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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잇] "그랬구나" 따뜻한 말 한마디의 힘

김창규│입사 21년 차 직장인. 실제 경험을 녹여낸 회사 보직자 애환을 연재 중

아차, 또 잊어 먹을 뻔했다. 은행에 우리 집 전세 자금 대출이 연장이 되는지 다시 한번 확인해야 하는데 계속 깜박하고 있다. 한 달 전에는 가능하다는 답을 받았지만 최근 대출 규정이 하도 변해서 또 체크할 필요가 있다. 얼른 전화를 했다. 고객센터란 곳은 연락이 너무 안된다. 인터넷에서 지점 번호를 찾아 내선번호를 아무거나 눌러 봤다. 목소리가 청아한 젊은 여성 직원이 전화를 받는다.

"대출 연장 가능 여부 때문에 전화했어요. 담당자 부탁드려요."
"(아주 밝게) 말씀하세요."
"(나에 대한 기본 정보를 말해 주고) 재연장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요?"
"(청명하게) 잠시만요. (아무 일 없다는 듯이) 연장 안됩니다. 법이 바뀌어 선생님은 대출 연장 대상에서 제외되었습니다."
"뭐라고요. 한 달 전 확인할 때도 된다고 했는데? 이거 안되면 큰일 나요."
"(역시 아무 일 없듯이) 안됩니다."
"그럼 돈을 다음 달까지 갚아야 하는 것인가요? 상당한 금액인데..."
"(친절하지만 당연한 듯) 예. 갚으셔야 합니다. 갚아야 하지요."

그러자 머릿속에 열이 확 올라왔다. '뭐야! 이 직원, 목소리는 청아하고 친절한데 정말 영혼 없이 얘기하네.' 이런 생각이 들자 이후 계속된 대화에서 결국 내가 화를 내고 말았다. 그러자 그 직원은 약간 놀라기는 했지만 내가 왜 불만을 토로하는지 잘 모르겠다는 듯 말투엔 변함이 없었다. 결국 난 몇 마디 더 하다 자포자기한 상태로(화를 내 봤자 달라질 것도 없고) 알았다고 한 뒤 전화를 끊었다.

잠시 시간을 보내고 감정을 추스르니 이 해프닝에 대해 두 가지 마음이 '서로 자기가 맞다'며 다툰다. 첫 번째 마음은 "그 직원은 규정대로, 원칙대로 말한 것뿐이데 네가 왜 열을 내냐? 돈 갚기가 어려우니 애먼 그 직원에게 퍼부은 거 아니야. 새내기 직원 같던데… 너 나쁘다." 다른 마음은 이렇게 말한다. "아니야. 그녀의 고객 응대 방법이 잘못된 거였어. 논리적으로는 그녀가 잘못한 것이 없다고 할 수 있지만 어떻게 남의 어려움에 안타까워하는 마음 하나 없이 그렇게 기계적으로 응대할 수가 있어. 그것도 자기네 은행 유리하게만. 마치 약 올리는 것처럼 말이야. 이게 불난 집에 부채질하는 경우이지. 성질낼 만 했어."

"그 직원은 원칙대로 말했을 뿐" vs "응대가 성질낼 만했지" 두 마음이 싸운다.

이렇게 내 속에 서로 다른 마음이 말씨름을 할 때 사무실 저쪽에서 약간의 큰 소리가 들려왔다. '뭐지?' 하며 귀를 기울여 보니 김 대리와 대리점장이 고객 계약 관련해서 통화하는 소리다.

"신용등급이 B인데 승인이 불가하다고요?"
"(냉랭하게) 예. 규정이 바뀌었어요. 적어도 B+++가 되어야 합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되나요?"
"(단호하게) 계약 금액의 두 배를 보증 보험으로 들어야 합니다."
"어이구. 그건 너무 힘들어요. 이게 얼마나 공을 들여 작업한 건데."
"(감정 없이) 둘 중에 하나를 해야 합니다. 미수금이 생기면 안 됩니다."

나는 '우리 직원도 똑같네.'라고 자책하며 지점장과 김 대리를 불렀다. 방금 벌어진 내 경우를 얘기해 주고 상대방 입장에서 상담을 해 주면 더 좋지 않겠냐며 나무라듯 말했다. 그들도 내 말에 일부 동의는 하는 것 같았지만 대화 막바지에 실무자로서의 어려움을 토로했다.

"그런데 제가 상대방의 말을 공감해 주면서 양해를 구하면 오히려 그들은 더 자신들의 주장을 내세웁니다. 특히나 자기들의 이익에 관련된 것이면 더더욱 그렇습니다. 어쨌든 저는 우리 규정대로 해야 하는데 처음부터 약하게 나가면 나중에 그들의 요구를 꺾기가 너무 힘듭니다. 그래서 초장에 아예 선을 넘지 못하게 만들 필요가 있습니다. "

듣다 보니 이것도 맞는 말이다. 물에 빠진 사람 구해 주니 보따리 내 놓으라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이 사실을 나도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아까 기분이 상했던 사실을 떠올리며 단호히 말했다.

"입장이 반대였다고 생각해 봅시다. 그러면 여러분들은 어떤 기분이 들었겠어요? 그분들은 우리한테 말고는 말할 곳이 없어서 어떻게 보면 안 될지 알면서도 우리한테 하소연하는 겁니다. 그러면 뻔한 말이라도 공감하며 들어 줄 수도 있어야 하는 거 아닐까요?"

내가 결국 그들을 질책하는 듯 대화를 마무리했지만 왠지 모르게 찝찝했다. 준수해야 할 절차와 규정이 있는 직원에게, 그에 대해 불만을 표하는 사람과 대화할 때 그들 편에서 생각하고 일을 하라는 것은 정말 앞뒤가 안 맞는 말이기 때문이다.

이때 속담 하나가 떠올랐다. "말 한마디로 천냥 빛을 갚는다." 천 냥 빚을 갚을 수 있다는 그 말.한.마.디.는 도대체 무엇이었을까?

시간을 두고 차분하게 생각해보았다. 상호 대립하는 상황에서 자기 입장에서만 말하지 않고 '공감의 말 한마디'만 얹어도 꼬인 실타래를 훨씬 더 원만하게 풀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와 비슷한 예로 예전에는 '그랬구나 화술'이라는 것이 있었다. 상대방의 말이 옳든 그르든, 나와 같든 다르든, 당신의 말을 받아들인다는 의미에서의 "그랬구나"라는 말 한마디는 당시 서로에게 화가 많이 나 있었던 많은 사람들에게 화해와 치유를 선사해 주었다.

"그랬구나" 따뜻한 말 한마디.

"그랬구나"와 같은 따뜻한 말 한마디. 순간적으로 떠오르지 않고, 때로는 입 밖으로 꺼내기 어려운 것이지만 그 말 한마디의 힘은 지금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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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잇 #인잇 #김창규 #결국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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