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문났어요? 개인의 만족보다는 (영화) 보신 분들이 좋아해 주니까. 재밌다는 이야기를 포함해서 색다른 시도들을 알아주시는 것 같아서 기분 좋아요"
인터뷰장의 공기가 사뭇 들떠있었다. 2018년 영화 '버닝'이 마지막이었던 것을 생각하면 무려 2년 만의 인터뷰였다. 작품의 톤 앤 매너가 극명하게 달라서 일까. 배우의 기분도 신나 보였다.
고백하자면, 한때 유아인을 별종으로 생각했었다. 확고한 자기 주관, 빈말과 겉치레를 하지 않는 입, 소신에 따른 행동 등 대중이 환호하는 이미지의 테두리 안에서 자신을 드러내는 것을 최소화하는 또래 배우들과는 사뭇 달랐기 때문이다.
인터뷰 자리에서는 어떤가. 인터뷰이로서 분명 흥미로운 존재지만, 그의 말들을 활화자 하기엔 조금 어려운 측면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관념적이고 철학적인 말을 술술 내뱉는 이 배우는 그 말을 그대로 옮겨도, 정리를 해서 옮겨도 오해를 불러일으킬 소지가 있다. '활자화된 말이 모두 정확한 것'은 아니다라는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이유다. 이야기를 나누는 공간과 분위기, 대화의 온도를 제대로 담아내지 못하는 글은 위험할 수도 있으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배우와의 인터뷰에는 대화의 즐거움이 있다. 어느 순간부터 '대한민국에 이런 배우 한 명쯤 있어도 되잖아'라는 생각을 하게 됐다. 그리고 이제는 그의 연기를 보고, SNS를 들여다 보고, 그의 생각을 듣는 것이 더욱 즐거워지기 시작했다. 존재 자체가 흥미로운 배우다.
◆ "저 좀비 영화 마니아예요"
유아인과 좀비물, 다소 의외의 조합처럼 여겨졌다. 그는 자신이 좀비 영화 마니아라고 했다.
"좀비 영화뿐만 아니라 호러 영화도 좋아해요. 원래부터 다양한 장르의 영화들을 좋아했어요. 특히 좀비물에서 느껴지는 영화적 체험, 쾌감이 좋아요. 이건 개인적 기호나 유아인이 그리고 싶은 영화적 그림과는 차이가 있다고 느낄 수도 있겠네요. 이제는 (내적으로) 좀 편안함이 생겨서 시도해볼 만하다고 생각했는데 '#살아있다'가 좋은 기회가 됐죠. 너무 장르적인 부문에만 치중하지 않은 작품이면서도 배우로서 새로운 시도를 해볼 수 있겠다고 예상했었어요. 기대했던 바가 영화의 결과물로 이어진 것 같아서 만족스러워요."
'#살아있다'는 원인불명 증세의 사람들이 공격을 시작하며 통제불능에 빠진 가운데 데이터, 와이파이, 문자, 전화까지 모든 것이 끊긴 채 홀로 아파트에 고립된 이들의 이야기를 그린 생존 스릴러 영화. 유아인은 이번 영화에서 20대 청년 '오준우' 역할을 맡아 좀비의 습격에 맞서 생존 혈투를 벌였다.
영화는 시작 후 1분도 채 안돼 보는 이들을 사건에 진입시킨다. 신파나 멜로라인도 배제하고 생존 혈투에 집중하는 군더더기 없는 전개를 보여준다. 그 덕분에 논리나 개연성이 결여된 듯한 장면도 다수 존재한다. 이는 장르 영화 안에서 어느 정도 논리적 허용이 가능한 부분이다.
"국내적인 특징이 잘 살아있는 영화라고 생각해요. 정통 좀비물의 특징을 계승하면서도 차별화된 부분들이 있어요. 배우의 활용 방식도 달랐던 것 같아요. 전에 못해본 걸 해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죠. 전반 40분을 홀로 쭉 끌고 나가야 하는 것부터 숙제였어요. 평범한 청년에서부터 한 번도 경험할 수 없는 극단적 상황까지 표현해야 해서 연기를 폭넓게 해 볼 수 있겠단 생각이 들었어요. 속도감 있게 극을 전개하면서도 힘을 잃지 않는 장르의 특성도 잘 살아있고요."
이 영화가 작년에 당도했다면, 설정들을 그저 가상현실 정도로 여겼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코로나19 바이러스가 국내외에 창궐하고 있는 분위기 속에서 만난 '#살아있다'는 현실 은유처럼 다가오기도 한다. "당신의 오늘은 안녕하십니까?"라고 묻는 시기에 생존을 주제로 한 영화는 묘한 현실성을 부여한다.
