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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파일] 중국에 팔려 가는 '극일(克日)' 대표 소재 'LG화학 LCD편광판'

일본에 기술 이전 거절당해 자체 개발…"한국 산업사의 쾌거"였는데

[취재파일] 중국에 팔려 가는 '극일(克日)' 대표 소재 'LG화학 LCD편광판'
▶ [2020.06.10 8뉴스] '반값 TV' 쏟아낸 중국의 역습…LCD 손떼게 만들었다

1990년대 중반, 한국 디스플레이 업계는 이미 세계를 선도하고 있었다. 연평균 30% 넘게 커 나가는 TFT-LCD 시장에서 삼성전자와 LG필립스LCD(현 LG디스플레이)가 선두 경쟁을 벌였다. 문제는 LCD패널을 구성하는 핵심 소재 대부분을 수입에 의존했다는 점이다. 백라이트 빛을 일정한 방향으로 투과시켜 화상을 구현하는 편광판도 그중 하나다. LCD패널 재료비의 약 10%를 차지하는 필수 소재로, 일본 닛토덴코와 스미토모화학, 산리츠 3개 업체만이 만들었다.

차세대 디스플레이를 21세기 새로운 성장 동력으로 점찍은 LG화학이 여기에 관심을 가졌다. LCD 시장이 확대되는 만큼, 핵심 소재 편광판을 만들어 판다면 수익은 절로 따라올 거란 계산이었다. 개발 초기에 따르는 시행착오를 줄이고 안정적 생산을 위해 닛토덴코에 기술 협력을 요청했다. 돌아온 대답은 "기술 이전 절대 불가"였다. 급성장 중인 시장을 한국 기업과 나누고 싶지 않았던 거다.

LG화학은 자체 개발로 방향을 돌렸다. 광학과 물리학, 광 응용에서 점착제와 정밀분야 등 다양한 연구가 필요했다. 90년대 말 외환위기 상황서도 연구인력을 새로 뽑고 독자개발을 위한 조직 정비를 그치지 않았다. 화학업체로서 갖고 있던 석유화학과 산업재 분야 원천기술을 동원할 수 있던 건 다행이었다. 1999년 1호 라인을 가동한 데 이어 양산까지 불과 2년 만에 성공했다. 초고속 개발이었다.

하지만, 후발업체로서 일본 기업을 넘어서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광폭 라인 수율이 반년 가까이 50%대에 머물렀다. 고객사로부터 불합격 판정을 받기도 했다. 편광판 광학 특성이 제대로 나오지 않거나 표면에 얼룩이 생기는 등 문제가 계속 터져 나와도 어디 한 곳 물어볼 데가 없었다. 일본 업체들은 경쟁 업체의 출현을 가만히 지켜보지 않았다. 단가를 20%씩 낮추며 노골적인 견제에 들어갔다.

사업을 접자는 얘기가 나올 때, 모든 사원이 주야 교대 근무에 들어갔다. 모두가 공장서 숙식을 해결했던 때라고 회사 사사는 전한다. 결국, 한 달 만에 수율 개선에 성공했고 18개월 만에 흑자 전환했다. 2000년 50억 원에 불과했던 매출은 5년 만에 100배 규모인 4천800억 원까지 늘었다. 2009년 마침내 닛토덴코를 제치고 편광판 분야 세계 1위에 올랐다. 2000년대 들어 시작된 노트북과 모니터, 스마트폰 수요 증대와 맞물려 10여 년을 고속 성장했다. LG화학의 편광판 국산화를 두고 한국공학한림원은 "기술대국 일본의 만년 추격자였던 한국이 처음으로 선도자로 올라선 산업사의 쾌거"라고 평가했다.

중국 저가공세 LCD

이렇게 우리 산업의 '극일'을 대표한 LCD편광판이 이제 중국으로 넘어간다. LG화학이 중국 화학소재업체 산산에 11억 달러를 받고 사업을 매각하기로 한 것이다. 아직 이사회 승인 등 과정이 남아 있긴 하지만 매각 방침이 달라지진 않을 것이다. LG화학 관계자는 해당 사업에 대해 "여전히 LCD 패널을 많이 만드는 중국 시장 자체만 보면 아직 나쁘지 않은 사업이지만, 기술 자체가 범용화돼 중국 업체들이 많이 뛰어들어 가격 경쟁이 안 된다"고 전했다.

중국 말고는 팔 데가 없어진 현실적인 이유도 있다. 세계 중대형 LCD패널 출하량에서 중국 업체들이 차지하는 비중은 지난 2011년 6.1%에서 지난해 40.4%까지 폭증했다. 같은 기간 한국은 51.9%에서 23.9%로 주저앉았다. 중국의 저가 공세에 지친 한국 디스플레이 업계는 이제 '탈LCD'를 잇따라 선언하고 OLED 등 차세대 디스플레이에 집중하는 중이다. 올해부터 전 세계 LCD 공급의 절반 이상을 중국이 책임질 거란 전망까지 나오는 상황서, 판로를 잃어가는 한국 LCD 후방산업(소재)의 조정은 얼핏 자연스러워 보이기도 한다. LG화학으로선 2차 전지라는 자사 핵심 먹거리에 집중하기 위한 현금 마련의 측면도 있다.

물론 LG화학이 물량으로 1위를 달성했을 뿐, 여전히 일본 업체 기술엔 못 미쳤다는 냉정한 평가도 존재한다. "올 게 왔다"는 것이다. LG화학에 이은 삼성의 편광판 국산화를 이끌었던 석준형 전 삼성전자 부사장은 LG화학의 기술력을 높이 평가하면서도 "LG화학 편광판이 기술력에선 일본에, 가격 경쟁력에선 중국에 못 미치는 애매한 위치였다"고 말했다. 매각 결정에 대해선 "비즈니스 차원에서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면서도 "편광판 소재 분야에서 우리 기업이 핵심 기술로 끝까지 좀 버티는 걸 봤으면 했는데 아쉽다"고 말했다.

그래서 LG화학의 편광판 사업 매각은 폐허에서 쌓아 올린 한국 산업이 짊어진 어떤 '숙명'을 상징하는 것으로도 보인다. 일본을 쫓고 마침내 극복하지만, 금세 중국에 쫓기느라 잠시도 멈출 수 없는 한국 기업의 운명 같은 것 말이다. 소재부품장비 위주 중간재 산업을 키워야 한다는 어지러운 주장들을 머리로는 이해하지만, 실천하기엔 한가한 소리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는 처지도 극적으로 보여준 셈이다. 그토록 애면글면 국산화한 기술일지라도 살아남으려면 잠재적 경쟁자에게도 팔 수 있는 냉엄한 비즈니스 세계를 다시 확인한 것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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