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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파일] '머슴 경비원', '얼굴 셀카 청소원'…그들을 위한 법은 없었다

[취재파일] '머슴 경비원', '얼굴 셀카 청소원'…그들을 위한 법은 없었다
수많은 사람들의 울분과 분통이 한참이나 이어진 뒤에야 겨우 법이 만들어졌다. 2013년 한 대기업 상무는 라면이 덜 익었다며 승무원을 때렸다. 이듬해에는 한 아파트 경비원이 주민 폭언에 시달리다 자기 몸에 불을 질러 숨졌다. VIP를 제대로 응대 안 했다고 직원 무릎을 꿇린 '백화점 모녀', 실적 압박에 스스로 목숨을 끊은 '콜센터 감정 노동자' 같은 사건이 연일 언론에 오르내린 뒤에야 이런 일을 막겠다는 법이 만들어졌다.

2018년 시행된 감정 노동자 보호법과 지난해 신설된 직장 내 괴롭힘 금지법은 그래서 기대가 컸다. '고객 친절'이란 경영 가치 아래 자신의 감정을 억누르고 일하는 노동자들을 이제부터는 법이 보호하겠다는 선포였다. 말도 안 되는 온갖 이유로 노동자를 욕하고 때려 못 살게 구는 일을 이제는 못하게 하겠다는 경고였다. 법명이 쓰여지고 불려지는 그대로 약자는 보호받고 갑질은 금지될 것이라 믿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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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장내 괴롭힘

● 하지만 또, 사람이 죽었다

지난 10일, 서울 강북에서 아파트 경비원 59살 최희석 씨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평행 주차된 주민의 차를 민 게 발단이었다. 최 씨는 "우리의 통상적인 업무라고 말했지만 주민이 때렸다"고 했다. 이후에도 "주민이 화장실로 끌고 들어가더니 CCTV가 없냐고 물은 뒤 없다고 답하자 10분 넘게 때렸다"고 했다. 최 씨는 이날 코뼈가 부러졌다는 진단서를 받았다. 지난달 27일, 폭행을 호소한 지 6일째 되는 날이었다.

진단서의 피해자는 최 씨였다. 하지만 가해자로 지목된 주민은 자신에게 욕을 했다며 오히려 최 씨를 경찰에 신고했다. 최 씨 코뼈가 부러졌다는 진단을 받은 바로 그날이었다. 최 씨는 다음 날이 돼서야 주민을 폭행 혐의로 고소했다. 유족들은 "코가 퉁퉁 부었으니 잠시 일을 쉬라고 했지만 교대근무라 일할 사람이 없다며 최 씨가 계속 출근했다"고 말했다. 그렇게 6일을 더 일했다. 가해자로 지목된 주민은 최 씨가 일을 못 하게 되자 문자메시지를 보냈다. 경찰 조사를 받게 되면 폭행 혐의도 인정될 테니 수천만 원을 준비해 두라고 했다. 주민은 최 씨와는 무관한 지난해 교통사고로 발급 받은 진단서를 건넸다. 그는 최 씨를 '머슴'이라 불렀다.

故 최희석 씨가 가해자 지목 주민에 받은 메시지

최 씨의 이런 진술은 그가 마지막 폭행당하는 모습을 본 주민들이 돕겠다고 나서면서 알려졌다. 이미 13일 동안 고통에 시달린 뒤였다. 그의 진술을 토대로 작성된 사건일지에서 최 씨가 주민에 말한 건 하나였다. 홀로 자식을 키우던 그는 "딸과 먹고 살아야 하니 못 그만 둬 미안합니다"라고만 했을 뿐이다. 맞고 모욕 당해도 먹고 살아야 하니 오히려 때렸다는 사람에게 사과했다. 아파트 관리소장은 "화해를 요구했지만 주민이 둘 중 하나는 죽어야 끝난다며 계속 최 씨에게 사직서를 요구했다"고 말했다. 그렇게 최 씨는 13층 자신의 아파트에서 뛰어내렸다. 유서에는 "억울하다, 결백을 밝혀달라"고 쓰여 있었다.

입주민한테 폭언 폭행 시달려 극단적 선택한 경비원

● "걸레 옆에 두고 인증 사진 찍기 수치스럽다"

한국토지주택공사, LH의 매입 임대주택 청소 노동자의 제보가 왔다. 이달 들어 회사의 새로운 지시를 받았는데 빌라 청소 후 얼굴 인증 사진을 찍어 보고하라는 것이었다. 이들 노동자 10명은 오전 9시부터 오후 4시 반까지 주 5일, 각자 매일 8개의 빌라를 맡아 청소했다. 기존에는 날짜와 청소한 빌라를 기록해 주 단위로 보고했다. 이들은 "깨끗이 치워진 모습을 찍으라는 것도 아니고 빌라 이름과 얼굴을 같이 사진 찍어 보내라는 게 대체 무슨 이유인지 납득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청소하고 셀카 인증

평균 나이 60세가 넘는 노동자들은 LH 위탁관리 업체에 SNS 단체 채팅방을 통해 인증 사진을 매일 보고하고 있었다. 노동자들은 "남들이 쳐다 봐 남사스럽다", "걸레 옆에 두고 사진 찍는 걸 사람들이 이상하게 생각한다"며 "제발 사진만 찍어 보내게 하지 말아달라"고 수치스러움을 호소했다. 하지만 사측은 "어렵게 생각하지 말라. 간단한 일"이라며 계속 지시를 내렸다. 보도 직후 업체 측은 이런 지시를 중단했다.

● 1년 계약직…이들을 위한 법은 없다

숨진 아파트 경비원과 '셀카 인증'을 한 청소 노동자들은 모두 1년 계약직이었다. 생계 유지 여부가 1년마다 결정된다는 의미이다. 이들이 피해를 호소하기보다 받아들이는 선택을 하는 근본에는 '고용 불안'이 자리하고 있다. 숨진 최희석 씨의 동료였던 전 경비원은 "관리사무소에 피해 사실을 호소해도 같은 계약직인 소장이 돈을 내는 입주민에 시정을 요구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셀카 인증 노동자들 역시 보도 이후 "나는 괜찮은데 왜 보도를 해서 문제를 일으키냐"며 항의 전화를 하기도 했다. 먹고 살아야 하는 문제 앞에서 불합리는 너무나도 쉽게 대수롭지 않은 일이 된다.

법도 마찬가지다. 감정 노동자 보호법에 경비원은 해당되기 어렵다고 한다. 법은 '주로 고객을 직접 대면하는' 노동자를 대상으로 하는데 경비원은 주 임무가 입주민을 대하는 게 아니라는 이유에서다. 청소 노동자 역시 같은 이유로 감정 노동자 보호법의 대상을 받지 못한다. 직장 내 괴롭힘 금지법도 다르지 않다. 법은 괴롭힘을 신고했다고 피해 노동자를 해고하거나 불이익을 줬을 경우에만 처벌한다. 언제든 유사한 괴롭힘이 나올 수 있고 회사는 피해가 크게 알려질 때쯤 시정만 하면 된다. 개정된 공동주택관리법 역시 경비원의 처우 개선과 인권 존중을 위해 입주자대표회의와 관리 주체가 노력해야 한다고 명시했지만, 정작 처벌 규정은 없다. 정말 이들이 보호되고 괴롭힘이 금지되기까지 우리는 더 많은 울분과 분통으로 안타까운 희생들을 지켜봐야만 한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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