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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파일] 우리 선수들이 계속 맞는 9가지 이유

고개 숙인 이기흥 대한체육회장

지난해 1월 초 온 국민을 충격에 빠뜨린 쇼트트랙 조재범 코치 성폭행 의혹 사건이 알려졌을 때 이기흥 대한체육회장은 1월 15일 세 번이나 머리를 숙여 사과하며 이렇게 다짐했습니다.

"지도자들이 선수들의 미래를 좌지우지하며 이를 무기로 부당한 행위를 자행하는 것을 뿌리 뽑도록 하겠습니다."

이로부터 10일 뒤인 1월 25일 당시 도종환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은 이렇게 약속했습니다.

"더 이상 스포츠 강국이란 미명 하에 선수들이 고통받는 일이 없도록 정부가 앞장서 노력하겠습니다."

체육계 성폭력 대책 발표하는 도종환 문화체육관광부 장관

한국 스포츠를 이끌었던 두 수장의 다짐은 결과적으로 빈말이 되고 말았습니다. 최근 세상을 떠난 철인 3종 경기의 최숙현 선수는 2019년 1월 이후에도 계속 소속팀 감독과 팀닥터, 선배 선수들에게 이루 말하기 힘든 가혹행위를 당한 끝에 극단적 선택을 했기 때문입니다.

그럼 우리 선수들은 왜 계속 맞아야 할까요? 일선 지도자, 선수, 대한체육회 및 각 경기 단체 관계자의 말을 종합하면 이렇습니다.

1. "맞아야 메달을 딴다"

국가대표 감독이든 실업팀 감독이든 학교 운동부 감독이든 월급을 받고 자리를 지키려면 성적이 나와야 하는 것인 한국 스포츠의 현실입니다. 그런데 성적은 선수가 내는 것입니다. 과학적이고 능률적인 지도 방법으로 선수의 기량을 끌어올리는 것이 정상이지만 어떤 지도자들은 "맞아야 메달을 딴다"고 믿고 있습니다. 즉 체벌이 가장 효과적인 수단이라는 그릇된 인식을 갖고 있는 것입니다.

2. 감독은 갑, 선수는 을

선수들이 지도자에게 꼼짝하지 못하는 이유는 감독이 선수의 '생사여탈권'을 쥐고 있기 때문입니다. 감독 눈 밖에 나면 자신의 미래가 망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어지간한 폭력은 감내하는 것입니다. 일부 비양심적인 지도자는 이런 '갑을 관계'를 악용해 일상적으로 폭력을 행사하고 있습니다.

3. 선수의 임무는 지도자에 대한 복종

권종오 취파용

한국 스포츠에서 헌법처럼 통하는 <국가대표 훈련지침> 제8조(임무) 10항을 보면 "국가대표 선수의 임무가 지도자의 지시와 명령에 복종하는 것"이라고 명시돼 있습니다. 합리적 지시와 명령이 아니라 그냥 지시와 명령에 복종해야 한다고 돼 있는 것입니다. 조재범 코치 사건 이후 각계에서 이 조항을 변경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왔지만 아직까지 단 한 글자도 고치지 않고 있습니다. 이 조항에 따르면 지도자는 지시와 명령을 내리는 사람인 반면 선수는 복종해야 하는 사람에 불과합니다.

4. 솜방망이 징계의 온상 '재심 제도'

선수들이 지도자나 고참 선배에게 가혹행위를 당해도 선뜻 고발하지 못하는 것은 대한체육회의 '재심 제도'가 마음에 걸리기 때문입니다. 성폭력이나 폭력으로 해당 경기단체에서 영구제명을 받은 사람도 '재심'을 거치면 대부분 징계가 완화됐습니다. 즉 2~3년 지나면 폭력 지도자가 다시 일선으로 돌아와 자신을 고발한 피해자와 대면하게 되는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 이런 현실 때문에 피해 선수는 보복이 두려워 관계 기관에 고발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스타 출신인 A 코치는 선수 성추행으로 영구제명을 받았지만 재심을 통해 자격정지 3년으로 살아났습니다. B 코치는 2014년 성추행 혐의로 자격 정지, 2016년 불법 도박으로 자격 정지 1년을 받았지만 불과 7개월 만에 특별 사면됐고 C 코치는 2004년 대표팀 선수 폭행으로 사퇴했지만 이후 올림픽에 2차례나 출전하기도 하는 등 '있으나 마나' 한 징계로 끝나고 말았습니다.

5. 선수 인권 담당자 6년 동안 8명

선수 인권에 대한 인식이 부족한 것도 폭력의 일상화를 막지 못하는 요인입니다. 대한체육회에는 선수 인권을 담당하는 부서가 있습니다. 2014년부터 2020년까지 명칭은 좀 달라졌지만 선수의 인권을 보호하는 임무는 같았습니다. 그런데 지난 6년 동안 이 부서장을 맡은 사람이 무려 8명이나 됩니다. 1년도 채 안 돼 계속 부서장을 교체한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선수 인권에 대한 전문성과 책임감이 생길 리 없습니다. 고 최숙현 선수는 지난 4월 8일 대한체육회 스포츠인권센터에 피해 사실을 알렸지만 석 달 가까이 조사가 제대로 이뤄지지 못했습니다. '늑장 행정'이란 비판을 면하기 어려운 대목입니다.

