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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파일] '전 국민 고용보험' 그리고 '밥벌이'의 지엄함

[취재파일] '전 국민 고용보험' 그리고 '밥벌이'의 지엄함
"밥에는 대책이 없다. 한두 끼를 먹어서 되는 일이 아니라, 죽는 날까지 때가 되면 반드시 먹어야 한다." 소설가 김훈은 '밥벌이의 지겨움'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먹어야 한다. 죽는 날까지.' 더는 설명이 필요 없는 강력하고 간명한 진리입니다.

강력하고 간명한 만큼, 역설적으로 이 명제를 지키기는 쉽지 않습니다. 앞서 故 노회찬 의원이 지적했듯 '동물의 왕국'이 되고 있는 이 험난한 세상에서, '밥벌이의 지겨움'을 지키는 과정은 실로 지난합니다. 노동을 통해 돈을 벌어 자신과 가족의 입에 밥을 넣어야 한다는 관점에서 보자면, 어쩌면 밥벌이는 지겹다기보다 '지엄하다.'라고도 할 수도 있을 거 같습니다.

특히 밥벌이가 지엄한 것은 개인 혼자만의 노력으로는 이룰 수 없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당장 코로나19 사태를 누가 예상할 수 있었을까요? 코로나19가 몰고 온 엄청난 '고용 한파'를 누가 상상이나 했겠습니까? 군소리 없이 주어진 매 순간을 열심히 살아온 소시민들은 그저 황당할 뿐입니다. "대체 더 얼마나 열심히 살아야 하는가?" 절규에 가까운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지금 이 순간에도 많은 이들이 표표히 일터에서 사라져 가고 있습니다.

● 훌륭한 국가는 지금 무엇을 해야 하는가?

개인의 노력이나 의지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외부의 힘. 이것을 온몸으로 겪으며 우리는 잠시 잊고 살던 '국가의 존재 이유'를 떠올려 보게 됩니다. '왜 국가는 존재해야 하고, 훌륭한 국가는 어떤 것일까?' 다양한 의견이 있을 수 있습니다. 정답이 없을 수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하나의 명제를, 모 작가의 말을 빌려 가져와 보자면, "훌륭한 국가란 모든 종류의 위험에서 시민을 보호하며 누구에게도 치우치지 않게 행동하는 국가"라고 할 수 있을 거 같습니다. (이 관점에서 보면 당장 코로나19 사태를 겪으며 훌륭한 국가와 그렇지 않은 국가의 구분이 나름 더 선명해진 것 같기도 합니다.)

어쨌든 다시 경제문제로 돌아와 보자면, 코로나19 사태 이후 일차적으로 보건복지 문제를, 더 나아가 이차적으로 '고용 충격' 문제까지 최소화하며 시민을 보호하는 것, 그것이 지금 이 시점에서 국가의 제일 중요한 책무라고 할 수 있을 거 같습니다. 즉 시민의 생명과 안전을 지키고, 경제적으로 곤경에 처한 이들이 나락으로 떨어지지 않게 사회안전망을 구축하는 것이 지금 무엇보다 중요한 화두가 됐다는 것입니다.

'포스트코로나 시대 정치 지형의 변화:한국과 G2' 정책세미나에서 축사 하는 강기정 청와대 정무수석 (사진=연합뉴스)

● 국민의 전폭적인 지지…그만큼 커진 부담과 책임

우리는 흔히 말합니다. 일류는 위기에서 빛난다고. 지금이 바로 위기입니다. 국가를 운영해가는 정부와 여당이 빛을 내야 할 때인 것입니다. 더욱이 지난 총선에서는 국민의 전폭적인 지지까지 받았습니다. 그 지지는 어떤 면에서는 "민주주의와 평등, 연대와 같은 추상적인 가치뿐 아니라 코로나19 사태로 닥쳐올 초대형 위기에서 당장 '밥'의 문제를 해결해 달라."라는 외침이기도 했을 것입니다. 어떠한 방식으로 '밥'을 만들고, 어떠한 기준과 절차에 따라 '밥'을 나눠 먹을 것인가. 이 근원적인 문제에 대해 국가가 답을 해야 하는 시점이 된 것입니다. 물론 그것도 국민이 듣고 머리를 끄덕이며 박수 칠 만한 방책을, 쉽고 또 실감 있게 말입니다.

