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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적북적] 웃기다 울리면 반칙! - 14세 연둣빛 천재작가의 [다시 태어나도 엄마 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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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룸] 북적북적 241 : 웃다가 울리면 반칙! - 14세 연둣빛 천재작가의 [다시 태어나도 엄마 딸]

"… 전에 엄마랑 만약에 다시 태어난다면 뭐가 좋을지 얘기한 적이 있다. 부자가 좋다고 할 줄 알았는데 뜻밖에도 벌레가 좋겠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먹고 배설하고 그냥 사는 거야. 삶의 보람이니 의무니 과거니 장래니 일이니 돈이니 하는 것과 관계없이 단순하게 살다가 죽는 게 좋겠어."

나는 하나도 안 좋을 것 같지만 벌레든 동물이든 괜찮으니까 다시 태어나도 엄마의 딸이었으면 좋겠다."


5월입니다. 요즘 날씨가 참 5월답죠. (미세먼지가 물러가서 올해 유독 그런 기분이 드는 것 같기도 합니다.) 종종 돌풍이 불고 대기가 요란한 4월은 뭔가 불안정해서 매력적인 봄이라면, 5월엔 어쩌면 그렇게 바람도 살랑살랑 부는지요, 봄날은 어느덧 온화해졌는데, 나뭇잎들의 빛깔은 아직 짙푸르러지기 직전. 1년 중 참으로 몇 날 없는, 아름답고 따스한 시기입니다.

요즘 나뭇잎사귀의 그 연둣빛은 제가 어렸을 때 세상에서 제일 좋아하는 빛깔이었습니다. 요새 표현대로 하자면, '연두색 덕후'였습니다. 스케치북이 온통 연두색이었던 것, 그림 속의 제 옷은 꼭 연두색으로 칠했던 건 아직도 기억이 납니다. 그리고 매년 봄이 돌아올 때마다... '아 그렇게 좋아할 만한 빛깔이었어, 역시.' 잊고 지내다가 새삼 다시 생각하곤 해요.

연두색은 '어린날'의 빛깔 같아요. 오늘의 [북적북적]으로 선택한 소설집의 마지막 장에 다다르면서, 그런 생각을 문득, 다시 했습니다.

서로 연결된 중편 3편이 실려있는 이 소설집이 출간됐을 때, 작가는 14살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이 책에 실린 작품들 모두, 그전에 쓴 작품들이란 얘기죠. 2020년인 지금도 작가는 여전히 17살입니다.

작가의 나이만 듣고, '글쓰기에 재능이 있는 어린애가 쓴 글이 신기해서, 화제성을 노리고 출간된 책인가?' 선입견을 갖기 딱 쉬운 배경이긴 한데요… 아니더라고요. 그런 선입견이 잠깐이라도 들었던 게 부끄러워질 정도로 본격적으로 작품다운, 아주 멋진 작품들입니다.

2020년 방년 17세의 베스트셀러 작가. 스즈키 루리카의 데뷔작 [다시 태어나도 엄마 딸]을 오늘, 함께 읽고 싶습니다.

"엄마는 아빠가 어떤 사람인지 알려주지 않는다. 그냥 내가 태어나기 전에 죽었다고만 한다. 어려서는 그 말을 믿었는데 요즘 들어 아무래도 의심스럽다.
"그리고 우리 집에는 왜 불단이 없어? 아빠 사진도 한 장 없고."
"아, 어어, 그건, 그거야, 그래. 불에 탔어. 화재로."

누가 봐도 방금 떠올린 것 같은 대답이 돌아왔다. 이런 식으로 둘러대서 통하는 것은 저학년까지다.

