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초 방위사업청은 이 4가지 핵심기술을 미국으로부터 받으려고 했습니다. 정확히 이야기하자면 방위사업청은 미국으로부터 F-35를 40대 구매하는 대가로 KF-X용 4대 핵심기술을 이전받기를 희망했습니다. 미국은 핵심기술을 줄 생각이 없었지만, 방위사업청은 참으로 오랫동안 받을 수 있다는 거짓말을 했었습니다.
2015년 9월 언론 보도로 기술 이전이 안된다는 사실이 밝혀지자 국방장관, 대통령까지 나서서 미국으로부터 기술 받을 길을 뚫으려고 애썼습니다. 미국은 요지부동이었고, 방위사업청은 그때부터 부랴부랴 4대 핵심기술 독자개발 방안을 찾아다녔습니다.
그리고 2016년 5월 국방과학연구소는 석연치 않은 과정을 거쳐 4대 핵심기술 중 최고 난이도로 악명 높은 AESA 레이더 체계개발 사업자로 한화시스템을 선정했습니다. 10년 이상 국방과학연구소와 AESA 레이더를 개발했던 기술 우위의 LIG넥스원이 떨어졌는데 심사위원들 대다수가 자격미달로 드러나서 논란이 됐습니다. 그럼에도 유야무야 넘어갔습니다.
매 고비마다 은폐가 벌어졌습니다. 한발 늦게라도 바로 잡히고 지적을 받았으니 망정이지 방위사업청과 국방과학연구소 믿고 뒷짐 지고 있었으면 KF-X 사업은 벌써 고꾸라졌을 운명이었습니다. 이제 또 새로운 고비가 다가온 것 같습니다.
국방과학연구소 주관으로 한화시스템이 AESA 레이더를 개발하는 과정이 정상적으로 보이지가 않습니다. 의혹을 제기하는 자체 감사를 스스로 부정하는 국방과학연구소라는 조직도 심상치 않습니다.
● 초과 제안하고도 무사통과
SBS는 최근 국방과학연구소의 <KF-X 탑재 AESA 레이더 개발사업 관련 의혹 감사 중간보고>라는 문건을 입수했습니다. AESA 레이더를 개발하는 가운데 잡음이 많다는 소식을 듣고 수소문 끝에 확보한 문건으로 국방과학연구소 감사실이 AESA 레이더 개발 과정을 자체 감사한 결과입니다.
국방과학연구소 감사 보고 1번 항목은 '규격 완화 의혹'입니다. 2건의 초과 제안과 10건의 추가 제안의 문제점을 지적한 겁니다.
무기체계 개발 사업자를 선정할 때 정부기관은 제안요청서 RFP를 내놓고 업체들은 그에 맞는 사업 제안서를 제출합니다. 정부기관은 업체들의 제안서를 평가해 사업자를 고릅니다. 업체들이 이때 높은 점수를 따기 위해 종종 쓰는 수법이 기술과 성능을 부풀리는 초과 제안과 RFP에 없는 기술을 들이미는 추가 제안입니다.
한화시스템은 이런 초과 제안을 2건, 추가 제안을 10건 했습니다. 초과 제안 2건은 AESA 레이더의 핵심 성능인 최대 추적거리와 최대 동시표적 추적수를 과도하게 높게 잡은 겁니다. 국방과학연구소의 조치는 사업비 1천300만 원 감액뿐이었습니다.
레이더 개발 전문가 A 씨는 "2018년 정찰위성 사업 때는 LIG넥스원이 초과 제안 1건 했다고 사업권을 박탈당했다", "초과 제안을 2건이나 했는데 사업비 1천300만 원 깎는데 그쳤다면 누가 뭐라고 해도 업체 특혜다"라고 목소리를 높였습니다. 국방과학연구소 감사실은 초과 제안 기술 2건뿐 아니라 추가 제안한 기술 10건 중 5건에 대한 감액, 상계 등 징벌적 조치가 미흡하다고 봤습니다.
감사 보고 2번 항목은 '빈번한 수정계약에 따른 업체 특혜 의혹'입니다. 국방과학연구소는 2016년 7월 한화시스템과 1천687억 원 규모의 AESA 개발 사업을 계약한 이래 9번이나 수정계약을 했습니다. 무기체계를 개발하다 보면 난관에 봉착할 수 있고 그럴 때는 계약을 수정할 수도 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게다가 AESA는 한국 방위산업의 전인미답 도전입니다.
