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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파일] '금융소비자보호법'이 8년 만에 국회를 통과하기까지

[취재파일] '금융소비자보호법'이 8년 만에 국회를 통과하기까지
● 반대표 없이 통과한 금융소비자보호법

찬성 178표, 반대 0표, 기권 2표. 지난 5일 금융소비자보호법이 8년여 만에 국회를 통과했습니다. 이명박 정부 당시인 2011년에 처음 발의된 법안이 정권이 3번 바뀔 때까지 국회에서 오랜 기간 계류됐는데, 어떻게 반대표 없이 국회 본회의를 통과했을까요.

당초 더불어민주당과 미래통합당은 금융 관련 법안 중 인터넷은행법(이하 인뱅법)과 금융소비자보호법(이하 금소법)을 묶어서 통과시키기로 했습니다. 채이배 민생당 의원 등이 인터넷은행법이 'KT를 위한 특혜입법'이라며 강력하게 반대를 했지만, 민주당은 당초 금소법 통과를 위해 인뱅법을 내어주는 선택을 했습니다. 하지만 국회 본회의 표결에서 금소법은 무사히 통과됐지만, 인뱅법은 부결되는 이례적인 상황을 맞았습니다.

이처럼 20대 국회 마지막 기회가 될 수 있는 3월 5일 본회의에서 금융 관련법을 일괄 통과시키기로 한 합의 외에도 금소법이 통과될 수 있었던 요인이 있었습니다. 금소법 법안에 담긴 내용 자체가 첫 발의 때와는 많은 수정과 축소를 거쳤기 때문입니다. 이 글에서는 8년을 떠돌던 금융소비자보호법이 어떻게 국회를 통과할 수 있었는지, 그 과정에서 얻은 것과 잃은 것은 무엇인지 살펴보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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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회 본회의에서 부결된 '인터넷전문은행 설립 및 운영에 관한 특례법 일부개정법률안' (사진=연합뉴스)
● 발의부터 통과까지

2008년의 글로벌 경제 위기, 직접적으로는 2011년 저축은행 사태를 거치며 금융소비자보호법은 2011년 박선숙 당시 민주당 의원이 첫 발의했습니다. 하지만 이명박, 박근혜 대통령 당시에는 금융 규제를 완화하는 정부의 기조와 맞지 않아 금소법은 힘을 받지 못하고 국회에 계류하고 있었습니다.

촛불집회와 탄핵 이후 이뤄진 2017년 대통령 선거에서 문재인 후보는 금융소비자 보호를 위한 공약을 내세웁니다. 금융소비자보호법을 제정하고, 금융소비자보호를 위한 독립 기구(금융소비자보호원)를 세우겠다고 공약합니다. 또 징벌적 손해배상제와 집단소송제도 도입하겠다고 밝혔습니다. 2011년 첫 발의된 금소법에 담긴 취지를 적극 이어받아 실행에 옮기겠다고 나선 겁니다.

2017년 5월, 문재인 대통령 취임 직후 금융위원회는 금소법을 정부 입법으로 발의합니다. 하지만 2019년까지 2년 동안 금소법은 국회 정무위 법안심사소위를 통과하지 못하고 잠들어있었습니다. 2019년에는 사모펀드 사고가 연이어 터지면서 다시 금소법 제정 목소리가 힘을 받습니다. 2019년 8월에는 DLF 사태, 2019년 말부터는 라임 사태가 본격적으로 불거졌기 때문입니다. 2019년 11월에 결국 금소법은 국회 정무위를, 2020년 3월 4일에는 국회 법사위를 통과했습니다. 다음날인 3월 5일 국회 본회의를 마지막으로 통과하면서 금융소비자보호법은 8년 만에 제정됐습니다.
2017년 문재인 대통령 후보 금융부문 선거공약집

2017년 문재인 대통령 후보 금융부문 선거공약집




● 8년은 법안 축소의 과정

같은 '금융소비자보호법' 이름을 달고 있지만 2011년 첫 발의된 법안과 2020년 국회 본회의를 통과한 법안은 큰 차이가 있습니다. 법안 통과까지 8년여의 시간은 축소와 가지치기의 과정이었습니다. 2011년 박선숙 당시 민주당 의원안과 2017년 3월 최운열 민주당 의원 발의안, 2020년의 통과돼 실제 제정된 금소법을 비교해보겠습니다.

저축은행 사태 이후 금융소비자들을 보호하기 위해 발의한 2011년 박선숙 안의 핵심은 '징벌적 손해배상제', '집단소송제', '입증책임 전환', '금융감독 체계 개편' 네 가지로 볼 수 있습니다. 하나씩 살펴보면 이렇습니다.

