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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잇] 어느 날, 부하직원이 가짜 보고서를 만들었다

김창규│입사 21년 차 직장인. 실제 경험을 녹여낸 회사 보직자 애환을 연재 중

#1 허위에서 찌꺼기까지, 보고서의 두 얼굴

아침에 출근하면 보직자들은 대개 각종 현황들을 체크한다. 판매 및 운영 실적, 고객 불만 접수 건수, 수입금 현황 등 여러 가지가 있다. 어떻게 보면 그냥 쉽게 넘길 수 있는 사안들인데 하나하나 신경 쓰면 사실 끝도 없다. 그런데 이런 많은 현안들 중에서 꼭 고치고 싶은 업무가 있었다. 그날그날 대리점에서 현금으로 판매한 대금을 당일 회사로 입금해야 하는 '일일 수입금 업무'가 그것이다.

최근 상당수 대리점들이 입금을 지연하고 있었다. 사정을 모르는 바 아니지만 지점에서의 관리가 느슨해진 게 가장 큰 이유였기 때문에 결심을 했던 것이다. 그런데 마침 A대리점이 수입금을 상당 기간 지연 입금시켰다. 난 이 문제에 대해 해당 지점장과 담당자를 한동안 매일 강하게 질책하고 수금 독촉을 계속했다.

문제가 불거졌던 날 아침에도 난리를 쳤다. 벌써 일주일 넘게 독려했는데 수금이 안되자 '나를 무시하는 건가'라는 생각부터 '지점과 대리점 사이에 뭔가 커넥션이 있는 거 아닌가?'하는 별의별 생각이 다 들어서다. 혼이 난 그들은 얼굴이 벌게져서 나갔고 나 역시 화가 수그러들지 않아서 한동안 방에서 씩씩거렸다. 이때 사업부문장의 전화가 왔다. 판매 실적이 저조했기 때문이다. 이 부문장, 판매목표미달을 용서하지 않는다.

"판매실적이 왜 그리 떨어져? 대책은 있는 거야?"

"예. 자체 프로모션 및 홍보를 지난주에 했기 때문에 이번 주부터는 실적이 호전될 겁니다."

"실적으로 말해. 공개적으로 망신 당하지 않으려면."


부문장은 성난 목소리로 짧게 말한 뒤 전화를 끊었다. 나는 미칠 것 같았다. 경쟁업체가 이 지역에 네트워크를 보강하여 마켓쉐어 경쟁이 더 치열해진 상황이기 때문에 매출이 감소할 수밖에 없다는 예상을 몇 차례나 본사에 이미 보고했다. 그런데도 본사는 이런 상황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채 올해 판매 목표를 달성 불가능할 정도로 높게 책정했다. 설상가상으로 대리점 한 곳이 망가져 기존 매출보다 줄어들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부문장은 그 사실을 분명히 알고 있을 것임에도 '목표 미달'이라고 이렇게 닥달하다니…나는 속이 타 들어갔다. 판매팀장을 불러 내가 판매 때문에 쪼임을 받고 있음을 설명하자 그도 답답함을 토로한다.

"실적으로 말해. 망신 당하지 않으려면." 하.. 미칠 것만 같았다.

"이거 일년 내내 힘들겠습니다."

"그러게. 방법이 없을까?"

"죄송하지만 전에 보고드렸던 그 고객과의 계약 다시 추진하시죠. 그것 말고는……"

"그 고객 우리 회사 기준에 맞지 않잖아. 매출에는 엄청 도움 되지만."

"숫자를 약간 조정하면 됩니다. 이건 허위가 아닙니다. 작은 요령입니다."

"(속으로는) 어, 그건 눈속임인데…… (부문장의 성난 목소리가 귀에 울리자) 맞네. 이렇게 하면 되네.


퇴근시간이 가까워 왔다. 퇴근 전 마지막으로 수신 메일함을 확인했는데 바로 1분 전 상당 기간 밀렸던 A대리점의 수입금이 전액 징수되었다는 내용의 메일이 도착했다. 기분이 좋았다. 그러나 헤밍웨이의 소설 <노인과 바다>의 주인공, 노인이 말했듯이 좋은 것은 오래가는 법이 없다.

며칠 뒤 C대리점을 정기 순회했는데 그곳에서 관리업무를 보는 직원의 볼멘소리를 듣고 문제의 미수금 정리가 석연치 않은 일임을 알게 되었다. 직원은 이렇게 말했다.

"지점에서 하도 압박이 심해 며칠 전 밀린 일일 수입금 *****원을 다 입금했습니다. 그런데 지금까지 계속 전산상으로 저희 지점이 미입금 대리점으로 뜨는 겁니다. 이상한 건 이웃한 D대리점도 그렇다고 합니다. 지점에 문의해도 답변은 없고요. 지사장께서 확인을 해주셨으면 합니다."

느낌이 왔다. 그 직원에게는 대충 얼버무려 답변하고 사무실로 복귀하자마자 해당 지점장과 담당자를 불렀다. 결국 실토한다.

"A대리점의 장기 미입금은 당시 이런저런 이유로 입금이 불가능했습니다. 그런데 지사장께서 계속 독촉을 하니 저희들 입장에선 뭔가 조치를 취하긴 해야 했고요. 당시 C, D, F, G 대리점도 약간 밀린 미수금이 있었는데, 그 금액을 다 합치면 A대리점 미수금 금액이 딱 나왔습니다. 그래서 그 대리점들에게 받은 미수금을 모아서 일단 A대리점 미수금을 정리한 겁니다. 이런 이유로 C, D, F, G 가 낸 미수금을 전산상으로 정리하지 못한 겁니다. (그들에게는 말을 한지 않고) A대리점은 이제 자금사정이 나아져서 삼일 뒤 돈이 입금됩니다. 그러면 아무 문제없습니다."

그 답변을 듣자 미칠 것만 같았다. 만약 이 사실을 C, D, F, G 대리점이 알게 돼 문제를 제기한다면? 혹시라도 본사 감사부서에 신고한다면? 끔찍하다. 담당자가 돈을 횡령한 것은 아니어서 정말 다행이었지만 나를 감쪽같이 속이고 이렇게 처리한 것은 도저히 용서가 되지 않았다. 그러다 며칠 전 내가 “소나기는 피해야지”라고 말했던 것이 생각났다. 내 책임도 있음이 인지되자 화가 수그러졌다. 차분하지만 단호하게 행정적 필요 조치를 지시하면서 다시는 그러지 말라고 하고 돌려보냈다.

나를 감쪽 같이 속이다니... 어라..? 생각해보니 내 책임도 있었구나...

머리가 묵직한 상태에서 퇴근길에 올랐다. 차가 없는 고속도로 구간에서 운전 중 한가로운 시간에 방금 전의 일을 다시 생각해 본다. "지점장과 담당자는 왜 나한테 허위 보고를 했을까? 나는 왜 신규 고객 유치 건 관련 눈속임이 있는 분석을 근거로 본사에 거래 승인을 요청했을까? 도대체 왜 그랬을까?"

허위 보고서가 만들어지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많은 경우 목표에 대한 지나친 집착과 독려를 하는 책임자가 있는 곳에서 주로 생산된다. 이런 걸 감안하면 목표 지향적인 상급자가 보는 보고서는 종종 허위일 가능성이 있다(억지로 되는 일은 없으니 말이다). 그런데 또 다른 이유로 보고서는 허위를 넘어 '찌꺼기'에도 못 미칠 경우가 있다.

#인-잇 #인잇 #김창규 #결국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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