하지만 무기체계를 개발하는 동안 수정계약하는 일은 극히 드문 게 현실입니다. 수정계약을 하면 감사원이 눈여겨봤다가 감사하기 때문에 국방과학연구소, 방위사업청은 수정계약을 병적으로 싫어합니다. 업체 입장에서도 감사원에게 시달리고, 수사 의뢰로 검경 조사받을 일이 두려워서 수정계약을 멀리 합니다. 그래서 작전요구성능 ROC가 강화되는 경우가 아니고는 어지간하면 수정계약은 없다고 보면 됩니다.
그런데 AESA 레이더 개발 과정에서 수정계약이 9번이나 이뤄졌고 특히 3차, 5차, 7차, 9차 수정계약 때는 사업비가 447억 원 증액됐습니다. AESA 레이더 개발 사업비는 이로써 1천687억 원에서 2천134억 원으로 26.5% 급등했습니다. 작년 12월 519억 원 규모의 신규계약도 1건 추가돼 사업비는 2천654억 원이 됐습니다. 전체적으로 사업비는 계획보다 57.2% 늘어났습니다.
레이더 개발 전문가 B 씨는 9번의 수정계약과 1번의 신규계약을 두고 "전무후무한 일"이라고 지적했습니다. "개발 중에 성능, 기술, 돈 같은 데서 문제가 생기지 않고서는 이런 일이 벌어질 수 없다"고 잘라 말했습니다.
9번 수정계약 중 가장 큰 돈인 363억 원이 들어간, 비행시험 지원 증액을 위한 5차 수정계약에 대해 국방과학연구소의 자체 감사 보고도 의문을 제기했습니다. 감사 보고는 "개발실행 계획서 등에 (수정계약으로 예산이 증액된) 비행시험이 명시되지 않았다", "(수정계약에 따른) 비용 분담의 적절성을 검토할 필요가 있다"고 적시했습니다.
국방과학연구소의 해당 팀은 "애초에 예정된 비행시험이어서 사업비를 증액했다"고 주장했지만 국방과학연구소 감사실은 "최초 계획에 없던 일"이라고 일축한 겁니다. 해당 팀 주장대로 처음부터 계획했던 일이라면 계약 단계에서 사업비를 책정했어야 했는데 안 했고, 또 그런 최초 계획 자체가 없었다는 게 국방과학연구소 감사실의 판단입니다.
● 내부 고발에는 인사 불이익
감사 보고 3번과 5번 항목은 지형추적 모드 개발 관련 내부 고발, 이에 대한 국방과학연구소의 대응과 관련된 겁니다. 국방과학연구소는 KF-X의 자동 저공 비행을 위한 지형추적 모드라는 기능을 AESA 레이더에 추가하고, 한화시스템에 개발을 맡기기로 작년 11월 결정했습니다.
그런데 국방과학연구소 AESA 레이더 체계단 개발2팀의 수석 연구원이 이의를 제기했습니다. 2016년 한화시스템이 AESA 레이더 개발사업자로 선정될 때 제안했던 지형회피 모드와, 새로 개발하겠다는 지형추적 모드가 기술적으로 거의 같다는 겁니다. 한화시스템이 기존 사업비 안에서 개발하겠다고 제안했던 기술인만큼 유사한 기술에 추가 예산 투입은 낭비라는 주장이었습니다.
직속상관인 개발2팀장 역시 수석 연구원과 같은 의견을 냈습니다. 최고 전문가들의 말이니 타당한지 검토해볼 만했지만 국방과학연구소 AESA 레이더 체계단장은 작년 12월 2일 수석 연구원에게 업무 배제라는 인사 조치를 단행했습니다. 이어 519억 원 규모의 지형추적 모드 신규계약이 체결됐고, 개발3팀장은 올 1월 체계단 전체회의 중 체계단장으로부터 교체, 보직해임 등 위협을 당했습니다.