예상보다 정부의 호흡은 길지 않았습니다. 운을 뗀 것은 청와대였습니다. 지난 1일 강기정 정무수석이 "코로나19 극복 과정에서 전 국민 건강보험이 숨은 공로자라는 건 다 아는 사실이다. 건강보험처럼 전 국민 고용보험을 갖추는 것이 포스트 코로나의 과제가 아닌가 생각해보게 됐다."라고 발언한 것입니다. 눈여겨볼 점은 이 발언이 대통령 직속 정책기획위원회가 연 '포스트 코로나 시대 정치지형의 변화' 정책 세미나에서 나왔다는 점입니다. 사실상 코로나19 사태 이후 닥쳐올 고용 충격을 '전 국민 고용 보험'이란 무기를 통해 극복해보자는 메시지를 던진 것입니다.

당장 여당과 정부 부처에서도 호응이 잇따랐습니다. 이인영 민주당 원내대표는 "고용보험법 개정안이 통과돼 특수고용 노동자, 플랫폼 노동자 등을 (보험 적용 대상에) 포함해야 한다."라고 말했고, 김용범 기재부 1차관도 SNS에 "고용 충격에 대비해 하루빨리 제도의 성벽을 보수할 때"라고 썼습니다.

직장인 퇴사 이유

● 경제활동인구 절반, '고용보험 울타리' 밖에

정부가 '전 국민 고용보험'이란 처방을 들고 나온 것은 그만큼 '고용보험'이란 울타리 안에 들어온 사람들이 적다는 진단에 따른 것입니다. 쉽게 말해, 거대한 태풍이 시시각각 올라오는데 대피소는커녕 우산조차 없는 국민이 너무 많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한국노동연구원 조사에 따르면, 전체 경제활동 인구 2,735만여 명 가운데 고용보험 가입자는 절반가량인 1,352만 8천여 명에 불과했습니다. 한마디로 노동자의 절반은 실직하면 경제적으로 별다른 대안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고용보험은 무엇인가? 말 그대로 실직했을 때를 대비하는 '보험'입니다. 지원이 아닌 보험이기에, 기본적으로 수혜자가 보험료를 미리 내야 합니다. 실업에 대비해, 사업주와 근로자가 매달 보수의 일정액을 고용보험료로 납부하는 것입니다. 만약 근로자가 실직하면, 고용보험에서 실업급여를 지불하고 직업훈련도 받을 수 있으며, 사업주에게도 고용유지 조치 또는 교육훈련 비용을 지원해줍니다. 실직이라는 최악의 상태를 버티고 이겨나갈 수 있게 돕는 사회안전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전체 경제활동인구 가운데 절반가량이 이 같은 안전망 밖에 있다는 것은 국가를 운영하는 입장에선 분명히 큰 고민일 것입니다. 더욱이 코로나19가 만든 거대한 '실직 태풍'이 시시각각 올라오고 있는 상태에선 더 그럴 것입니다. 태풍이 몰고 온 비바람을 맨몸으로 맞아야 하는 이들은 다름 아닌 영세자영업자나 특수고용노동자 같은 이른바 '고용 사각지대'에 놓인 저소득층입니다. 때문에, 어떻게든 이들을 끌어다가 '고용보험'이란 우산이라도 손에 쥐어져야 한다는 것이 정부의 기본적인 정책 방향입니다.

● '고용안전망 강화', 문재인 정부의 역점 과제

코로나19 사태로 고용 안전망 강화라는 이슈가 더 두드러졌지만, 사실 이것은 문재인 정부의 역점 과제이기도 합니다. 정부 출범 직후 선정한 100대 국정 과제에도 '특수고용 노동자와 예술인부터 단계적으로 고용보험을 확대하자.'라는 안이 포함됐습니다. 실제로 2018년 11월에는 민주당 한정애 의원이 이 같은 내용을 담은 '고용보험법 개정안'을 발의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한 의원이 발의한 이 법안은 야당 반대로 해당 상임위에서 논의조차 해보지 못하고 폐기될 처지에 놓였습니다.

