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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잇] 당당하게 말한 '악마의 삶', 한국사회도 도왔다

최정규 | '상식에 맞지 않는 법'과 싸우는 변호사 겸 활동가

조주빈 (사진=연합뉴스)

코로나19 소식 이외에는 특별히 읽을거리가 없어 눈길을 주지 않았던 뉴스 사회면이 요 며칠 뜨겁다. n번방 사건에 대한 소식들 때문이다. 가해자로 포토라인에 선 조주빈이 입은 옷을 판매한 업체의 주가가 폭등했다는 뉴스가 신문기사로 나올 정도다. 행정, 입법, 사법을 총망라하여 관련 있는 기관들은 모두 대책 마련에 분주하다. 행정부의 수장인 대통령은 특별수사팀을 만들라고 지시하였고, 졸업을 앞두고 한가함을 즐겼을 20대 국회도 관련법 제정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검찰과 법원은 비난의 화살을 피하지 못했다. n번방 와치맨 사건에서 3년을 구형한 검찰을 향해 비난이 쏟아졌고, 검찰은 구형까지 마친 사건에 대해 대단히 이례적으로 재판 연기를 요청하고 추가 조사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법원행정처 김인겸 차장이 국회 법사위에서 한 말 "자기는 예술작품이라고 생각하고 만들 수 있다"는 이야기가 도마에 올랐고, 지금껏 솜방망이 판결을 내렸던 과거 판결들이 다시 수면 위로 올라오고 있다. 조만간 법원은 관련 사건 양형 기준을 상향 조정하겠다는 입장을 밝힐 것이다.


행정, 입법, 사법의 모든 공권력들이 집중되는 이런 기세라면 대한민국에는 음란물과 성범죄는 소멸하고, 더 이상 조주빈과 같은 가해자는 발을 들일 수 없을 것 같다. 그래야만 한다. 그런데 과연 그럴 수 있을지에 대해 확신이 들지 않는다. 오래전부터 이 문제를 가지고 싸웠던 시민단체 활동가들의 이야기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시민단체(십대여성인권센터) 조진경 대표는 이 문제가 불거진 작년 11월 언론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사이버경찰청에 성매매 의심 업소 등을 신고해도 수사가 지지부진한 게 다반사였다. 다크웹 사건이 안 터졌다면 경각심을 젼혀 갖지 않았을 것 이라고 꼬집었다.

 

- 한겨레 2019.11.01자 <'다크웹 아니어도…10대 성착취 동영상 '채팅앱'서 버젓이 거래>


그리고 내가 아는 한 활동가 역시 미성년자가 교복을 입고 등장하는 음란물 유포자를 찾아 신고했더니 경찰이 이런 이야기를 했다고 한다.

교복을 입고 등장하는 여성이 미성년자인지 어떻게 확인할 수 있나요? 그걸 확인할 수 있는 자료를 가져와야 접수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입법, 사법, 행정. 너 나 할 것 없이 목소리를 높이는 이런 상황에 익숙하다. 과거 신안군 염전노예사건 때도 그랬다. 2014년 2월, 이 사건이 세상에 알려졌을 때 대통령이 나서서 특별수사를 지시했고, 특별수사대가 전남지방경찰청에 꾸려져 가가호호 방문하는 전수조사를 해 수십 명의 학대 피해 장애인들을 찾아내 5년 이상 노동력 착취를 한 가해자들을 구속했다. 그리고 장애인복지법이 개정되어 장애인 권익옹호기관이 만들어졌고, 학대 가해자들을 처벌하는 규정도 정비되었다. 그렇다면 그 이후 대한민국에 신안군 염전 노예 사건과 같은 장애인의 노동력을 수탈하는 사건은 사라졌을까?

중앙장애인 권익옹호기관의 발표에 따르면 2018년 상반기에만 27건의 유사 사건이 발견되었다. 그리고 그 이후에도 청주 축사 노예 사건, 청주 타이어 노예 사건, 잠실 야구장 노예 사건, 사찰 노예 사건 등 각종 노예 사건이 끊이지 않고 있다. 가족과 사회가 버린 지적 장애인들을 먹여주고, 입혀주고, 재워주었는데 왜 우리가 가해자냐는 염전주들의 항변을 배척했던 수사기관이 이제는 가해자들의 비상식적인 항변을 받아들이고 있는 어처구니없는 모습도 목격된다.

서울 노원구 소재 사찰에서 30년 넘게 주지스님으로부터 폭행을 당하며 강제노동을 당했다고 신고한 사건에서 경찰은 폭행죄는 인정되지만 강제노동에 대해서는 "울력"(일손이 모자라 무보수로 노동력을 제공해 주는 협동관행)이었다며 불기소 의견으로 송치하였다. 전남 곡성의 지적장애 여성이 성폭행과 함께 노동력도 착취당했다고 전남 장애인권익옹호기관에 고발한 사건. 이 사건에서 노동청과 검찰은 성폭력은 인정되지만 노동력 착취에 대해서 "품앗이"였다며 불기소 처리했다.

100만 명 이상의 국민청원과 대통령의 특별지시 등 비상시에는 아주 철두철미하게 작동되는 행정, 입법, 사법기능이 평상시에는 핵심 부품 빠진 기계처럼 느슨하게 작동된다면 은밀히 일어나는 성범죄, 장애인에 대한 노동력 착취는 결코 잡아낼 수 없다.


"악마의 삶을 멈춰줘서 감사하다"(="그동안 악마의 삶을 살도록 해줘서 감사하다")

그래서 우리는 n번방 사건이라는, 비상사태 아래 발각된 사람들을 겨냥한 엄격한 처벌에 대한 논의와 함께 비상시가 아닌 평상시에도 그러한 범행을 억제하고 저지할 수 있는 시스템을 이번 기회에 반드시 만들어 내야 한다. 그렇지 못한다면 우리는 또 다른 가해자가 국민 앞에서 이런 모욕적인 이야기를 하는 것을 듣고 있어야 할 것이다.

평상시에 악마의 삶을 살도록
'눈.감.아.줘.서. 감.사.하.다'는 마음을 담은 이와 같은 말을...


악마의 삶을 멈춰줘서 감사하다

 

#인-잇 #인잇 #최정규 #상식을위한투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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