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파일] 인천공항에 갇힌 '터미널맨'…항소장 내민 법무부

인권AS① 난민 심사를 신청할 수 있는 권리

정반석 기자 jbs@sbs.co.kr

작성 2020.06.29 15:30 수정 2020.06.29 16:05 조회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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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터미널' 스틸컷 이미지 (사진=CJ 엔터테인먼트 제공)
망명을 하려다 공항에서 18년을 지낸 사람의 실화를 다룬 영화 '터미널'. 인천국제공항에서도 비슷한 일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정치적 박해를 피해 왔다는 아프리카인 A 씨가 난민 신청조차 못 하고 넉 달 넘게 환승 터미널에 머물고 있는 겁니다. "입국심사대까지 오지 못했으니 신청권이 없다"는 출입국 당국 대응에 소송을 냈는데, 법원은 1심서 "난민 신청서를 낼 기회는 줘야 한다"며 A 씨의 손을 들어줬습니다.

최근 법무부 산하 출입국 당국이 법원에 항소하면서 A 씨의 공항 생활은 기약 없이 길어지게 됐는데요, 법무부의 논리는 무엇인지, 인권 선진국은 이런 경우 어떠한 판단을 내렸는지 살펴봤습니다.

▶ [2020.06.05 8뉴스] [단독] 인천공항서 넉 달째 생활…'난민 심사' 길 열렸다
인천공항 난민 신청자 A씨가 화장실에서 씻는 모습
● 난민 신청서 못 받은 A 씨 "살기 위해 왔습니다"

지난 2월 동남아 국가를 출발해 인천국제공항 환승장에 내린 A 씨, 입국장으로 갔다가 환승 구역으로 보내진 뒤 공항 보안 요원에게 난민 신청 의사를 밝혔지만 신청서는 받지 못했습니다. 난민 심사를 받을 만한 대상인지 따져 보는 절차도 없이 '입구컷' 당한 겁니다. 법무부는 "난민법 6조에 따르면 난민 신청서는 입국심사를 받을 때 제출해야 한다"며 "입국심사대에 못 왔으니 절차를 진행할 수 없다"는 입장을 내세웠습니다.

A 씨는 가족이 목숨을 잃을 정도로 정치적 박해가 심해 본국으로 돌아갈 수 없다며, 넉 달 넘게 인천국제공항 환승 구역에 머무르며 숙식을 해결하고 있습니다. 여행객 도움으로 하루 한 끼 정도 먹는데, 과자로 배를 채우다 보니 복통과 변비에 시달린다고 합니다. 화장실에서 씻고, 공항 의자에서 잠을 청하고, 코로나19 위험에도 마스크 하나로 몇 주를 버티기도 합니다.
 

"넉 달 동안 잠도 못 자고 약도 없고 옷도 없습니다. 음식을 먹지 못해 속이 좋지 않습니다." "저는 목숨을 구하기 위해 왔습니다. 본국으로 돌아가는 것은 불가능한 상황입니다. 차라리 감옥에 들어가는 게 나을 것 같습니다." (A 씨)


● A 씨 손 들어준 1심 법원 "난민 신청 기회는 줘야"

'공익법센터 어필'의 도움으로 출입국 당국을 상대로 소송을 낸 A 씨, 지난 4일 인천지법에서 1심 승소 판결을 받았습니다. 법원은 '입국심사대'라는 특정 장소에 오지 못했단 이유로 난민 신청을 묵살하는 것은 위법한 행위라고 판단했습니다.
 

"이 사건처럼 입국장으로 진입한 원고를 환승구역으로 가도록 한 경우 물리적으로 다시 입국심사대로 갈 방법이 없는데, 이러한 외부적 상황에 따라 난민인정 신청 여부가 좌우된다고 보는 것은 상당히 불합리하다." "난민인정 신청서를 작성하여 접수하는 것을 도와야 할 피고가 아무런 조력을 하지 않고 있는 것은 난민법 6조에 위배된다" (인천지법)


물론, 이 판결이 A 씨를 난민으로 인정해야 된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국경 근처까지 와서 도움을 요청하는 난민 신청자에게 '난민으로 인정할지 여부를 심사할 만한 대상인지 따져볼 기회' 정도는 주란 겁니다. 신청서를 주지 않는 식으로 꼼수를 쓰는 건, "난민 신청자를 본국으로 강제로 돌려보내선 안 된다"는 국제협약과 국내법 취지를 거스른다고 봤습니다.