그런데 지난 총선에서 여당이 압승하며 다시 상황이 바뀌었습니다. 여당이 의지만 가지면 법안 통과를 시도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한 여당 다선 의원도 "이번 국회에서는 장기적인 관점에서 사회적 안전망을 갖추려는 노력해야 한다. 특히 고용 관련 안전망은 약자에게 베푸는 시혜가 아니라 국가가 당연히 해야 할 의무이다."라고 강조했습니다.

또 다른 국회 환경노동위원회 출신 여당 의원도 "당장은 돈 들어갈지 몰라도 저소득층의 고용이 완전히 무너지면 그때는 돈을 아무리 써도 감당하기 어려워진다. 지금 사회안전망을 확충하는 것이 국가 재원을 관리하는 차원에서도 이득이다."라고 의견을 밝혔습니다.

이런 점을 종합적으로 고려해볼 때, 정부 여당은 한 의원이 발의했던 '특수고용노동자에 대한 고용보험 적용' 법 개정부터 우선 추진할 것으로 보입니다. 전 국민을 대상으로 하기 전에 우선 급한 계층에게라도 우산을 쥐여주자는 것입니다. 동시에 저소득층 구직자에게 월 50만 원씩 6개월간 구직촉진수당을 주는 국민취업 지원제도도 진행할 것으로 보입니다. 이재갑 고용노동부 장관이 "플랫폼노동자, 프리랜서, 영세자영업자 등 일하시는 모든 분이 고용 안전망을 통해 보호받을 수 있도록 적극적인 대책도 강구, 추진해나가겠다."라고 밝힌 것도 이와 맥락을 같이 하는 것으로 해석됩니다.

청년 일자리, 취업 (사진=연합뉴스)

● 좋은 취지에도…결국 문제는 '돈'

고용 관련 사회안전망 확대, 이 아름다운 제도에 이견이 있기는 어렵습니다. 더욱이 4차 산업혁명으로 노동형태도 다양해지고 있어 필요성은 대체로 공감합니다. 그럼에도, 넘어야 할 산이 많습니다. 그 가운데서도 핵심은 결국 '돈'입니다. 앞서 말씀드렸듯이, 고용보험은 지원이 아닌 어디까지나 보험입니다. 보험 혜택을 받는 수혜자들이 보험료를 내야 한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현재 고용보험료 징수의 기본은 근로계약을 맺은 회사와 근로자가 반반 부담하는 체계입니다. 그런데 독립 사업자인 자영업자와 특수고용노동자 등은 고용보험료 전액을 자신이 부담해야 합니다. 당장 먹고살기도 빠듯한, 생계가 막막한 저소득층 노동자, 자영업자들에게 보험료를 그것도 전액을 내가 내야 한다는 것은 말 그대로 '달나라' 얘기입니다. 보험 가입을 강제화하면 당장 반발이 클 수밖에 없습니다.

사실 지금도 일용 근로자와 자영업자는 고용보험에 가입할 수는 있습니다. 2004년 법이 개정되며 일용 근로자 고용보험 가입이 의무화됐고, 2012년 자영업자의 고용보험 가입도 가능하게 됐습니다. 그럼에도 전체 고용보험 가입자 가운데 자영업자 비중은 0.2%밖에 되지 않습니다. 고용보험에 가입을 못 하는 것이 아니라 안 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처럼 수혜자가 보험료를 낼 수 없는 상황에서 강제로 보험에 가입을 시킨다면, 그 보험료는 누가 내게 될까요? 네, 맞습니다. 정부가 대신 내주게 됩니다. 세금으로 말이지요. 이 대목에서 정부의 고민이 깊어집니다.

