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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파일] '매뉴얼 없다' 변명도 안 통해…예고된 총체적 '난국'

처음부터 '검사 억제' 설정한 일본 정부

유성재 기자 venia@sbs.co.kr

작성 2020.05.12 17:19 수정 2020.05.13 16:27 조회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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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대표 이미지:[취재파일] 매뉴얼 없다 변명도 안 통해…예고된 총체적 난국
지난 2월 3일 일본 가나가와현 요코하마에 들어온 대형 크루즈선 '다이아몬드 프린세스'에서 코로나19 감염자가 하나둘 나오기 시작했을 때, 일본 언론들은 정부 관계자를 인용해 "초대형 선박에서 집단 감염이 발생했을 때에 대한 대처는 세계적으로 전례가 없다. 참고할 매뉴얼도 없다"는 말을 전하며 우려를 나타냈습니다. 우려는 현실로 드러나 이후 한 달 동안 크루즈선에서는 712명의 감염자가 나왔고, 이 가운데 13명이 숨졌습니다. 이를 지켜보던 다른 나라들은 감염자 선별에 신속하게 대응하지 못하고, 중증 환자만 그때그때 육지 병원으로 이동시키는 와중에 배를 거대한 '배양 접시'로 만들었던 일본 정부의 접안 차단 정책에 대해 답답해하면서도 '전례가 없다, 그러므로 매뉴얼도 없다'는 설명에 대해서는 별다른 의문을 제기하지 않았습니다. 감염 사태에 대처하는 '실력'은 일단 차치하고, 외부와 차단된 승객과 승무원 3천700명을 검역해야 하는 일본의 '불운'을 지적하는 외신 기사도 있었습니다.

일본 정부에게 있어서는 사실상 '전쟁'과도 같았던 요코하마 크루즈 사태가 전원 하선으로 일단락된 3월 초 이후, 일본의 상황은 급변하기 시작했습니다. 코로나 감염이 전국으로 확산하기 시작했고, 도쿄와 오사카 등 대도시권에서는 감염 경로를 파악할 수 없는 감염자가 매일 쏟아져 나왔습니다. 대규모 의료기관과 요양시설에서는 집단 감염 사례도 잇따라 보고됐고, 정부가 설정한 진료 기준(37.5도 이상의 고열과 기침 등의 의심 증상이 4일 이상 계속될 경우)에 해당되는 사람도 감염 검사를 받지 못하고 있다는 불만이 곳곳에서 터져 나왔습니다.

감염 검사를 대폭 확대해 '무증상 감염자'를 신속히 격리해야 사태를 진정시킬 수 있다는 지적에 대해 일본 정부는 의료현장의 '붕괴'를 막는 게 최선이라는 대답만 반복했습니다. 3월 14일, 아베 총리는 기자회견에서 "현재 하루 6천 건의 검사 능력이 있다. 이걸 3월 중에 8천 건으로 늘리겠다"고 말했고, 3월 25일에는 "하루 7천 건 이상의 능력을 확보했다"며 걱정을 잠재우려 했습니다. 그러나 아베 총리가 언급한 '능력'은 어디까지나 숫자였을 뿐, '실제 하루 검사 수'는 이에 한참 못 미치고 있었습니다. 그때도 일본 정부는 한 달 전 요코하마에 크루즈선이 들어왔을 때와 같은 말을 반복하고 있었습니다. "이런 대규모 감염사태는 전례가 없다. 그러므로 적절한 매뉴얼이 없는 상황에서 최선을 다하고 있다."

크루즈 사태 이후에도 지난 두 달 동안 우왕좌왕, 좌충우돌했던 일본 정부의 코로나 대응을 보면 '매뉴얼'이 없기 때문이라는 게 차라리 믿기 쉬울 정도입니다. 일본 정부는 2월 중순에 제시했던 코로나 진료 기준을 5월 8일이 되어서야 변경했고, 3월 중순에 '의료 종사자가 감염될 수 있다'며 폄하했던 우리나라의 탑승 검사(드라이브 스루)를 4월이 되어서야 지자체의 판단에 맡기는 방식으로 '슬금슬금' 허용했습니다. 현장 대응에 나선 지방자치단체들이 정부의 지침을 기다리다 못해 '독자 대응'을 잇따라 선언하고 나섰고, 일부 지자체는 '아베노마스크'라는 조롱을 받은 천 마스크를 기다리는 대신, 주민들에게 '마스크 구매권'을 배포해 사실상 '공적 마스크 제도'를 서둘러 시행하기도 했습니다. 크루즈 사태에서도 그랬듯 대규모 감염 확산 상황에서도 정부가 매뉴얼이 없다고 하니, 마음 급한 지자체가 최대한 할 수 있는 조치들을 들고 나온 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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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베 총리 (사진=게티이미지코리아)
그런데, 알고 보니 일본 정부도 '매뉴얼'을 갖고 있었습니다. 어제(11일) 마이니치신문이 보도한 '행동계획(2013년)'이 바로 그것입니다.

