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잇] 상사는 애로사항 없냐고요? (휴..'할많하않')

김창규│입사 21년 차 직장인. 실제 경험을 녹여낸 회사 보직자 애환을 연재 중

SBS 뉴스

작성 2020.05.21 11:01 수정 2020.05.21 13:32 조회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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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원들과 전체 회의를 했다. 업무 관련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가 끝날 무렵에 몇 사람이 애로 사항을 얘기했다. 한 판매원이 말했다. "제 판매 책임 지역이 끝에서 끝까지 가는데 1시간 30분이나 걸립니다. 한번 나갔다 오면 하루가 끝나죠. 판매원이니까 돌아다니는 것은 OK인데 행정업무가 점점 더 많아지고 있습니다. 불필요한 업무는 없어졌으면 좋겠습니다." 다른 직원들도 애로 사항을 이야기했다. 나는 "알았다. 필요한 것은 조치하겠다."라고 대답한 뒤 추가로 "지점장님들은?" 하며 물었다. 그들은 웃으면서 "없다"고 했다.

협력업체와 간담회를 했다. 회사 정책 및 상황을 설명해 주고 각 영업소별 의견을 들었다. A 소장은 말했다. "우리에게 판매를 더 하라고 말씀하시는데 회사 가이드라인이 너무 높습니다. 시장 상황과 전혀 맞지 않아요." B소장도 말했다. "우리 지역은 00를 커버하려면 비용이 너무 많이 듭니다. 힘든 지역을 담당하는 영업소에 뭔가 더 지원이 있어야 합니다." 과묵했던 C 소장도 이것저것을 개선해 달라고 했다. 쉽지 않은 일이지만 나는 역시 "알겠습니다. 긍정적으로 검토하겠습니다." 라고 대답했다.

고객 관리를 위해 주요 거래처에 방문을 했다. 안부 인사가 끝나자 A업체 임원이 말했다. "코로나 때문에 우리 회사 사정이 많이 안 좋아졌습니다. 이번 계약 건은 좀 낮은 금액으로 합시다. 누구 말대로 어려울 때 도와줘야 진짜 친구죠." B업체 사장은 이렇게 말했다. "아니 돈을 조금 늦게 입금했다고 이런 불이익을 주면 어떻게 합니까? 요즘 무너지는 회사가 많아서 미수금 관리가 강화된 것은 알겠는데 그래도 이거 너무 한 거 아니에요?" 거의 불가능한 일이지만 나는 최대한 노력하겠다는 어조로 "맞는 말씀이다. 본사에 적극적으로 어필하겠습니다"라고 답변했다.

업무 서류 파일 회사 (사진=픽사베이)
최고 경영층 주관 회의. 모두발언에서 사업부문장이 점잖게 인사와 당부의 이야기를 했지만 그의 어투와 표정 때문에 회의석상에는 묘한 긴장감이 흘렀다. 발언이 끝난 뒤 각 팀장들은 항목별로 그동안의 실적을 가감없이 프레젠테이션 했다. 실적이 저조한 지사를 바로 확인할 수 있게 굵은 빨간색으로 표시된 화면을 보면서 말이다.

이제 지사장들이 발표할 때다. 처음 순서로 A지사장이 발표를 했다. 그가 준비한 자료를 발표하자 각 임원들이 자기들이 맡고 있는 분야의 실적이 뒤쳐진 항목을 발견할 때마다 한 마디씩 멘트를 했다. 어떤 이는 성난 목소리로, 대부분은 점잖은 방식으로 질책을 했는데 어찌 되었든 우리들에게는 심한 압박으로 작용했다. 그렇게 마지막 지사장까지 보고를 했다. 힘든 시간이 지나고 드디어 회의가 끝났다.

회의가 끝난 뒤 지사장들이 여기저기 무리 지어 이야기를 나눴다. 나도 내가 속한 무리에서 말했다.

"아놔. 애로사항을 얘기했어야 하는데. 말을 못했네."
"참내. 네가 말단 직원이냐. 우리 나이에 애로사항이 어디 있어. 그냥 알아서 하는 거지."


우리 나이에 건의사항이 어디 있냐고? 나는 직원한테, 협력업체한테 심지어 고객한테도 애로사항을 듣고(말도 안되는 얘기 포함해서) 맞장구를 쳐 주며 해결하기 위해 온갖 노력을 다 하는데. 그럼 나는 어디다…… 술이 땡기는군.

이렇게 마음속으로 투덜거리다가 내가 20대 군 복무할 때 연대장이 한 말이 생각이 났다. 당시 그 분이 무슨 훈시를 한 뒤 "건의사항이 있나?" 고 물었더니 그 곳에 집합했던 수 십 명의 초급간부들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자 같이 배석했던 대대장이 웃으면서 이런 말을 했었다. "너희만할 때나 건의사항 얘기하는 거야. 기회 있을 때 하라고." 이 일화가 생각나자 갑자기 <방귀 며느리> 라는 전래 동화가 떠올랐다.

 

옛날 한 산골 마을에 어여쁜 며느리가 시집을 왔다. 최고의 며느리가 왔다고 신랑네 가족들은 어깨춤까지 추었다. 동네 사람들도 그 새색시에 대한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런데 하루가 다르게 꽃같이 곱던 새색시의 얼굴이 점점 노래졌다. 얼굴은 푸석푸석, 눈 밑엔 다크 서클, 말도 없어졌다. 남편이 물었다. 시어머니도 물었다. 하지만 며느리는 묵묵부답. 그러다 시아버지가 참다 못해 직접 물었다. "어디 불편하니, 새아가? 왜 그래?" 그래도 며느리는 머뭇거리며 말 하지 못했다.


왜 새색시가 가족들의 질문에 대답하지 못했을까? 아니 그전에 왜 자신의 애로사항을 먼저 말하지 못했을까? 그와 비슷하게 우리 나이, 우리 직책이 되면 무슨 이유로 조직에서 대부분 꿀 먹은 벙어리가 되는 것일까? 이 이야기의 결론으로 가 보자.
 

며느리는 시아버지의 허락 아래 억지로 참던 방귀를 뀌었다. 그런데 그 방귀 바람이 얼마나 셌던지 부엌의 솥뚜껑이 들썩거리고 시아버지가 날아가버릴 정도였다.

이 일이 있고 난 뒤 며느리는 결국 쫓겨났다…..


상사인 저도 '할많하않'입니다......
이것이 나와 우리 세대 간부들이 함구하는 현실적인 이유가 아닐까? (하지만 이게 다는 아니다. 이것 말고도 침묵하는 이유는 사실 더 많지만 여기에 쓸 주제는 아닌 것 같다.)

어쨌든 부하 직원들 앞에서도, 고객 앞에서도, 특히나 상급자 앞에서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은 제대로 하지 못하고 그들의 요구 사항을 들어줘야만 하는 나를 포함한 낀 새대 간부들, 불쌍하다. 물론 현재 들어줄 수 있는 위치에 있는 것이 감사하기도 하지만 말이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해야겠다. 모레 우리 지사 산하 지점장들과 회의가 있다. 그때 "지점장님들은 할 말씀이 없어요?"라며 먼저 말을 꺼내고 그 분들이 할 말은 할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어야겠다.

#인-잇 #인잇 #김창규 #결국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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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잇] 부하 업무 하나하나 챙겨주던 상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