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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잇] 꼰대 부장, 편한 것만 찾지 않기로 했다

김창규│입사 21년 차 직장인. 실제 경험을 녹여낸 회사 보직자 애환을 연재 중

아침부터 머리가 지끈지끈 아파왔다. 며칠 동안 걱정했던 그 날이 드디어 온 것이다. 회사 내부 시스템이 바뀌어 컴퓨터에 무엇인가를 다시 깔아야 했다. 그쪽 방면으로 젬병인 나는 이전에 공지된 설명서에 따라 프로그램을 다운받고 설치했지만 뭐가 잘못되었는지 제대로 실행이 안되고 자꾸 에러가 나서 시스템 변경을 할 수가 없었다. 누구의 도움도 받지 않고 해 보려고 했는데 역시 안 되겠다. 금방 포기하고 젊은 직원을 불렀다.

"아, 이거 잘 안되네요. 설치 좀 부탁해요." 그는 어려움 없이 새 프로그램을 깔았다. 멋쩍게 고맙다고 한 뒤 바뀐 환경에서 업무를 시작했다. 그런데 너무 불편했다. "여기서는 표를 어떻게 만드는 거지? 이전 것은 표 만들기 정말 쉬었는데…이건 도대체 뭐야. 어떻게 하라는 거지? 왜 바꾼 거야 정말!"이라고 투덜거리며 신경질을 냈다.


그렇게 바뀐 시스템과 씨름을 하다가 책상 앞에 놓여있는 정기 보고 문서를 보았다. 많은 것들 것 바뀌었다. "아니 도대체 왜 글자 크기가 이렇게 작아졌을까? 글자체도 왜 고딕에서 바탕으로 바뀐 거야? 어, 전에는 이 항목이 앞이었는데 이 보고서에는 뒤에 있네. 아이고 헷갈린다." 담당자를 불러서 말했다. "미안한데 다음부터는 예전 양식으로 이 보고서를 작성했으면 해요. 바뀐 양식이 영 내 눈에 들어오지 않네요." 그런데 갑자기 머쓱해졌다. 순식간에 스쳐 지나간 직원의 황당한 표정을 봐서 그렇다. 그가 나간 뒤 잠시 오늘의 나를 되돌아봤다. 혹시 내가 심플리치오?!

직원이 짓던 그 황당한 표정, 머쓱해졌다...

심플리치오는 갈릴레이가 쓴 '두 우주체계에 대한 대화' 중의 등장인물로 아리스토텔레스에 푹 빠져 과거의 것(지구를 중심으로 천체가 돈다고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했으니 그것이 진리다)에 얽매여 새로운 것(지구가 도는 것이 맞다)을 한사코 부정하는 수구적인 인물이다. 망원경으로 본 달은 그냥 하나의 돌덩어리에 불과하다는 증명된 사실에도 심플리치오는, 아리스토텔레스가 그렇게 말하지 않았다며 이렇게 반박한다.

"제 생각에 달은 지구보다 더 단단합니다.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하늘은 너무 단단해서 뚫을 수 없다고 했습니다. 달에서 보았다고 하는 산과 바위, 산마루와 계곡 등은 모두 헛것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학문의 대가입니다. 우리 철학의 안내자이며, 지도자이며, 일인자인 사람 없이 지내고 싶지는 않습니다."

이 말에 빗대면 조금 전 그 직원은 나를 이렇게 생각할 것이다.

"우리 상사 이야기를 계속 하지요. 제 생각엔 우리 보스가 심플리치오 보다 더 옛 것(자신의 경험 포함)에 집착하는 것 같습니다. 업그레이든 된 시스템, 좀 더 산뜻한 보고서 등 과거보다 개선된 것을 접해도 모두 헛것으로 봅니다. 그에 따르면 기존의 것은 완벽합니다. 그것은 그의 척도이자, 지침서 혹은 자신의 분신과도 같은 것이라서 우리 보스는 그것과 한시라도 떨어져 있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기존의 것을 집착하고 강요하다니. 나이 들었나 봐. 이 꼰대야.'

이렇게 속으로 나 스스로를 나무라다가 꼰대는 젊은이들 중에도 있다고 한 어떤 이의 블로그 내용이 떠올랐다. 다시 찾아봤다.

