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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파일] '메이드 인 코리아 TV'의 종언을 대하는 정부의 자세

[취재파일] '메이드 인 코리아 TV'의 종언을 대하는 정부의 자세

폐허 위 성공신화 '韓 TV 산업'…주춧돌 된 LG 구미 공장 해외 이전

노동규 기자 laborstar@sbs.co.kr

작성 2020.05.26 10:25 수정 2020.05.26 11:19 조회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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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대표 이미지:[취재파일] 메이드 인 코리아 TV의 종언을 대하는 정부의 자세
폐허 위에 쌓아 올린 한국 산업의 역사에서 TV가 차지하는 자리는 각별합니다. 메모리 반도체에서 철강, 석유화학, 자동차까지 지금 대한민국을 먹여 살리는 산업 중 어느 것 하나 국민이 자부심 갖지 않을 게 없지만 TV가 특히 그렇습니다. 일본 흉내 내 따라잡기 바빴던 데(패스트 팔로어)서 세계 표준을 선도하는 위치(퍼스트 무버)에 오른 대표 품목이 바로 TV인 것입니다.

TV의 핵심인 디스플레이를 구성하는 편광판은 1990년대까지만 해도 일본이 전통적 강자였습니다. 90년대 중반 IT 소재 신사업을 구상하던 LG화학이 일본 기업에 협력을 구했다가 거절당한 뒤 자체 개발해 2년 만에 양산했지요. 2009년엔 일본 업체들을 제치고 세계 시장 점유율 1위에 올랐습니다.

30인치가 끝이라고 믿었던 LCD 기술의 한계를 뛰어넘은 건 삼성전자입니다. 2001년 11월, TV·디스플레이 기술의 심장부라 할 일본에서 당시 세계에서 가장 큰 40인치짜리 TFT-LCD TV를 공개했습니다. 크기뿐 아니라 여태껏 볼 수 없었던 화질이 세상을 놀라게 했지요. 삼성은 이후 2002년 46인치, 2003년 57인치 TFT-LCD TV를 개발하며 세계를 선도했습니다. 중국이 치고 올라올 땐 '보르도 TV' 같은 혁신 디자인으로 맞섰습니다. LG전자는 2010년대 들어 LCD 기술이 범용화 돼버리자 세계 최초 55인치 'OLED(올레드) TV'를 개발해 아예 판을 바꿔버렸습니다.

LG 구미 TV생산 일부 인니로 이전
요컨대 TV는 우리 산업의 금자탑이라 할 수 있습니다. 처음 주춧돌을 올린 곳이 바로 지난주 LG전자가 인도네시아로 TV 생산라인을 빼겠다고 한 경북 구미 공장입니다. 1966년 8월 1일 LG전자의 전신인 금성사가 여기서 흑백TV 500대를 생산한 게 성공 역사의 시작이니 아이러니죠. LG는 구미 TV 생산라인 6개 중 2개를 연말까지 인니 찌비뚱 공장으로 옮긴다고 밝혔는데, 앞으로 올레드·LCD TV 등 남아 있던 국내 생산 물량의 90% 이상이 인니에서 만들어지게 됩니다. 앞서 삼성전자 역시 지난 2018년 수원 공장 TV 생산라인을 모두 베트남으로 옮겼으니, 이제 우리를 자랑스럽게 했던 이른바 '메이드 인 코리아 TV'는 보기 어렵게 된 셈입니다.

LG전자 측은 치열해진 세계 TV 시장에서 경쟁력을 갖추려면 해외 공장으로 이전이 불가피하다고 말합니다. 중국산 저가 LCD TV가 쏟아지는 시점에 올레드 TV로 원가경쟁력까지 유지하려면 인건비 싸고 물류비 아낄 동남아시아 지역으로의 이전은 당연하다는 얘깁니다. 실제 인도네시아 공장 인건비는 한국의 7분의 1 수준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번 결정 역시 갑자기 나온 게 아니고 지난해 8월부터 논의해 '국제거래 이슈'에 대한 법률 검토 등을 거치느라 발표가 늦어진 것이라고 LG전자 관계자는 전했습니다. 물론 세계 시장 소비자들도 인도네시아산 LG전자 TV를 여전히 '한국 제품'으로 인식하며 볼 것입니다.

문제는 정부입니다. 민간이 오늘날까지 성과를 내고, 이제 이 땅에서 경쟁력이 없다고 판단해 외국 이전을 결정할 때까지 손을 놓고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산업통상자원부에서 TV 등 가전 정책을 책임지는 부서 실무자는 한국에서 만들어지는 TV가 모두 몇 대나 되는지도 파악을 못 하고 있었습니다. 한 산업을 진흥하는 정책을 만들 때 기초가 되는 건 현황을 보는 '통계'입니다. 기업에서 공개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수치를 알 수 없다던 실무자는 나중엔 "기업들 협의체를 통해 파악한 생산량이 있지만 공개할 수 없다"고 말을 바꿨습니다. 이 실무자가 말한 협회 통계는 사실 인터넷에 공개돼 있는 것이기도 합니다.

삼성, LG, 비방 마케팅
통계를 감추는 진짜 이유는 담당 국장에게서 들을 수 있었습니다. "좋은 메시지가 아니다"는 겁니다. 이 국장 역시 "간단하다, 삼성·LG 두 회사 밖에 없어 두 라인을 합치면 (생산량 파악이) 된다"면서도 기업이 반대한다는 이유로 공개를 거부했습니다. 그런데 삼성은 "우리는 더 이상 한국에서 TV를 안 만든다"고 하고, LG는 "연간 200만 대 만들던 구미 라인을 인니로 빼는 것"이라고 밝혔습니다. 결국, 정부의 통계 숨기기는 눈앞 현실을 애써 외면하겠다는 것으로밖에 보이지 않습니다.

대통령이 나서서 일자리 창출 차원의 '기업 유턴'을 독려하는 때에 주무 부처로서 '메이드 인 코리아 TV'가 사라지는 게 씁쓸한 일일 수 있습니다. 숨기고 싶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있는 그대로의 현실에 기초하지 않은 정책이란 소용이 없음을 정부도 모르지 않을 것입니다. 한 재계 고위 관계자는 "요즘 유턴, 유턴하지만 업종 특성과 기업이 처한 경영 환경을 고려하지 않은 유턴 정책이 얼마나 허망한지 LG 사례가 보여준다"고 평가했습니다. 메이드 인 코리아 TV의 종언을 맞는 정부가 새겨들어야 할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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