예술은 사기다

Max | 뭐라도 써야지. 방송사 짬밥 좀 먹은 저널리스트, 프로듀서.

[인-잇] 인생은 무의미하고 세계는 허구이며 예술은 사기다
신문을 보는 이유 중 하나는 거기 칼럼니스트가 있기 때문이다. 내가 즐겨 읽는 칼럼니스트 두 분이 최근 며칠 간격으로 각기 다른 신문에 쓴 글을 읽다가 머리 속이 '번쩍'하는 경험을 했는데, 읽다 보니 두 칼럼이 기시감이 들 정도로 묘하게 회통하는 데가 있어 글자 그대로 한번 '엮어본다'.

국민주권은 허구?

먼저 정치학자 김영민 교수는 《허구와 함께 살아가는 법》이란 제목의 한 신문 칼럼에서 '왕권신수설'(王權神授設)만큼이나 '국민주권'(國民主權)이란 개념 역시 사실이 아니라 허구일 뿐이라고 말한다. 공화국 최고의 '금과옥조'(金科玉條)인 헌법 제1조-'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소수의 통치자가 국민 전체로부터 권력을 위임받았다고 자임하기 위한 허구"라는 것이다. (소수가 다수를 다스리는 현상은 정말 놀랍다고 한 철학자 데이비드 흄을 인용) 하지만 "사랑해"라는 허구의 언어가 사랑을 지탱하듯, '국민주권'이라는 픽션을 믿음으로써 우리는 "정치적 소외감을 견디"며 "질서를 유지할 힘을 얻는다"고 말한다. 이윽고 김 교수는 오늘날과 미래에 한국사회를 뒷받침할 정치적 픽션은 무엇이냐는 통찰적 물음으로 글을 마무리한다.

인생에 의미 따위는 없는데...

다음으로 여성학자 정희진님이 얼마 전 타계한 녹색평론 발행인 김종철 선생을(▶◀ R.I.P) 회고하며 쓴 칼럼이다. 《무의미의 '승리', 김종철 선생님께》라는 제목의 이 칼럼에서 정희진은 "인생에는 의미가 없다"고 첫머리에 선언한다. 대자연 속에서 "사람의 생애는 다른 생물과 마찬가지로 자연 순환의 미미한 사건일 뿐"이라는 것이다. 정희진은 생태적 관점에서 세계와 인간을 응시하고 성장일변도의 물질 문명을 비판했던 김종철 선생을 추억하면서 "삶은 무의미하지만 이 진실을 의식하면서 살 수는 없으므로, 사람들은 의미라는 가상의 장치를 만들었다"고 말한다. (김영민 교수가 허구, 또는 픽션이라고 한 것과 비슷한 맥락이다) 그런데 현대사회에서 "물질문명이라는 '의미'가 모든 것을 집어삼키"면서 인간은 죽음이라는 성찰을 잃어버리고, 사고하는 능력은 타락하고 있다며 이를 직시하던 선생의 타계를 슬퍼했다.

사치야말로 예술의 본질

우리가 사는 세계(Die Welt)의 본질을 통찰한 두 칼럼을 엮어 읽으면서 나는 재작년 별세하신 황현산이라는 또 다른 걸출한 칼럼니스트의 글을 떠올렸다. 불문학자였던 그는 한 신문에서 《우물에서 하늘보기》라는 제목으로 칼럼 27편을 연재했다. 그중 한 편인 '사치와 사보타주'는 언제나 기억에 남는다.

황 선생은 그 칼럼에서 "오페라 가수는 온갖 기량을 다 바쳐 가장 불편한 방법으로, 다시 말해서 가장 사치스런 방법으로 말한다"는 예를 들고는 "시인이 감정의 사치를 위한 것이 아니라면 운과 박자를 맞추기 위해 왜 그렇게 긴 시간을 낭비하겠냐"며 "예술을 예술 되게 하는 기본 요소에서 사치가 크게 한몫을 한다"고 썼다. 예술 한다고 빵이 나오지도 밥이 나오지도 않지만("예술하고 있네"…라는 흔한 비아냥을 생각해보자) 문학평론가 김현이 "인간에게 유용한 것은 대체로 그것이 유용하다는 것 때문에 인간을 억압한다…그러나 문학은 유용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인간을 억압하지 않는다"고 말했듯이 바로 그점이 예술의 본질이자 덕목임을 설파했다. 그리고 그 무용하고 무의미하고 사치스런 허구는 "이 분주한 달음박질에서 한 걸음 비켜서서 내가 왜 사는지, 내가 어떻게 살고 있는지"를 묻는 일이라 했다.

사치 또는 사기

1984년 어느 날 한국의 주요 일간지들이 매우 드물게도 한 예술가의 발언을 대서특필했다.

"선생님, 예술이 무엇입니까?"
"예술은 사기야."


세계적인 비디오아티스트 백남준 선생이 34년 만에 귀국하면서 공항에서 기자들의 질문에 한 대답이다. 이 말이 과연 무슨 말이냐를 놓고는 갖은 이론(異論)과 설명과 추측이 있거니와 "예능을 다큐로 받느냐"는 얘기까지 있지만, 정치제도는 허구이며 인생에는 의미가 없을진대 백남준 선생이 내뱉은 말은 실제로 그러하게 느껴진다.

그리하여 "악업(惡業)과 고통으로 가득하고, 종종 불쾌한" 삶에서(김영민) "우리는 의미 없이 살 수 없"으므로(정희진) "예술은 자주 그 무용한 사치와 그 과격한 사보타주로 현실의 억압을 비껴간다"(황현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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