"그렇다. 준우와 유빈이 집안에서 고립된 상태가 영화 바깥에서도 현실로 느껴지는 상황이 됐다. 영화를 찍을 때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그렇다고 해서 "코로나 반갑습니다" 할 수는 없는 거다. 어떤 시대, 어떤 상황에서 영화를 보여 주느냐도 중요한데 이번 영화는 의도치 않게 유독 시의성이 강한 영화가 돼버렸다."
유아인은 이번 영화에서 감독의 연출에 의해 움직이는 수동적인 오브제가 아니라 때와 상황에 맞춰 능동적으로 캐릭터를 만들어나갔다.
"신인 감독과의 작업에서 어떤 적극성을 가져가야 할까를 시험하는 무대였어요. 처음으로 촬영 전에 연기 연습 영상을 찍어 보내기도 하고, 배우들과도 끊임없이 소통했어요. 서로 존중한답시고 입을 닫아버리는 게 아니라 충돌할지언정 서로의 의견을 계속 표출했던 거죠. 아시겠지만 배우들끼리 연기를 논하는 게 쉬운 건 아니거든요."
영화 시작 후 관객들은 40여 분간 유아인 하고만 만나게 된다. 원맨쇼에서 드러난 건 배우의 연기 장악력이다. 극을 홀로 끌고 가야 했던 경험에 대해 유아인은 "저의 경험치를 시험해볼 기회가 되겠다고 생각했어요. 실제로 내 스스로를 점검하고 돌아볼 수 있는 기회가 됐고요."라고 웃어 보였다.
집안에 고립된 준우가 아버지의 위스키를 마시고 춤을 추는 듯한 장면이 있다. 유아인이 촬영 전부터 가장 중요하게 여긴 신이라 연습하는 장면을 촬영해 감독에게 보내기도 했다.
블루 스크린에서 장시간 촬영한 것도 전에 없던 경험이었다. 유아인은 "생각보다 어려웠다"라고 말했다.
"한국 영화가 배우를 트레이닝시키는데 좋은 점은 꽤나 현실적으로 반응할 수 있도록 준비해준다는 것이에요. 그런데 블루 스크린은 전적으로 상상에 의존해야 해요. 그 부분에서 자신은 없었고 저에게도 일종의 시험 무대였어요. (하고 나니) 조금 더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초능력 쓰는 영화를 해볼까? 라는 생각을 하기도 했어요. 저 히어로물도 굉장히 좋아하거든요. 그런 영화의 의미와 재미, 그리고 관객에게 선사하는 힘이 있잖아요. 유아인을 달리 활용하려는 시도들도 좀 생각해주세요.(웃음)"
그러면서 유아인은 2018년 개봉한 영화 '마녀'를 언급했다. 그는 "그 영화를 보는데 너무 부럽더라고요. '마녀2'가 제작된다면서요? 제가 뭐 할 거 없을까요. 하하. 저조차도 조금 다른 방식으로 플레이하는 제 모습을 보고 싶다는 생각을 해요. 했을 때 꽤 잘 어울리거든요"라고 어필하기도 했다.
청춘은 유아인을 상징하는 단어다. 이번 영화에서도 그는 청춘의 생동감 넘치는 얼굴을 보여준다. 이전 작품 속 인물들이 현실적 보편성을 바탕으로 동시대 젊은이의 모습을 함축, 은유적으로 표현하는 캐릭터였다면 이번 영화에서 연기한 준우는 현실 어디에서라도 볼 수 있을 것 같은 친근한 인물이다. 말 그대로 '가장 보통의 청춘'이다.
"너무 진지하게 표현하기보다는 내 스스로 편해지고 싶다는 생각을 했어요. (연기가 강렬하고) 선이 굵다는 평가도 좋지만... 한편으로는 내 필모그래피를 통해 형성될 수밖에 없었던 이미지를 스스로 깨고 싶은 마음도 있었죠"
유아인은 "저는 과거에도 제가 꽤나 직설적인 줄 알았어요. 인터뷰할 때도 그래요. 저는 말의 정확성을 안 믿거든요. 말이 현실을 충분히 반영할 수 있다고 생각을 안 하기도 하고, 옳은 말보다 틀린 경우가 많다고 생각해요. 정확한 단어를 선택하고 싶지만 현실이 모호하기에 모호하게 이야기 싶을 때가 있어요. 과거엔 그랬다면 지금은 내려놨다고 해야 하나. 포기했다고 해야 하나. 아니면 너무 무게를 두지 않는다고 해야 할까."
