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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잇] 찌꺼기를 믿을 뻔했다, 내가 만든 함정 때문에

김창규│입사 21년 차 직장인. 실제 경험을 녹여낸 회사 보직자 애환을 연재 중

#2 허위에서 찌꺼기까지, 보고서의 두 얼굴

한 영업담당 임원이 주관한 컨퍼런스가 끝났다. 나는 의자에 등을 기대고 긴장을 풀었다. 전화 벨이 울렸다. 대구 지사장인데 입사 동기라서 서로 편안하게 얘기하는 사이다. 전화를 받으니 그가 흥분하며 말했다.

"영업담당임원 제정신이야? 지금도 판매가 쉽지 않은 상황인데 뭐, 이익이 적은 고객은 다 정리하겠다고? 답답하다, 답답해."

"틀린 말은 없잖아. 아주 논리적이고."

"진심으로 하는 말이냐?"

"그 분 사업부로는 처음 왔잖아. 현장 경험이 없으니 그런 말을 쉽게 하는 거지. 어쩌겠어."

"현장이 이론대로 돌아가면 우리 회사 벌써 세계일류 회사 됐겠다. 선무당이 사람 잡는 격이야."


투덜투덜하는 그와 전화를 끊고 난 밀린 결재를 하기 위해 전자결재함을 열었다. '미수금 현황 및 대책'이라는 문서가 눈에 띄었다. 내용이 궁금해서 얼른 열어 보았다. 기안자가 과거와 달리 깔끔하게 보고서를 잘 만들었는데 한 대목이 잘 이해가 안 되었다. 결재할까 하다가 담당자를 불렀다.

보고서는 훌륭한데 말이지...

"이 문서 내용 중에서 A업체와 거래를 단절해야 하는 사유가 '대리점 자금 부족'이라고 했는데, 이게 무슨 말이죠?"

"이 A업체는 항상 대금을 지연 결재하는 곳입니다. 우리 회사 미수금 관리 기준으로는 거래를 할 수 없는 곳이죠. 그런데 관할 대리점장이, 그 회사 믿을 수 있는 업체이니 자신이 먼저 우리 회사 입금 기한에 맞춰 대신 결재하고 나중에 그 업체에게 받는 형식으로 해서 지금껏 거래가 유지되었습니다. 하지만 아시다시피 최근 그 대리점의 자금 사정이 나빠졌습니다. 그래서 더 이상 대신 납부를 할 수가 없게 되었고 그러면 우리회사 기준으로는 거래 단절 고객에 해당되므로 거래 종료 사유를 '대리점 자금 부족'이라고 한 것입니다."


이 설명을 듣자 궁금한 것이 더 생겼다.

"그렇다면 이 업체 재정적으로는 건실하다는 뜻이죠? 그런데 왜 매번 늦게 입금을 했죠?"

"확인한 바에 의하면 자기네 회사 결재 주기가 우리 회사와 맞지 않아서 그렇답니다."

"그러면 돈을 늦게 받을 뿐이지 못 받지는 않는다는 얘기네. 보증보험도 들었죠. 음. 좋아요, 하나 더 물읍시다. 이 업체 떨어져 나가면 그 대리점은 수익이 더 악화되는 거 맞나요?"

"예. 그렇습니다."


속으로 '어, 이건 아닌데'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약간 불만스러운 말투로 "그러면 지금 말한 그 내용을 이 문서에 어디다가 좀 더 구체적으로 기재해야 되는 거 아닌가요? 그래야 윗사람들이 올바른 판단을 하죠."라고 지적하자 그는 머뭇거리다가 "문서에는 사족 달지 말고 핵심만, 주저리 주저리 쓰지 말라고 말씀하셔서"라는 답변이 돌아왔다.

순간 머리가 띵했다. 그렇게 강조한 사람이 바로 나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앞 뒤 내용 다 잘라 버리고 간결한 문체로 보기에만 그럴듯하고 논리적인 것 같은 문서를 만들면 어떻게 하나? 하지만 그한테 화를 낼 수는 없었다. 내 가르침대로 한 것이니…… 어쩔 수없이 다시 내 의견을 전달했다.