● 유일한 대안, 공동체 의식과 치열한 논의

설상가상으로 고용보험의 근간이 되는 기금 재정은 이미 '빨간불'이 켜진 상태입니다. 지난해 고용보험기금은 2조 944억 원 적자가 났습니다. 고용보험료 등으로 들어온 돈은 11조 8,508억 원인데, 실업급여 등으로 지출한 돈이 13조 9,452억 원으로 훨씬 더 많았기 때문입니다. 2년 연속 적자를 기록한 기금 적립금은 2017년 10조 원대에서 지난해 7조 원대로 쪼그라들었습니다.

김준모 건국대 행정학과 교수도 "결국 재원 마련에 대한 고민이 더 치열해야 한다. 세수를 기반으로 보험 범위를 확대하려면 납세자에게 설명을 정확히 해야 하고, 세원을 정확히 파악하려는 노력이 선행돼야 한다.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고용, 지원 관련 지원을 전제적으로 다시 고민해보는 시스템 구축도 필요하다."라고 조언했습니다.

최현수 한국보건사회연구원 연구위원도 "실시간으로 소득을 파악할 수 있는 정보시스템을 구축한 뒤, 소득이 있는 곳에 세금을 부과한다는 과세의 기본원리를 적용해 새로운 제도를 도입해야 한다."라고 제안했습니다. 보험가입 대상 여부와 상관없이 소득이 발생하는 모든 경우에 보험료를 부과해 사회보험이 적용될 수 있게 하고, 그것이 부담스러운 저소득 계층은 현재 시행 중인 '두루누리 사회보험' 등을 활용해 일부 금액을 지원하자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정답은 없습니다. 어느 하나의 생각이나 제도가, 만능열쇠를 가진 경비아저씨처럼, 이 복잡다단한 문제를 다 풀어낼 수는 없습니다. 시인 이육사가 외쳤던 백마를 탄 초인이 나타나 "짜잔~"하고 해결할 수도 없습니다. 사회적 약자를 배려하고 더불어 잘 살자는 공동체 의식, 한정된 재화를 효율적으로 배분하기 위한 치열한 고민과 논의가 이 문제를 풀어낼 유일한 대안일 것입니다.

● "불행한 이를 동정하는 것이 인간이다."

이탈리아 작가 조반니 보카치오는 고전 '데카메론'을 이 같은 구절로 시작했습니다. "인간다움은 불행한 사람을 동정하는 데 있다(Human it is to have compassion on the unhappy)." 미국 제35대 대통령 존 F. 케네디도 "자유로운 사회가 가난한 다수를 돕지 못한다면 부유한 소수마저 구할 수 없을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오늘 이 시점에서 우리가 갖춰야 할 가치와 덕목이 무엇인지를 곱씹어 보게 하는 조언입니다.

코로나19 사태 이후 우리가 마주할 세상은 틀림없이 새로울 것입니다. 기존에 없었던, 아마 한 번도 겪어보지 못했던 낯선 세상이 우리를 거칠게 몰아붙일 것입니다. 하지만, 그 낯선 세상에 맞서 싸우고, 시련을 이겨낼 수 있게 도울 무기들은 역설적으로 낡고 오래됐고 또 친숙한 것들일 것입니다. 코로나19 사태 때 우리 국민이 보여준 공동체 의식, 약자에 대한 동정과 배려, 희생과 봉사에 대한 감사, 그리고 인내 이런 가치들일 것입니다.

오늘 우리 앞에 흐르는 시뻘건 격류를 보며 '밥벌이의 지엄함'을 다시 떠올리게 됩니다. 피할 길은 없습니다. 강을 건너려면 뛰어드는 수밖에 없습니다. 그 영법(永法)이 거칠거나 공격적이지 않기를 바랍니다. 나보다 당신을, 그리고 우리를 먼저 생각하고 배려하는 영법으로 격류를 무사히 건널 수 있기를, 시청자 여러분과 함께 기원하겠습니다.

▶ [2020.05.04 8뉴스] 취지 좋은 '전 국민 고용보험'…과제는 산 넘어 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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