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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잇] '코로나 트라우마'에 갇히지 않는 대한민국 되길

김지용 |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정신과 의사들이 참여하는 팟캐스트 <뇌부자들> 진행 중

SBS 뉴스

작성 2020.04.09 11:11 조회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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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이 불안하다는 건지 알겠어요. 그런데 대체 왜 이 정도로까지 불안해해요? 3자의 시각에서 보면 솔직히 이렇게까지 불안해할 상황은 아닌 것 같거든요.

궁금했다.
대체 무엇이 A를 이렇게까지 불안하게 만드는 것인지.


A는 서울에 거주하며 안정적인 대기업에 다니고 있었다. 결혼하고픈 기색을 내비치는 이성 친구도 있었다.

하지만 그는 모든 것이 불안했다. 회사에서 언제든 밀려날 수 있다는 생각에 필요 이상으로 남들의 업무까지 도맡아 일했고, 직장 밖에서의 시간은 자기계발에 사용했다. 친구들과 어울리는 시간에도 마음 한구석이 어딘가 모르게 불편해 즐기지 못했다. 가정은 언제든 깨질 수 있다는 생각에 결혼은 꿈도 꾸지 못했다. A의 마음속으로 좀 더 깊게 들어간 끝에 나온 이야기는 이러했다.

어린 시절 IMF 때문에 집이 무너졌어요. 부모님은 매일 싸우고, 전 방에서 울기만 하고...그때의 기억이 지금도 문득문득 생생하게 떠올라.

자주 들은 이야기였다. 진료실에서는 IMF 때 상처가 아직까지 아물지 않은 사람들을 만난다. IMF 직후 급상승한 통계 수치들이 몇 가지 있었으니, 바로 실업률, 이혼률, 자살률이다. 실직당하고 이혼한 당사자들의 고통이 글로 표현될 수 있을까.


22년이 지난 지금도 IMF 상처는 우리 일상 곳곳에 스며 있다.
그러나 그들만큼 고통스러웠지만 겉으로 티를 내지 못하고, 누구도 알아주지 못했던 이들이 바로 당시 그 가정의 어린아이들이다. 화목했던 가정이 급작스레 붕괴되어 가는 과정을 목격한 아이들의 불안과 공포. 그것의 크기는 어른들이 상상하는 것 이상이다. 꼭 이혼하지 않았더라도 그 상처는 길게 남는다. 아이들에게 가정은 세상의 전부이다. 가정의 붕괴는 곧 생존에 직결되는 일이기 때문에, 그야말로 죽음의 공포를 경험한 트라우마로 남는다. 더군다나 아직 발달하는 과정 중인 아이의 뇌는 성인에 비해 불안에 훨씬 취약하다. 이런 부분에 대해 인식하고 적절히 치료한다면 또 금세 호전될 수 있는 것이 아이의 뇌이지만, 당시 우리 사회에는 아이들까지 바라볼 여력이 없었던 것 같다.

죽음의 공포를 떠올리는 트라우마를 겪은 사람에게서 나타나는 대표적 증상이 크게 세 가지가 있다. 재경험, 과각성, 회피 행동. 그 공포스러웠던 순간들이 머릿속에서 반복 재생된다. 마치 어제 봤던 영화의 한 장면처럼 생생하게 떠오르기도 하고, 악몽을 꾸기도 한다. 그 공포를 계속 경험하고 있으니 항시 불안하고 각성되어 있을 수밖에 없다. 트라우마와 약간이라도 비슷한 상황이 되면 깜짝 놀라며 회피한다. 그렇기에 A는 분명 안정된 상황에 들어갔음에도 불구하고 경제적 위기와 사람 사이의 마찰이 계속해서 두렵다. 일어나지 않은 경제적 위기 때문에 계속해서 쉬지 못 한다. 일어나지 않은 부부 사이의 마찰을 염려하여 결혼을 하지도 못 한다.

이게 꼭 개인만의 문제일까? 아니다. IMF는 우리가 의식하지 못하는 곳에서 국민 전체의 심리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한 차례 태풍에 집이 무너진 사람은 절대 이전과 같이 마음 편하게 지낼 수 없다. 어떻게든 집을 더 튼튼하게 만들려하고, 더 안전이 보장된 곳으로 가기 위해 애쓸 수밖에 없다. 이미 삶이 붕괴된 경험을 당하거나 목격한 사람들에게 '공부 못 해도 괜찮다, 돈 보다는 하고 싶은 일 하면서 살아야 한다.'라는 말은 공염불에 지나지 않는다. 그래서인지 IMF 이후 불어 닥친 전문직 열풍은 현재 진행형이다. 언젠가 다시 찾아올 수 있는 그 위기 상황을 마음 깊은 곳에선 두려워하기에 많은 이들이 더 안정적인 전문직이 되기 위해 노력하고, 자녀에게 그 길을 권한다.

전문직 열풍 못지않은, 그보다 더 큰 것이 공무원 열풍이다. 베스트셀러 '90년생이 온다'에서는 '공무원 열풍'의 이유를 공무원 시험이 현재 유일하게 남은 공정한 기회이기 때문이라고 분석한다. 하지만 분명히 안정성의 측면도 그 못지않게 기여했다고 생각한다. IMF 급의 위기가 와도 무너지지 않을 가장 확률 높은 직업은 공무원일 테니까. 또한 IMF 직후 급강하한 결혼율은 계속해서 떨어지고 있고, 급상승한 자살률은 그 이후로도 더 올랐다. IMF 하나로 이 모든 것을 설명할 수는 없지만, 분명 그 때부터 시작되었다.

코로나 바이러스는 우리 사회에 어떤 상처를 남길까. 당장 눈에 보이고 앞으로도 예상되는 사회경제적인 타격을 넘어 수십 년 뒤의 우리 사회에까지 강한 영향을 미치지 않을까. 분명 코로나 이후의 우리 사회는 더 불안이 높아진 세상이 될 것이다. 우리가 20여 년 전에 입은 상처에서 지금까지도 완전히 회복되지 못한 것처럼.


'코로나 트라우마'에 갇히지 않도록, 준비를 해야 할 때.
우리는 이것이 반복되는 것을 막아야만 한다. 지금은 마냥 밝은 아이들이 미래에 불안 속에 살아가는 것을 막아야만 한다. 진로, 결혼, 출산 같은 인생의 중요한 선택들이 이미 불안에 의해 심히 영향 받고 있지만, 이게 더 심해지는 것을 막아야만 한다. 그러기 위해선 수많은 가정들이 무너지는 것을 막아야만 한다. 현실적으로 모두 막을 수 없더라도 그 안에서 상처받을 사람들의, 아이들의 마음을 챙겨야만 한다.

구체적으로 어떤 방법이 있을까? 솔직히 잘 모르겠다. 작은 진료실에 앉아 있는 일개 의사로서는 현재 우리나라에 이런 여력이 있는지도 잘 모르겠다. 일단 내가 보고 들은 사실들에 대한 글을 써본다. 지금 당장의 위기 극복 뿐 아니라 미래의 상처까지 대비할 수 있는 나라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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