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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잇] 내가 학대받는 건, 내가 나쁜 아이라서래요

장재열|비영리단체 청춘상담소 '좀놀아본언니들'을 운영 중인 상담가 겸 작가

[인-잇] 내가 학대받는 건, 내가 나쁜 아이라서래요

저녁 9시부터 10시까지는 우리 가족이 항상 둘러앉아 TV를 보는 시간입니다. 모 방송사의 세계 여행 프로그램과 한국 기행 프로그램을 이어 보는 것. 이것이 노년기로 접어든 부모님의 소소한 즐거움이지요. 그런데 어느 날부터, TV를 꺼버리고 안방으로 가버리시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그 좋아하는 프로그램을 왜 그만 보실까? 며칠 살펴보니 이유를 알겠더군요. 중간광고로 나오는 한 아동 보호단체의 후원 캠페인 때문이었습니다. 아동학대로 사망하지 않도록 도와달라는 내용의 그 광고는, 아역 배우를 써서 학대받는 모습들을 그대로 재연해주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장면은 아이가 화면 너머의 우리를 처연히 쳐다보는 장면이었지요. 당신의 후원 전화가 이 아이를 살릴 수 있다는 말과 함께 말입니다. 신혼 초에 화재 사고로 자녀를 먼저 떠나보낸 우리 부모님은, 아동들이 죽어가는 장면을 잘 보지 못합니다. 그런데 더군다나 학대로 죽어가는 아이의 재연은 도무지 눈을 뜨고 볼 수 없었던 것이겠지요. 특히 기존의 아동학대 후원 캠페인은 어른의 시점으로 성우를 기용했지만, 이 광고는 아이가 직접 내레이션을 넣어, 듣는 우리의 숨을 더욱 턱 막히게 합니다.

"내가 태어나서 엄마·아빠가 힘들대요."
"저보고 못된 아이래요. 그래서 혼나야 된다고"
"다른 사람한테 도와달라고 하면 큰일 나요"
"너무 무서운데 집 밖에는 갈 데가 없어요."

다섯 살 아이의 목소리로 위의 문장들이 우리의 귓가에 들린다면, 여러분은 어떤 생각이 드시나요? 뭐라 말할 수 없는 참담한 기분이 들 겁니다. 그중에서도 어떤 문장이 가장 무겁게 다가오시나요? 저는 두 번째 문장이더군요. 아동학대 하면 항상 손꼽히는 영화로 알려진 '너는 착한 아이'가 떠올랐습니다. 동명의 베스트셀러 소설을 리메이크한 이 영화는 학대당하는 아동들의 심리를 적나라하게 보여줍니다.

 

*SBS 보이스(VOICE)로 들어보세요.


영화 '너는 착한 아이'

본인이 학대의 피해자라는 사고를 할 수 없어서, '내가 뭔가 잘못한 게 맞고, 착한 아이가 되면' 엄마가 용서해줄 거라는 생각. 제목에서부터 느껴지시지요? 엄마가 악인이라는 생각보다는 자기가 나쁜 아이라서 그런 거라는 아이 특유의 순수한 마음이 역효과를 내는 과정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가해자인 부모는 '아이가 싹싹 비니까' 그 모습을 보며 점점 자기세뇌를 겁니다. 애가 잘못해서 내가 때리는 거라고 자신의 폭력을 정당화 하는 거죠.

실제로 영화 밖 현실에서도 비슷합니다. 제가 상담을 통해 만난 청년 중에도 어린 시절, 이러한 학대를 당하며 커온 친구들이 있습니다. 이들의 말버릇 중 하나가 "내가 정상이 아니라서, 내가 문제라서, 내가 잘못해서"라는 겁니다. 어릴 적부터 자기 잘못이 아닌 것에도 "잘못했어요"라고 빌며 커오다 보니, 프레임에 단단히 고정되어 버려서 모든 나쁜 상황은 다 "내가 잘못해서" 일어난다고 여기게 되는 겁니다. 결국, 정상적인 사회생활을 영위하지 못하는 단계까지 이르는 경우가 부지기수입니다.

그런 상황을 마주하는 우리들은 어떤가요? 마음이 쓰리고 가엾지만, 우리가 할 수 있는 게 딱히 떠오르지 않습니다. 아마 저의 부모님이 광고를 끝까지 보지 못하고 자리를 뜬 이유도 '당신이 이 애를 도와야 한다'는 메시지 앞에서, 월 2만 원을 내는 것 외엔 할 수 있는 게 없다는 무력감 때문이 아니었을까요. 하지만 이러한 상황은 당연합니다. 아동학대를 위해 '개인'이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은 게 사실이니까요.


아동학대, 폭력 (사진=픽사베이)
왜냐면 아동학대는 법과 사회규범이 바뀌지 않으면 결국 해결될 수 없는 '범죄'이기 때문이지요. 현행법으로는 학대받는 아이를, '남의 집'어른인 개인이 도울 방법이 묘연합니다. 자칫 아이를 잠시 피신시키거나, 보호하려다간 고소당해도 도리가 없지요. 그렇다면 아동 보호시설은 어떨까요? 부모가 아이를 가정으로 복귀시키고자 강력하게 요구하면 절대적으로 열세에 몰립니다. 왜냐고요? 한국의 아동 보호를 다루는 대다수 법의 근간은 '아동의 건강한 가정 복귀'와 '가정에 안착하는 것'을 이상적인 목표로 삼고 있기 때문입니다.

부모가 있고, 아이들은 부모와 함께 살아야 '정상 가정'이라는 프레임. 그 속에서 또다시 하나, 하나 아이들이 떠나고 있습니다. 더는 보호가 아닌 '근절'로 프레임을 전환하지 않으면 안될 때가 왔습니다. 시민 개개인에게 호소하는 후원 전화 요청보다, 영화와 소설로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것보다 시급한 것은 가정이라는 울타리를 기본 전제로 깔고 있는 관련 법과 제도가 바뀌어야 하는 게 아닐까요? 지금 이 시각에도, 학대 앞에서 싹싹 비는 것밖에 할 수 없는 그 아이들에겐 시간이 그리 많지 않을지 모릅니다.


장재열 네임카드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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