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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잇] 느리게 걸을 수 있는 곳에 사람이 모인다

김종대|건축가. 디자인연구소 '이선' 대표.

나 어릴 적, 낚시를 좋아하셨던 아버지는 물 흐름이 완만하고 풀이 있는 곳에 낚싯대를 던져야 물고기를 잡을 수 있다고 내게 알려주시곤 했다. 물살이 급한 곳은 물고기가 헤엄치기 바쁘지만 풀이 있으면 먹이를 먹기도 좋고 몸을 숨기기도 좋기 때문에 물고기들이 모여든다는 것이었다. 나는 물고기 비린내를 싫어하는 탓에 낚시에 취미를 붙이지는 못했지만, 물고기 그림을 그릴 때는 꼭 수초를 그려 넣어야 완성이 된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건, 아마도 아버지의 말씀이 지금껏 기억에 남아서일 것이다.

사람이 찾지 않는 도시에 사람들을 불러들이는 방법도 물고기를 위한 수초를 심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다. 강남 테헤란로를 가만히 살펴보면 자동차도 빨리 달리고 사람들의 발걸음도 빠르다. 차도 사람도 빠르게 지나가는 이 길에는 '쉼의 공간'이 없다. 반면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는 경의숲길에는 그늘을 만들어주는 높은 나무와 잠시 쉬어갈 수 있는 벤치, 그리고 아이들이 마음껏 뛰어놀 수 있는 잔디 공터가 있다. 숲길을 쭉 따라 음식점과 상점들이 줄지어져 있고, 반짝이는 가게 불빛 덕분에 늦은 밤이라도 안전함은 배가 된다.

경의숲길, 수초가 물고기를 부르듯 나무와 벤치는 사람들을 불러 모은다.

테헤란로와 경의숲길을 걷는 사람의 걸음속도를 가만히 보고 있으면 경의숲길을 걷는 사람들의 속도가 현저하게 느린 것을 알 수 있다. 경의숲길에는 놀러 나온 사람들이 대부분이기 때문에 걸음이 느릿느릿할 수 있지만, 테헤란로는 출퇴근 또는 업무를 보기 위해 바삐 이동하는 사람들의 특성상 걸음이 빠를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테헤란로에는 '수초 역할'을 하는 시설이 전혀 없기 때문에 경의숲길처럼 테헤란로에도 쉼터를 만든다면 걷는 속도와 편의시설의 인과관계를 증명할 수 있다.

2009년 뉴욕에서 실시한 '차 없는 거리' 행사 모습.

2009년, 이 인과관계를 증명하는 실험이 뉴욕에서 이루어졌다. 뉴욕에서도 가장 복잡하다는 타임스퀘어에 차량통행을 금지하고 '차 없는 거리'를 6개월간 시범운영 했다. 처음에는 시민들의 반대가 심했지만 차가 들어오지 않는 길에 의자를 두고 곳곳에 예술가들의 퍼포먼스가 이루어지자 사람들이 몰려들기 시작했고 주변 상점의 매출도 덩달아 올랐다. 볼거리와 쉴 수 있는 공간이 생기니 자연스럽게 사람들의 걷는 속도가 느려졌고 보행자 사고도 감소했다. 이후 타임스퀘어는 차로를 줄이는 공사를 진행해 지금과 같이 걷기 편한 장소로 탈바꿈했다.

연세로 '차 없는 거리'에 모인 젊은이들. (사진은 서대문구 티스토리 블로그)

'차 없는 거리' 실험은 우리나라에서도 진행되고 있다. 2014년 처음 시작한 연세로 차 없는 거리는 연세대 입구에서 신촌 오거리까지 약 550m 길이의 도로를 주말에 한해 차가 다닐 수 없게 하고 자동차가 주차를 하던 공간에 의자와 간이 공연장을 만들었다. 거리공연이 열리고 사람들이 모여들자 주변 상점들도 활기를 띠었고, 어느덧 젊은이들이 즐겨 찾는 거리가 되었다. 2018년 국립환경과학원이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신촌 연세로 차 없는 거리 일대의 대기오염 정도가 현저하게 낮아지는 환경개선의 효과도 있었다. 문화공간도 속속 생기면서 단순 소비지였던 신촌 일대가 새로운 문화생산지로 변신하고 있는 중이다.

'걸어 다닐 수 있는 도시'의 저자인 제프 스팩 (Jeff Speck)은 도시에 걸을 수 있는 환경을 만들면 창의적인 젊은이들이 몰려들고, 이들로 인해 매력적인 도시의 분위기가 만들어진다고 주장했다. 도시 활성화를 위해 사람들을 불러 모으려는 계획을 가진 지자체가 있다면 '느리게 걸을 수 있는 거리'를 조성하는 것에 관심을 가져도 좋을 것이다.

* 편집자 주 : 김종대 건축가의 '건축 뒤 담화(談話)' 시리즈는 도시 · 건축 · 시장 세 가지 주제로 건축에 담긴 비하인드 스토리를 담습니다. 격주 토요일 '인-잇'에서 만나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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