● 유럽인권재판소 "장기간 방치된 망명 신청자에게 배상하라"

법무부의 대응은 국제적인 인권 기준에서도 동떨어져 있습니다. 지난해 11월 유럽인권재판소는 모스크바공항 환승 구역에 이라크, 팔레스타인, 소말리아, 시리아에서 온 망명 신청자 4명을 최소 5개월에서 최대 1년 9개월까지 방치한 러시아에 대해 수천만 원씩 배상하라는 판결을 내렸습니다. 러시아는 이들이 본국에서 바로 오지 않았다거나 다른 나라에서도 망명 신청을 했다며 책임을 회피하려 했지만, 유럽인권재판소는 과도한 체류 기간, 망명 심사 지연 등을 근거로 러시아가 이들의 자유를 박탈한 것이라고 지적했습니다.

법무부 외경
A 씨 소송에서 "환승만 하게 된 대한민국에서 굳이 난민 신청을 하려는 것은 선택적 난민 신청"이라며 러시아와 유사한 주장을 펼치고 있는 법무부로서는 다음의 유럽인권재판소 판결 내용을 숙고할 필요가 있겠습니다. 인류 보편의 가치를 보장하기 위해 마련된 국제협약과 국내법 취지를 거스르는 것은 현 정부의 국정철학에도 어울리지 않습니다.
 

"비인도적이고 모멸적인 대우의 금지는 민주사회의 근본적인 가치다. 이는 인간존엄성에 대한 존중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문명의 가치이기도 하다." "청구인들은 수개월 동안 계속해서 불이 항상 켜진 복잡하고 시끄러운 공항 환승 구역 바닥에서 자야 했고, 샤워나 요리 시설에 대한 접근을 방해 받았으며, 야외 운동 기회도 없었고, 의료적·사회적 지원에 대한 접근 기회도 없었다. 이는 인간존엄성에 대한 존중의 최소 기준에도 미치지 못한다." (유럽인권재판소)


● 승소 가능성 낮아도 일단 항소?

A 씨와 유사한 사례로 앙골라 출신 루렌도 가족의 경우를 참고할 만합니다. 루렌도 가족은 인천국제공항에서 입국이 불허된 뒤 송환 대기 중 난민 신청을 하며 환승 구역에 287일간 방치됐다가, 지난해 12월 대법원 판결로 심사 기회를 얻게 됐습니다. A 씨의 경우는 아예 난민 신청서 조차 받지 못했단 점에서 루렌도 가족보다 더욱 열악합니다. 1심 판결이 근거로 삼은 난민법과 난민협약의 취지를 종합적으로 고려하면, 2심에서 판결이 뒤집힐 가능성은 그리 높지 않아 보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법무부가 항소장을 제출한 것을 두고 법과 인권에 대한 고려보다는 어떻게든 난민 심사의 관문을 좁히려는 정책적 고려에 따른 것 아니냐는 지적이 나옵니다. 열악한 상황에 놓인 난민 신청자를 상대로 '기계적 항소'할 것이 아니라, 난민 심사 대상에 해당하는지 절차를 밟아 확인한 뒤 신속히 조치를 취하면 되지 않냐는 겁니다. 그러나 법무부는 1심 판결 이후에도 "환승객은 환승 구역을 일시 경유할 수 있을 뿐, 원칙적으로 입국심사 대상이 될 수는 없다."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어, A 씨의 공항 생활은 쉽게 끝나기 어려울 것으로 보입니다. 2심 재판은 서울고법에서 열립니다.

※ 소외된 이들의 목소리를 담으려면 짧은 일회성 기사로는 부족합니다. 기본적인 권리를 빼앗겼다는 호소, 그 이후 우리 사회가 어떻게 응답했는지 '인권AS' 취재파일로 살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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