"전과 다른 부담과 책임도 있었지만 캐릭터를 풀어내고 그려내는 과정은 '#살아있다'가 어느 영화보다 재밌었어요. 개인적으로 이런 캐릭터가 되게 그리웠어요. 많이 안 보신 드라마인데 과거 출연작 중 '결혼 못하는 남자'의 형규가 떠올랐어요. 그냥 동생 같고 친구 같은 캐릭터. 준우를 연기하다 보니까 현실 생활에서도 밝아진 느낌을 발견하게 되더라고요. 저는 인물에 크게 연관 안 받고 (극이나 극 중 인물에서 빠져나오는) 스위치가 있다고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제가 영향을 많이 받고 있었구나 싶더라고요. 주변에서 '너 왜 이렇게 희망적인 이야기를 해?', '너 많이 바뀌었어'라고 하기까지 했어요."
인터뷰 중 "영화 속 좀비처럼 자신을 위협하는 사람을 만났거나 그로 인해 위험에 처하게 된 상황이 있었냐"는 질문이 나왔다. 유아인은 "잃은 거 없고, 무서울 거 없는 사람, 다음이 없는 사람처럼 덤비는 사람은 피해야 한다"라고 말했다.
"인생에 대한 조금의 애착도 없는 사람을 만날 때가 있어요. 멋있는 상황에서 그러는 게 아니라 진짜 내일이 없는 사람인 거죠. 그런 사람이 안하무인이더라고요. 사실 그것도 한 끗 차인 것 같지만요. 막장 인생도 진짜 쿨한 사람이 있는가 하면 위화감을 조성하는 사람도 있죠. 그런 사람을 만나면 저는 회피해요. 어떤 일의 경우 '목숨도 버린다'는 식으로 내 안의 먼가 타오를 때가 있지만 방금 이야기한 사람에게는 굳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여지가 없죠."
짧은 대화 속에서도 유아인의 변화가 엿보였다. 유연해졌으면서도 성숙해졌달까. 스스로도 일부 인정했다.
그 계기를 묻자 "제가 환멸을 잘 느껴요. 지긋지긋한 거지. 요새 친구들이 그 말을 진짜 많이 쓰던데요. 예전과는 다른 방식으로요. 뭔가 끝까지 찼던 거 같아요. 30대를 지나면서 새로운 경험, 도전에 대한 욕심이 생겨난 것 같아요. 제가 쭉 그려왔던 그림, 단락의 골 같은 게 '버닝'이었다고 생각해요. 그 이후로는 과도기인 거죠. 어떻게 플레이하고 어떤 그림을 그려 나갈까에 대한 고민이 생겼어요. 나의 가치관조차도 달리 할 필요가 있겠단 생각을 하면서 나를 개선하고 변화해가는 과정 같아요."라고 말했다.
관찰 예능 '나 혼자 산다'의 출연도 유아인의 변화를 엿볼 수 있는 부분이었다. 그는 과거 예능 울렁증이 있다고 고백한 바 있다.
"예전에는 그 울렁증 때문에 (예능은) 안 하고 싶었는데 이제는 울렁이는 모습도 자연스럽겠다 싶더라고요. 정제된 모습만 보여줘야겠다고 생각했는데 최근 들어서는 뭐 어떤 면이든 자연스러운 게 좋다고 생각해요. 그것을 감추기보다는 이런 면도 있고 저런 면도 있다는 걸 보여주는 거죠. 그런 걸 스스로가 어려워할 때는 사람들도 어려워할 수 있고, 내가 편안해하면 사람들도 그렇지 않을까 싶거든요. 또 '#살아있다'랑 '나 혼자 산다'랑 얼마나 어울려요. '버닝'을 찍고 거기 나가긴 그렇잖아요. 그래서 제가 먼저 (출연)제안을 했어요."
"젊은 제 모습을 연기하는 게 당연한 거였고 보여주고 싶은 연기기도 했어요. 청춘은 찬란한 빛과 어둠이 확실히 존재하잖아요. 그런 걸 다뤄낼 수 있는 대표적인 배우로 인식하고 써주셔서 감사하죠. 배우로서의 욕심, 목표가 있었어요. 집착해왔던 부분이 있었고요. 제 개인의 기호나 욕심이 강렬했고 그것을 위한 직업적 접근이 있어요. 그런데 지금은 뭐랄까. 나를 가둬 놨던 뚜껑이나 벽 같은 게 허물어진 느낌이에요. 이 모든 것은 자존감과 연결될 것 같아요. 나를 서있게 하는 힘 같은 거죠. 그런데 과거에는 좀... 너무 진지하고 깊게 빠져들었던 것 같아요. 그게 제 나름의 차별화 전략이기도 했겠지만요. 살아있기 위해서 기도 했고요."
이날 유아인이 가장 많이 쓴 말은 '그림'이라는 단어였다. 자신이 과거에 무엇을 그려왔는지 말했고, 앞으로는 이런 것을 그려나가겠다는 이야기들이 이어졌다. 어쩌면 이것은 타성에 젖지 않고 나아가려는 스스로를 향한 다짐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역시나 유아인은 유아인답게 살아있다.
(SBS funE 김지혜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