"흐음, 그럼 우리 아빠는 어떤 사람이었어?"
"평범하게 일하는 사람이었지."
"그렇게 말하면 잘 모르잖아. 좀 더 자세하게 말해줘. 무슨 일을 했는데?"
"그럼 반대로 하나는 아빠가 어떤 사람이면 좋을 것 같아?"
"어어, 음, 나카노네 아빠처럼 학교 선생님?"
"그럼 그걸로 됐네. 응, 그걸로 하자."
"어? 뭐야, 그게. 그걸로 되긴 뭐가 돼. 이상하잖아."
"'숨기면 꽃'이라는 말 모르니? 제아미(무로마치 시대, 일본의 전통 가무극인 '노'를 완성한 연기자)가 한 말. 꼭 수제비 같은 이름이지? 아무튼 그 사람이 말했어. 뭐든지 다 밝힌다고 좋은 게 아니라는 뜻이야. 인생에는 알쏭달쏭한 부분을 남겨둬야 상상의 여지가 많고 운치가 있다는 소리지. '수수께끼 이외에 무엇을 사랑하랴'고 니체도 말했다더라. 니체라고 아니? 독일 철학자야."


평소에는 의무교육을 마치기나 했는지 의심스러운 엄마인데 가끔 교양인 같은 소리를 하니까 얕볼 수가 없다. 게다가 꼭 뭔가 숨기거나 대화 주제를 바꾸려고 할 때 그런 소리를 한다."


이 소설들은 '이걸 정말 12살, 13살 때 혼자 쓴 걸까?' 믿기지 않을 정도로 본격적인 작품들입니다. 능청스럽게 느껴질 만큼 꼭 적당한 수준으로만 깔아주는 유머감각, 은근하고도 극적인 반전들, 적절하게 마음을 쥐락펴락하는 구성, 그리고 등장인물들에 대해 작가가 고루고루 보여주는 통찰의 깊이까지... 모두요.

하지만 분명히 어린이 작가의 작품이라는 걸 느끼게 되는 결정적인 지점들이 있었습니다. 어린이 당사자의 그 '당사자성'이 엄연하게 다가오는 지점들이었습니다.

"어쩌면 저 사람이 아빠일지도 모르지."
"뭐? 그럴 리가 없잖아."
"가능성이 제로는 아니야."
"흥, 바보 같아."
리모컨을 빼앗아 채널을 바꿨더니 물건을 팔러 온 척하며 수차례 빈집을 턴 남자가 붙잡혔다는 뉴스가 나왔다.

"굳이 따지면 저쪽에 가깝지 않아? 분류상으로. 하하하."

나는 농담으로 한 소리였는데 힐끔 엄마를 봤더니 허를 찔린 표정으로 굳어 있었다.
어, 거짓말이지?
잠깐 사이를 두더니 엄마가 한층 더 소리를 높였다.

"얘가 무슨 소리야. 그럴 리가 없잖아? 아아,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네. 말장난은 그만하고 숙제해야지. 오늘은 뭐니? 산수? 한자랑 음독도 있지?"

그때 번개 같은 직감이 내 머리를 꿰뚫었다.
아아, 그런 거였구나.
이제야 모든 게 이해가 되었다.
그렇구나, 우리 아빠는 범죄자였구나."


가난한 한부모가정, 남자들만 있는 공사장 틈바구니에서 육체노동을 하는 바짝 마른 엄마, 아빠 얼굴을 알기는커녕 범죄자는 아니었을지 걱정해야 하는 상황 . 밖에서 바라본다면 누구나 '아 정말 안됐다' 동정을 하기 마련인 환경이 분명하지만. 그리고 분명히 본인도 벌써부터 맛보아야 하는 그 쓰디쓴 인생의 맛에 때때로 토기가 올라오기는 하지만.

그러나 대체로 주인공 '나'는 "응. 이게 내 삶이에요. 이게 나고, 이게 우리 엄마예요." 하면서 착착 앞으로 걸어 나가고 있을 뿐입니다. 사실 당사자들은 그 누구도 그렇게까지 남이 막연히 그려보는 그림처럼 뻔하지 않잖아요. 바로 그런 생의 엄연함이 이 소녀 작가의 작품에 번듯하게 단단하게 드리워져 있습니다. 어린이가 말해주기 때문에 수긍할 수 있는 당사자성입니다. 웃음이란 눈물 방울방울 안에 은근히 고이는 것, 이라고 그가 가르쳐줄 때, 제가 무엇이라고 거기에 반기를 들 수 있겠습니까.

