빳빳한 수학의 정석과 성문종합영어가 모셔져 있던 내 책상 위에 어느 날 이상한 책 뭉치 한 덩어리가 놓여 있었다. "동생, 좋은 대학에 가려면 이 책부터 다 읽어야 해." 마침 명문 대학에 합격해 온 친척들의 워너비가 되어 있던 세 살 터울의 오빠가 가져다놓은 책이었다. 오빠는, 고등학교에 올라가면 한자와 역사도 많이 알아야 하고 무엇보다 호연지기를 길러야 한다고 강조했다. 딱히 맞는 말 같진 않았지만 명문대생의 이야기니 한번 믿어보기로 했다. 굵은 한자로 적혀 있던 책 제목은 <영.웅.문>이었다.
2020년의 징검다리 연휴. 야심찬 계획을 세웠다. 밀린 업무와 공부, 개인적으로 챙겨야 할 일들까지 리셋할 수 있는 반전의 기회였다. 코로나로 오랫동안 보지 못했던 오빠네 가족을 만나는 일은 그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일이었다. 짐 정리를 하고 있는데, 오빠가 불쑥 방으로 들어와 하는 말. "동생, 넷플릭스 아이디 있나? 요즘 콘텐츠를 알려면 이 정도는 봐줘야지." 월정액이 부담돼 망설이던 나는 오빠네 가족에 끼여 어느새 앱을 깔고 있었다. 요즘 드라마 한두 편만 잠깐 보고 말 셈이었다. 하지만 어느 순간 다음 회차 버튼을 터치하는 손가락을 제어할 수 없게 되었고 20편짜리 드라마 정주행을 마친 시간은 출근을 앞둔 새벽녘이었다. 계획은 둘째 치고 머릿속이 멍하고 몸이 너무 피곤했다. 좀비처럼 허우적대며 밀린 일을 처리하고 스스로 책망해 보아도 그 시간을 되돌릴 수는 없었다.
제레미 러프킨은, 기업의 마케팅이 시장점유율을 높이는 데 있지 않고 시간점유율을 높이는 데 초점을 맞추게 될 것이라고 강조한 바 있다. 유형의 소비재이든 무형의 콘텐츠이든 소유에서 경험으로 소비 패턴이 변화되는 시점에 '시간은 돈이다'라는 옛말은 정말 현실이 되어버렸다. 수많은 일과 역할과 정보 속에 조각난 시간을 겨우 붙들고 사는 우리들. 함부로 내 시간을 내어주지 않을 수 있는 힘과 지혜가 그만큼 절실해진다. 굳은 결심을 하고 넷플릭스 앱을 지우려던 손가락은, 조금 신중해지기로 했다. 나를 한 번만 더 믿어보기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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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잇] "이제 그만 좀 울어" 함부로 말하지 말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