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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파일] 원유 ETN·ETF '한방' 노린 개미들…드리운 '거품 공포'

[취재파일] 원유 ETN·ETF '한방' 노린 개미들…드리운 '거품 공포'

박찬근 기자 geun@sbs.co.kr

작성 2020.05.01 13:00 조회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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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대표 이미지:[취재파일] 원유 ETN·ETF 한방 노린 개미들…드리운 거품 공포
● 거품, 반복되는 역사

네덜란드 튤립부터 미국 부동산까지 버블은 시장을 가리지 않았습니다. 버블은 단어 의미 그대로 가격에 거품이 끼었다는 뜻입니다. 단지 갑자기 가격이 몇 배 올랐다고 버블이라고 하지는 않습니다. 버블이냐 아니냐를 구분 짓는 건 '얼마나 올랐냐'가 아니라 '왜 올랐냐'입니다.

앞으로 가격이 오를 거라는 확신만이 다시 가격을 끌어올릴 때 버블이 형성됩니다. 이런 믿음이 역병처럼 시장에 돌면 그 물건이 필요한 사람이든 아니든 너도나도 사려고 하게 됩니다. 가격이 계속 오르니 더 비싸게 팔아 차익을 보려는 수요입니다. 이런 투기적 수요가 시장을 지배하기 시작하면 한동안 가격 폭등을 멈출 수 없습니다. '너무 올랐다', '이제 떨어질 때가 된 것 아닐까' 하는 공포가 가격이 오를 거란 확신을 걷어내기 시작할 때 거품은 꺼집니다. 부푼 가격이 꺼지는 건 한 순간입니다. 버블이 발생한 시기와 상품은 다양했지만 과정은 모두 이랬습니다.

● 유가 폭락하는데 원유 파생 상품 수요는 폭증?

최근 원유 선물 지수를 추종하는 파생 상품을 보면 거품이 낀 듯합니다. 대표적인 상품이 ETN(상장지수증권)과 ETF(상장지수펀드)입니다. ETN은 시장에 있는 여러 가지 지수 중 하나를 연동시켜 그 지수가 오르거나 떨어질 때 그만큼 수익이나 손실을 보는 증권입니다. ETF는 같은 원리로 운영되는 펀드입니다. 복잡하게 들린다면, 특정 지수가 오르내리는 것을 따라 오르내리는 주식이라고 이해해도 크게 틀리지 않습니다. 실제 이런 상품들은 증권사를 통해 주식처럼 사고팔 수 있습니다.

최근 유가가 폭락하면서 독특한 현상이 나타났습니다. 지난해 이맘때 배럴당 60달러쯤 하던 서부 텍사스산 원유(WTI) 가격이 최근 10달러대 초·중반까지 떨어지자 개인 투자자들 사이에 언젠가는 원유 가격이 반등할 거란 막연한 믿음이 퍼져나갔습니다. 원유를 직접 사고팔 수는 없으니, 개인 투자자들은 원유 가격이 연동된 ETN과 ETF로 눈을 돌렸습니다.

투자자들은 원유 선물 지수 변동에 따라 움직이는 ETN과 ETF를 경쟁적으로 사들였습니다. 특히 가격이 지수 변동폭의 두 배로 움직이는 이른바 레버리지 상품 수요가 폭증했습니다. 유가가 오른다면 배로 이익을 챙길 수 있으리라는 예상 탓입니다. 이런 상품들 이름에는 '레버리지'나 '2x' 등의 단어가 포함돼 있습니다.
[취재파일] 원유 ETN·ETF '한방' 노린 개미들…드리운 '거품 공포' ● '투기판' 변질된 원유 파생 상품 시장

ETN과 ETF는 거래 가격과 별도로 이 상품의 실제 가치, 즉 적정 가치가 책정돼 공개됩니다. 위 그림의 상품은 S&P가 산출하는 원유 관련 지수를 따르도록 설계해 삼성증권이 발행한 ETN입니다. 지수와 같은 방향으로 움직이고, 변동폭은 지수의 두 배입니다. 위 그림에서 I.I.V(실시간 지표 가치)라고 표시된 것이 해당 상품의 적정 가치입니다. 이 적정 가치 역시 유가 등락에 따라 매일 변합니다. 4월 29일 기준, 이 상품의 적정 가치는 98원, 거래 가격은 835원인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적정 가치와 거래 가격의 차이를 괴리율이라고 부릅니다. 거래 가격이 적정 가치의 1.5배라면 괴리율은 50%, 2배라면 100%라고 표시하는 식입니다.

괴리율이 클수록 해당 상품의 거래 가격에 거품이 많이 끼어있다는 의미입니다. 위 상품을 예로 들면 괴리율은 749.59%입니다. 거래 가격이 적정 가치의 8.5배나 되는 데도 사려는 사람들이 몰리는 상황입니다. 원유 ETN과 ETF 가격이 폭등했다는 소식과 폭락했다는 소식이 번갈아 들려오지만, 수치를 보면 거품이 여전합니다. 거래 가격이 적정 가치에 비해 터무니없이 비싼데도 수요가 몰리는 건 가격이 계속 오를 거라는 믿음 때문입니다.
원유 수요 ● 반드시 오를 거란 믿음이 깨질 때

이런 믿음이 깨지면 어떻게 될까요. 유가가 전례 없이 폭락한 건 사실입니다. 하지만 지난해 수준으로 회복할 거란 보장은 없습니다. 시장이 예상하지 못한 이유로 저유가 기조가 장기화될 수도 있습니다. 더 떨어질 수도 있습니다. 유가가 회복되기 어렵다는 믿음이 확산하면, 그래서 현재 거래되고 있는 원유 파생 상품의 가격이 너무 비싸다는 공감대가 형성되면 거품은 사라지게 됩니다. 가격은 곤두박질칩니다. 누군가는 손실을 떠안게 됩니다.

전문가들은 원래 ETN과 ETF가 안정적인 상품이라고 설명합니다. 거래 가격이 적정 가치의 94%~106% 수준에서 움직이는 게 보통이라고 덧붙입니다. 하지만 버블은 시장을 가리지 않습니다. 투기가 있는 곳에 거품이 있습니다. 코로나19 사태와 유가 폭락 등이 맞물려 금융 시장은 요동치고 있습니다. 다른 시장에서도 얼마든지 비슷한 현상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국내 원유 ETN과 ETF 시장이 총 2조 원 정도 규모로 비교적 작다고는 해도, 거품이 꺼지면 개인 투자자에게는 큰 손실입니다. 작은 시장일수록 크게 요동칩니다. 판단과 책임은 모두 투자자 몫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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