"실제로 젊은이들 10명 중 8명은 자기세대에서도 꼰대가 있다고 생각한다…젊은 꼰대들은 정말 <본인이 맞다.>라는 강한 신념을 갖고 있다…자신이 믿는 진실에 기반해 꼰대 짓(자기 것만 고집)을 한다…그들 앞에서는 정치 이슈, 자신의 생각을 얘기하고 싶은 마음이 사라진다."

늙었든 젊었든 사람들은 대체로 왜 과거의 경험과 자신이 믿는 신념에만 매몰되어 계속 그것이 맞다고 할까? 일단 무언가를 바꾸는 것은, 그것이 맞고 틀림은 둘째 치더라도, 일단 불편하고 피곤한 일이기 때문이다. 뭔가가 변경되면 기존에는 생각 없이 그냥 하면 되던 일이 정신을 바짝 차려야만 겨우 완성되니 말이다.

또 다른 이유도 있다. 내가 알고 있는 것과 다른 것을 거부하는 이유는 자기 자신을 부정하지 않으려는 방어 본능 때문이다. 변화를 받아들인다는 것은 여태까지 철썩 같이 믿고 있던 신념이 잘못된 것임을 인정하는 것인데 그게 어디 쉬운 일인가. 특히나 성공한 사람이라면, 현실에 만족하고 있는 사람이라면 이 일은 더더욱 어렵다. (이런 측면에서 본다면 변화에 대한 거부는 당장의 만족에서 나온 안일함, 지나친 자신감 혹은 우월감 때문이기도 한 것 같다.)

이런 생각에 잠겼다가 문득 며칠 전 본 회사 공지사항이 떠올랐다. 코로나로 인해 화상 회의, 컨퍼런스 콜, 재택근무와 같은 내가 장담하는데 효율성이 지극히 낮은 업무방식이 상당기간 연장될 수도 있다는 내용이었다. 공지를 보고 나는 이 제도의 연장에 대해 굉장한 불안감과 답답함을 느꼈다. "비대면으로 업무를 한다고? 그게 우리 같은 회사에 어디 가당키나 해?" 라고 중얼거리면서 말이다. 하지만 코로나가 다시 확산할 수 있는 이 시점에서 이 제도는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상황이 변했는데 옛날 방식만 고집하면 어디 되겠는가. 몇 년 전 읽었던 뉴욕타임즈의 기사가 떠올랐다.

"잘라파고스라는 재미있는 말이 있다. 잘라파고스는 japan과 갈라파고스의 합성어로 일본기업들이 잘 나갈 때 세계의 변화를 외면하고 기술에 대한 자신감으로 자신들만의 방식을 고집해 세계시장에서 고립돼 버린 상황을 빗댄 말이다. 소니, 파나소닉 등의 일본 전자업체들이 이 범주에 속하고 한 때 휴대폰 1위였던 노키아, 스마트폰 분야의 강자 블랙베리 등도 여기에 속한다고 하겠다."

깨달음을 얻었다. 다시 마음을 다잡고 업무를 시작했다. 전자결재함에 상신된 기안문을 보다가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내가 알던 규정과 다른 규정을 적용하여 뭔가를 하겠다는 것이다. 담당자를 불러서 물었다. "이거 왜 이렇게 하죠. 전에는 이렇지 않았는데?" 담당자는 답변했다. "바뀐 규정을 적용했습니다." 나는 의아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규정이 바뀌었다고요. 예전 것이 더 합리적이지 않아요? 다시 검토해 보세요.'라고 하려다가 앞선 깨달음을 떠올렸다.


'나에게만' 편한 건 찾지 않기로 했다.

"알았습니다. 상황이 바뀌었나 보네요. 이게 더 현실적인 것 맞죠?"라고 되물으며 해당 기안을 승인했다. 그리곤 이미 프린트해 둔 메일 사용법을 차근차근 보았다. 표를 어떻게 만드는지 찾아보기 위해서다. 바뀐 환경, 그것도 업그레이드된 환경에서 나한테 익숙하지 않다고 투덜거리며 그것에 저항하면 안 된다는 조금 전 깨달음의 또 다른 실천이다. 이번에는 직원 도움 없이 혼자 힘으로 알아낼 것이다.

변화하는 환경에서 60세 정년, 아니 앞으로는 65세로 정년이 연장될 수도 있으니 그 때까지 회사 생활을 무탈하게 잘 하려면 언제든지 익숙한 것들과 작별을 할 수 있도록 항상 마음의 준비를 해야겠다.

인잇 필진 네임카드

#인-잇 #인잇 #김창규 #결국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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