보도에 따르면, 행동계획은 신형 인플루엔자를 비롯한 감염증이 유행할 경우를 [미발생기-해외 발생기-국내 발생 초기-국내 감염기-소강기]의 5단계로 설정해 놓았는데, 세 번째인 국내 발생 초기의 감염 검사에 대해 "환자 수가 증가하는 단계에서는 중증자 등에 한정한다"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유행의 피크를 지연시켜 의료체제 정비와 백신 제조를 위한 시간을 확보한다"는 전략을 포함시켰습니다. 그다음 단계인 국내 감염기에는 "감염 확대를 멈추는 것은 곤란하므로 대책의 주안점을 '피해 경감'으로 바꾼다"라고 기술한 뒤 "모든 의심 환자에 대해, 감염 검사를 통한 확정 진단을 내리는 행위를 중지한다"고 적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이미 감염이 만연한 상황에서는 중증자 중심의 대책으로 전환해, 의심 또는 경증 환자가 병원으로 쇄도하는 의료 붕괴를 최대한 막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고 보니, 일본 정부는 이 '매뉴얼', 즉 행동계획을 '성실히' 지켰습니다. 지난 2월 24일, 아직 일본 내에서 감염이 극히 심각한 상태로 만연하지 않던 시점에 일본 정부의 전문가 회의가 내놓은 "한정된 의료자원을 중증자에게 집중시켜야 한다"는 의견을 정부가 바로 받아들인 것도 이미 '행동계획'이라는 '매뉴얼'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통념을 과감히 뛰어넘는 획기적인 정책을 좀처럼 시행한 적이 없는 일본이라는 국가의 '성향'은 차치하고, 일본 정부가 그야말로 성실히 지킨 이 '행동계획'은 왜 이번 같은 대규모 감염 사태에 대해 엉뚱하게 감염 검사를 억제하는 방향으로 틀을 잡고 있었을까요?

일본 비상사태 선언
지난 2009년 신종 인플루엔자 유행이 끝난 뒤 일본 정부 후생노동성의 당시 전문가 회의가 보고서를 냈습니다. 2010년 6월의 일인데, 이런 문구가 나옵니다. "어쨌든 간에(무엇보다), 각 지역의 지방위생연구소에 PCR 검사를 포함한 검사체제를 강화하는 동시에, 연구소의 법적 지위 재정비를 검토해야 한다."

지방위생연구소는 우리나라에서는 생소한 명칭이지만 일본에서는 각 지역의 보건소와 연계해 감염증 방지 대책의 최전선을 담당하는 기관입니다. 코로나19가 확산하면서 인력과 장비 부족으로 검사의 '병목 현상'이 생긴 곳이 바로 지방위생연구소를 중심으로 한 공적 의료기관입니다. 마이니치의 지적에 따르면 정부에 제출하는 보고서에 이례적으로 '어쨌든 간에'라는 강한 표현까지 넣었지만, 절실한 지적은 유야무야, 없었던 일이 된 셈입니다.

만약 2010년 전문가 회의의 보고서대로 이때 일본 정부가 지방위생연구소의 검사체제를 강화하고, 인력과 장비 등 자원을 충분히 끌어 쓸 수 있을 정도로 법적 지위가 재정비됐다면 적어도 이번 같은 사태에서 공적 의료가 허무하게 '펑크'를 외치지는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결과적으로 2009년 신종 인플루엔자 사태를 겪으면서 특별법까지 제정(2012년)됐지만, 이 과정에서 결정적으로 이렇게 중요한 전문가 제언(2010년)이 무시당하면서 2013년의 '말뿐인' 행동계획이 나왔고, 이번 코로나19 사태에서 이 행동계획이 사실상 일본 정부의 '매뉴얼'로 자리잡으면서 같은 실패를 (그때보다 더 크게) 반복하게 됐다는 겁니다.

일본 정부는 이번 주 내에 코로나19로 인한 긴급사태를 상당수의 지방자치단체에서 '해제'할 것으로 보입니다. 긴급사태를 해제하면 지자체장이 외출 자제와 휴업 요청 등을 철회하거나 상당히 완화할 수 있게 됩니다. 최근 다시 두 자릿수의 감염자가 나오고 있는 홋카이도의 경우처럼 '제2파, 제3파'에 대한 우려가 아직 불식되지 않은 상황에서 혹시라도 시계가 두 달 전으로 돌아간다면, 그때도 일본 정부가 대규모 감염 사태의 현실과 맞지 않는 '행동계획'을 고집할지 우려가 그치지 않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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