*대한체육회 선수 인권담당 부서장 교체(2014년~2020년)
2014년 하반기 선수권익부장 A 씨
2015년 1월 9일 공정체육부장 B 씨
2016년 3월 27일 공정체육부장 C 씨
2017년 1월 25일 클린스포츠센터장 D 씨
2017년 4월 1일 클린스포츠센터장 E 씨
2018년 4월 19일 클린스포츠센터장 F 씨 (감사실장 겸임)
2019년 1월 18일 클린스포츠센터장 G 씨
2020년 1월 29일 클린스포츠센터장 H 씨

대한체육회

6. 대한체육회 직접 조사는 3.5%

지난 2014년부터 18년까지 5년 동안 대한체육회가 폭력 사건을 직접 조사한 것은 113건 중 4건에 불과합니다. 성폭력 피해 조사는 27건 중 단 1건만 직접 조사했습니다. 그 대신 주로 해당 경기 단체나 시도체육회에 사건을 이첩했습니다. 즉 피해자가 신고한 단체로 조사를 넘긴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피해자인 선수의 신원이 고스란히 노출될 위험이 있고 한국 스포츠의 현실상 가해자와 친분 있는 사람이 조사에 참여할 가능성이 커집니다. 폭력 사건 가해자를 철저하게 조사하는 것을 기대하기 어려운 상황이 생길 수 있다는 것입니다.

7. 전문성 떨어뜨린 문체부 '순환보직'

대한체육회를 관리 감독해야 하는 문화체육관광부도 이번 사태에서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문체부는 문화, 체육, 관광, 종교 등 서로 다른 분야를 모두 관장하는 특이한 정부 부처입니다. 체육 업무를 담당하던 직원이 전문성을 쌓기도 전에 어느 날 갑자기 관광이나 예술 분야로 발령이 나기도 합니다. 그동안 한국 스포츠 정책을 담당하던 문체부 A 과장은 대한체육회 정관 개정 등 현안이 쌓였는데도 지난달 갑자기 스포츠와 아무 관련이 없는 국립중앙도서관으로 이동했습니다. 1~2년 있으면 완전히 다른 분야로 가는 상황에서 어떻게 전문성을 쌓고 책임감을 가질 수 있겠습니까?

8. 국가대표만, 서울에만

조재범 코치 사건 이후 문체부와 대한체육회는 숱한 대책을 내놓았습니다. 하지만 피부에 와닿는 정책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충북 진천선수촌 안에 선수 인권 상담실을 설치했지만, 현역 국가대표만 이용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고 최숙현 선수는 대한체육회가 운영하는 스포츠인권센터에 진정서를 냈습니다. 스포츠인권센터는 서울 한 곳에만 있어 최 선수처럼 먼 지역에 있는 선수들은 이용하기가 불편합니다. 전화나 이메일로는 조사에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대한체육회는 그동안 각 시도에도 스포츠인권센터 설치를 해달라고 요청했지만, 정부는 예산 문제를 거론하며 난색을 표했다고 합니다.

9. 그릇된 온정주의(우리가 남이가?)

폭력의 일상화가 계속된 데는 그릇된 온정주의도 빠질 수 없습니다. 지난 2016년 대한체육회 선수위원회의 한 선수위원은 "내 가족이 그랬다고 생각해봐라. 성추행으로 영구제명하면 지도자 하기 어렵다"며 영구제명 위기에 처한 A 코치를 두둔하는 듯 발언을 했고 A 코치는 결국 자격정지 3년으로 감경됐습니다. 조재범 코치 폭행 사건 때 '한국 빙상의 대부'로 불렸던 전명규 씨는 "(조재범이) 구속이 됐잖아. 이제 그만해야지. 이제 너네는 거꾸로 가해자가 되는 거야, 피해자가 아니라. 그래 안 그래?"라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폭력을 해도, 성폭력을 해도 내 제자, 내 동료는 봐줘야 한다는 '제 식구 감싸기' 문화가 지속되는 한 가혹행위는 근절되기 어렵다는 게 중론입니다.

최윤희 문화체육관광부 2차관

고 최숙현 선수 사건이 터지자 문재인 대통령은 선수 출신인 문체부 최윤희 제2차관에게 스포츠 인권 강화를 강력하게 지시했습니다. 최윤희 차관은 즉시 대한체육회를 방문해 사건 경위를 보고 받고 가해 관련자를 엄중 문책하겠다고 다짐했습니다. 문체부와 대한체육회는 조만간 어디서 많이 본 듯한 대책을 내놓을 것이 거의 분명합니다. 하지만 폭력은 절대 안 된다는 스포츠인들의 대오각성과 함께 철저한 '무관용 원칙'이 없다면 우리 선수들은 앞으로도 계속 맞아야 할지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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