"대리점 수익이 악화된 상태에서 단지 우리와 결재 일자가 맞지 않는다고 무조건 우량한 A업체와 거래를 단절해선 안돼요. 회사도 손해이고 대리점 수익도 더 악화되니까. 본사에 이 사정을 말하고 그 회사가 입금할 수 있는 날로 결재 마감일을 늦춰달라고 협의해 보세요."

그가 나가자 난 다시 의자에 파묻혀 마음을 진정시키며 이 해프닝에 대해 이런 저런 생각을 하다 나도 모르게 "자칫하면 내가 잘 만들어진 문서에 기재되어 있는 찌꺼기만 보고 그냥 승인할 뻔 했네."라고 중얼거렸다. 그러자 "그 책은 찌꺼기군요."라는 말을 어디선가 들은 기억이 떠올랐다. 찾아보니 장자의 천도편에 있는 얘기였다. 내용인즉슨 마당에서 일을 하고 있던 목수가 성인의 책을 읽는 군주를 보고 찌꺼기를 읽고 있다고 혼잣말을 한 사연이었다. 그 말을 들은 군주가 그렇게 말한 이유를 묻자 목수는 이치에 맞는 답변을 했는데 그 답변이 나에게는 이렇게 다가왔다.


- 신(臣)은 신의 일(목수)로 미루어 말씀드리는 겁니다만, 수레바퀴를 깎을 때 많이 깎으면 축이 헐거워서 튼튼하지 못하고 덜 깎으면 축이 들어가지 않습니다. 더도 덜도 아닌 정확하게 깎음은 손짐작으로 터득하고 마음으로 느낄 뿐 보고서로 설명할 수 없습니다. 물론 그 방법을 자세히 쓸 수는 있겠지만 할 일도 많고 검토할 것도 많은 군주께서는 항상 논리적이고 핵심만 있는 간결한 보고서만을 원합니다. 그래서 당신에게 상신되는 보고서 모두가 2+2=4가 되고 A가 B이고 B가 C이면 A는 C가 되어 버립니다. 보고서도 이와 마찬가지여서 '논리, 핵심 및 간결의 원칙'을 준수하려다 보니 일부 내용은 왜곡되고 보직자가 판단함에 있어 알아야만 하는 여러 주변 상황을 기재하지 못한 것입니다. 이런 이유로 당신이 읽고 있는 문서는 찌.꺼.기. 입니다. -


'내가 지금껏 이런 찌꺼기만 보고 판단해서 얼마나 많은 실수를 저질렀을까?'라고 생각이 미치니 등골이 오싹해졌다. 방금 전 영업담당임원이 현실을 무시하고 논리와 이론에만 치우쳐 뜬구름 잡는 지시를 한 것도 어쩌면 이런 찌꺼기 보고서를 근거로 했을 것만 같았다. 착잡했다.

내가 읽은 문서는 찌꺼기였을 뿐.

기분은 착잡해도 퇴근은 해야 한다. 차에 시동을 걸고 집으로 향했다. 번잡한 시내를 벗어나 한적한 도로에 진입하니 길이 뻥 뚫렸다. 운전 중에 한가로움을 느끼며 나를 심란하게 만든 방금 전의 일을 다시 생각해 본다.

회사 일은, 아니 더 넓게 봐서 세상 일은 산수처럼 2+2=4, A=B이고 B=C이면 A=C가 아닌 경우가 사실 더 많다. 단지 편의를 위해 회사(조직)에서는 이런 공식과 이론 그리고 카테고리에 복잡다단한 현실의 사건과 현상 및 상황을 억지로 끼워 맞출 뿐이다. 그러다 보니 잘 정리된 서면 보고서에는(혹은 구두 보고에도) 아이러니하게도 옛 성인의 글처럼 찌꺼기만 있을 수 있다. 그것만 보고 섣부르게 판단하면 현실과 전혀 동떨어진 결론을 내어 관계된 모든 사람에게 크고 작은 불편과 손해를 주게 된다. 잘못하면 회사에 큰 손실을 줄 수도 있고.

나이 들수록 조심해야 할 것이 늘어만 간다.

#인-잇 #인잇 #김창규 #결국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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