작가 스즈키 루리카가 곧 이 소설의 일인칭 주인공 '나', 다나카 하나미는 아니지만, 가난이나 한부모가정을 둘러싼 상황에 대한 생생한 묘사, 그리고 그런 상황을 대담하게 담담하게 서술하는 방식을 보면, 어느 정도 이런 삶을 알 수 있을 법한 환경에서 자라지 않았을까 생각하게 되는 건 어쩔 수 없습니다. (인터넷을 뒤져봤는데, 작가에 대한 정보는 잘 나오지 않더라고요. 좋아하는 잡지를 사고 싶어서 문학상의 상금을 노리고 글을 쓰기 시작했다는, 책에 실린 정보 정도가 전부예요. 일본 인터넷을 뒤져보고 싶은데, 일어를 못해서 안타까웠습니다.)

스즈키 루리카는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 3년에 걸쳐서, 일본의 대표적인 출판사 소학관(쇼가쿠칸)에서 주최하는 '12세 문학상' 대상을 연속 수상했다고 합니다. 아마 소학관 측으로서도 2년째에는 참 내리기 힘든 결정이었을 겁니다. '작년에 준 아이를 또 줘? 어떡하지? 그래도 되나? 공정성 시비는 없을까? 그런데 얘 말고 다른 아이를 대상이라고 할 순 없겠는데…… ' 그런 심정 아니었을까요. 3년째에는, 스타 탄생을 확신했겠지만요.


"가게 앞에는 페인트가 죄다 벗겨진 나무 벤치가 있다. 수영장에 다녀오는 길에 여기 앉아 아이스크림을 먹는 것이 내 일과다. 사장님은 나를 보면 과자에 달린 장난감이나 캔이 찌그러진 주스를 "이거 못 파는 물건이니까 가져갈래?" 라며 주거나, "이거 오늘 들어온 상품인데 우리도 먹어보고 팔아야 하니까 시식해볼 생각이야"라며 봉지를 뜯어 자기가 한 입 먹고 "아아, 이런 맛이군. 이제 알았으니까 됐다. 남은 거 먹어줄래?" 하고 내게 주었다. 내가 불편하지 않도록 배려해주는 것을 아니까 감사히 받았다."

왜 그런 거 있죠. 연속극을 보다가 아역이 어른을 이해하는 너무 성숙하고 당찬 말을 하면, 시청자들이 "아우 징그러워. 무슨 애가 저래. 저건 정말 '작가'가 쓴 말이다!" 한 마디씩 하는 거요ㅎㅎ

분명히 그 대사들은 좀 과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돌이켜 보면... 어린이들만이 가능했던 특유의 이해심, 맑은 시선 같은 게 분명히 우리의 어린 시절에도 있었습니다. 모두 잊기 시작했을 뿐이죠.

어른의 포용과는 또 다른, 어리기 때문에 아직 지니고 있는 어떤 심성. 있는 그대로 상황을 받아들이고 이해해 주는, 어린 시절에만 존재했던 '자꾸만 시험을 겪어 닳아 없어지기 전의 포용력' 같은 게 분명히 있었어요. 은근하고 섬세하고 색온도가 미묘하게 따뜻해서, 그야말로 따사로운 봄날의 연둣빛 같은… 어린이 특유의 '영혼의 힘' 말입니다.

아직 어린이인 작가에게 마침 유달리 타고난 천재성이 있어, 바로 그 시절 그때만의 그 마음을 작품으로 만들어서 보여주니, 전에는 인류가 미처 기록에 남길 수 없었던 '사람 마음속의 숨은 명소'를 발견하는 기분마저 들었습니다. 어린이 작가로부터 받아야지만, 어른의 흔한 의심 없이 받아들이게 되는 종류의 선물 같은 글들인 거죠. 대부분의 어린이들은 이렇게 자신의 '영혼의 힘'을 재미있게 정제된 작품으로 변환할 수 있는 능력까지 갖고 있지는 못합니다. 어쩌면 그만큼 그 '어린 영혼의 힘'이 멋진 것이기에, 그렇게 휘발돼 사라지고 성장과 함께 잊혀지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했습니다.