하지만 국방과학연구소 감사실은 인사조치된 수석 연구원과 팀장의 주장처럼 지형추적 모드와 지형회피 모드는 기술적 관점에서 유사하다고 봤습니다. 감사 보고에 따르면 유럽 레오나르드사의 매뉴얼에는 "기술적인 핵심 개념은 동일 또는 유사함"으로 돼 있고, 저명한 항공레이더 기술 서적에는 "지형추적 모드는 빔을 수직 방향으로 전방 지형을 스캔하고, 지형회피 모드는 수직 방향과 함께 수평 방향으로도 전방 지형을 스캔하는데 두 모드는 유사하다"라고 기술됐습니다. 체계 성능 면에서는 차이가 있지만 기술적으로는 같다는 결론입니다.
감사 보고에 따르면 수석 연구원과 개발2팀장의 문제제기는 합당했습니다. 국방과학연구소 감사실은 두 사람의 상관인 체계단장의 행위를 직장 내 괴롭힘, 즉 갑질 행위의 소지가 다분하다고 판단했습니다. 하지만 수석연구원은 여전히 업무 배제 상태입니다.
● 자체 감사 부정하는 국방과학연구소
이와 같은 감사 보고 내용이 지난 20일 SBS 8뉴스를 통해 보도되자 국방과학연구소는 이튿날 새벽 1시쯤 국방과학연구소 감사 보고의 대부분 지적이 잘못됐다는 입장자료를 냈습니다. 자체 감사를 스스로 부정하는 기괴한 일입니다.
국방과학연구소의 입장자료는 "수정계약으로 사업비가 늘었지만 기확보한 총사업비 내에서 증액됐으니 업체 특혜가 아니다", "초과 제안된 기술은 한화시스템의 과소 계산일 뿐이었다", "추가 제안한 기술은 한화시스템이 계속 개발하고 있다"고 밝혔습니다. 또 수석 연구원을 업무 배제시킨 건 맞지만 인사상 불이익은 아니라고도 했습니다.
국방과학연구소의 입장자료를 뜯어보면 또 의문이 생깁니다. 1천억 원 가까이 사업비가 늘었는데 이미 확보한 총 사업비 내에서 해결할 수 있으니 문제될 바 없다면 국방과학연구소가 AESA 레이더 만든다며 챙긴 예산이 과도하다는 방증이 됩니다.
국방과학연구소와 한화시스템이 계약한 AESA 레이더 개발 사업비는 1천687억 원입니다. 국방과학연구소와 한화시스템이 머리 맞대고 협의한 결과 1천687억 원이면 개발할 수 있다고 합의한 겁니다. 그런데 국방과학연구소는 정부로부터 AESA 개발 총사업비로 3천658억 원을 확보해 놓고 있습니다.
한화시스템과 계약한 액수는 1천687억 원이지만 쌓아둔 총사업비가 3천658억 원이니까 2천억 원 가까운 차액을 모두 사용할 때까지는 상관하지 말라는 게 국방과학연구소의 주장입니다. 이렇게 돈을 펑펑 쓸 수 있는 사업은 21세기 한국에서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국방과학연구소는 초과 제안 기술에 대해 한화시스템의 과소 계산 탓일 뿐이라고 했는데 한화시스템은 AESA 레이더의 핵심 성능조차 제대로 계산 못하는 실력으로 AESA 레이더를 개발하는 꼴입니다. 국방과학연구소가 한화시스템의 소소한 과소 계산이라고 해명해주는 최대 추적거리, 최대 동시표적 추적수는 AESA 레이더의 존재 이유입니다. 이걸 잘못 계산했다니….
국방과학연구소는 또 수석 연구원에 대한 업무배제 조치는 인사상 불이익은 아니라고 주장했습니다. 연구원의 책상을 치워버린 건데 인사상 불이익이 아니라면 인사상 이익입니까?
엽기적이게도 국방과학연구소 감사실의 감사 보고를 국방과학연구소가 입장자료를 내서 부정하고 있습니다. 감사 보고도 국방과학연구소장을 거쳐 법률적 효력을 얻었고, 감사 보고를 부정하는 입장자료도 국방과학연구소장을 거쳐 기자들에게 배포됐습니다. 국방과학연구소장은 한 사람인데도 이렇습니다.
국방과학연구소와 한화시스템의 AESA 레이더 개발 사업도 다른 사업들과 비교하면 비정상적이고, 국방과학연구소가 움직이는 모양새도 아주 이상합니다. 총체적 난국의 전조가 아니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