"… 어, 어어, 혹시 진짜야? 우리 아빠야? 나를 찾으러 와줬어? 그렇구나.

태어나기도 전에 헤어졌으니까 내 얼굴을 당연히 모르겠지. 머리가 혼란스러웠고 온몸에서 땀이 나는 것 같았다.

"혹시 이 애를 아니?"

남자가 들고 있던 가방에서 사진을 꺼냈다. 초등학교 저학년쯤 되어 보이는 여자애가 벚나무 아래에서 웃고 있었다.

내가 아니었다.

"다카이 유카라고 하는데, 아, 지금은 다카이가 아니라 하야카와 유카라고 한다. 혹시 얘를 아니?"

누군지 금방 알았다. 옆 반의 유카다. 나랑 같은 동아리에서 특별 활동을 한다.
하지만 나는 이 사람이 내 아빠가 아니라는 것에 낙담해서 곧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아, 아저씨는 절대 이상한 사람이 아니야. 유카의 아빠란다. 유카가 어렸을 때 이혼한 후로 계속 만나지 못했어. 아저씨가 이번에 일 때문에 외국으로 나가게 됐는데, 그전에 어떻게든 만나고 싶어서. 앞으로 언제 일본에 돌아올지 모르거든."

내가 입을 다물고 있자 아저씨가 황급히 설명했다. 수상하게 여긴다고 생각했나 보다.

"그래요? 하지만, "

모르는 사람이 내 이름이나 친구의 이름, 학년 등을 물어도 대답하면 안 된다고 기도 선생님이 주의를 주었던 것이 떠올랐다.

"정말이란다. 아저씨는 정말로 유카의 아빠야. 자, 여기 증거사진."

사진을 한 장 더 꺼냈다. 동물원인가? 아까 사진보다 어린 여자애가 원숭이 우리 앞에서 이 아저씨에게 안겨 웃고 있었다. 뺨을 비빈 두 사람은 정말 행복해 보였다. 단단히 감싸듯이 여자애를 안은 아저씨의 팔에서 '정말 소중한 보물'이라는 마음가짐이 느껴져 가슴이 바늘에 찔린 듯 따끔했다. 고개를 들었는데 아저씨의 눈이 빨갛게 일렁이고 있었다.
이 사람은 거짓말을 하는 게 아니라고 판단했다.
"하야카와 유카는 나랑 같은 동아리예요."



아마도 문학으로만이 가능한 종류의 영혼의 환기. '영혼의 공기청정기' 같은 작품들이었어요, 때때로 절로 '쿡쿡' 웃음소리가 비집고 나올 정도의 유머감각과 섬세하고 냉철하게 구성한 코미디, 은근한 서스펜스까지… 다양한 장치들은 근사한 덤이고요.

스즈키 루리카의 사진은 한국어 인터넷에도 있습니다. 자기 글처럼 맑은 얼굴의 학생입니다.

어린 연둣빛 특유의 이해력과 포용력이 묻어나는 표정. 이 시기를 지나 녹음이 짙어졌을 때, 그리고 단풍이 곱게 들었을 때까지를 기대하고 싶은... 멋진 작가 사진이었습니다.

가족에 대해서… 그리고 그 가족, 가족들 속 '인간'에 대해서... 이토록 새로운 풍경을 보여주는 어린이 작가의 소설을 '가족의 달' 이 5월에 만나서 저는 참 기뻤습니다. [북적북적] 가족 여러분도 다나카 하나미와 어머니 다나카와 그들의 이웃들... '다나카 패밀리'의 세계에 한 번 입장해 보시면, 분명히 좀 더 따사로운 5월을 보내실 수 있을 거라고 확신합니다.

직접 읽어보시고, 재미없으면 제게 항의하셔도 좋아요! ㅎㅎ

들어주시는 모든 분들, 늘, 깊이 감사드립니다.

*출판사 '다산북스'의 낭독 허가를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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