1. 징벌적 손해배상제도 : 증권사나 은행 등 금융상품을 판매자가 고의나 과실로 소비자에게 손해를 끼치면 최대 3배까지 배상책임을 지도록 하는 내용입니다.

2. 집단소송제도 : 금융투자와 관련된 피해가 주로 소액으로, 피해가 집단으로 발생하기 때문에 다수의 피해자들이 집단소송을 제기할 수 있도록 해주는 겁니다.

3. 입증책임 전환 : 금융기관과 개인투자자 사이 '정보의 비대칭성' 때문에 필요한 부분입니다. 소송에서 금융기관이 상품을 제대로 설명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개인투자자 측이 아닌 증권사나 은행 측이 증명하도록 입증책임을 바꾸는 내용입니다. 금융상품의 경우 복잡하고 소비자가 파악하기 힘들기 때문에, 정보를 금융기관이 내어주지 않는 이상 소송에서 이를 증명해내고 승소하는 경우가 거의 없었기 때문입니다.

4. 금융감독 체계 개편 : 현재는 금융 정책을 총괄하는 금융위원회 산하에 금융감독과 금융소비자 보호 업무를 함께 하는 금융감독원이 있습니다. 그런데 금융위는 금융업 진흥을 최대 목표로 삼고 있어 규제완화를 추구하는 경향이 있고, 금융감독원 또한 감독 업무를 함께 하고 있기 때문에 이들과 독립적인 기관이 필요하다는 내용입니다. 2017년 대통령 선거에서 문재인 후보가 독립 기관인 금융소비자보호원 설립을 공약으로 내세운 바 있습니다.

20대 국회에 와서는 최운열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2017년 3월에 금소법 법안을 발의했습니다. 징벌적 손해배상과 입증책임 전환 부분이 담겼는데, 집단소송제 부분은 법무부에서 경제행위에 대한 일반적 집단소송제 도입을 검토하고 있어 법안에는 넣지 않았습니다.

금융위원회 또한 문재인 대통령 당선 직후인 2017년 5월 정부 입법으로 금소법 법안을 발의했습니다. 정부는 2019년 11월 각 법률안들을 통합 조정해 대안을 제안했습니다. 이 정부안에는 징벌적 손해배상과 집단소송제, 금융감독 체계 개편에 관한 내용은 담겨있지 않았습니다. 앞서 언급한 주요 4가지 요소들 중에서 입증책임 전환 부분만 담긴 겁니다.

결국 올해 3월 5일 국회를 통과한 금융소비자보호법 제정안에는 발의 당시 핵심인 4가지 중 3가지가 빠졌고, 입증 책임전환 부분도 축소됐습니다. 당초 정부 발의안에는 적합성 원칙, 적정성 원칙, 설명의무를 위반하는 경우 입증 책임이 금융기관에 있도록 했었는데 법안 심사 과정에서 적합성, 적정성 원칙 위반은 빠지고 금융기관이 투자자에게 설명의무를 위반했을 경우만 입증 책임 전환이 이뤄지게 됐습니다. 3배까지 금융기관이 배상책임이 있던 징벌적 손해배상제도는 빠지고 '징벌적 과징금'이라는 이름으로 규제 방안이 마련됐습니다. 하지만 '징벌적'이라는 명칭과 달리 고의나 과실이 발견되도 금융기관이 벌어들인 수입의 최대 50%까지만 과징금을 부과할 수 있어 처벌 효과에 의문이 제기되고 있습니다.

2011년부터 8년여 동안 저축은행 사태, 동양 사태, DLF 등 사모펀드 사태 등 금융상품 관련 대규모 피해 사례들이 나타났지만 금소법은 당초 발의했던 굵직한 핵심 요소는 사라지고, 세세한 규제 방안들만 남았습니다.

● 여당보다 야당에 가까운 정부?

금소법은 왜 국회에서 이처럼 축소됐을까요. 지난 국회 정무위 법안심사소위에서 일어난 회의록을 살펴봤습니다.

가장 강력한 반대자는 미래통합당 김진태 의원이었습니다.
김진태 미래통합당 의원
(2019.10.24. 국회 정무위 법안심사1소위 회의록)
김진태 미래통합당 의원
"법을 공부한 사람이면 징벌적 손해배상 하면 본능적으로 이게 좋아할 수가 없는 겁니다. 일반 국민들은 속이 시원할지 모르지만 법체계라는 게 있는 겁니다. 우리나라는 민․형사가 아주 구별이 돼 있고 엄격한 손해를 입은 범위 내에서만 하게 민법이 그렇게 돼 있습니다. 요새 DLF 사태, DLF 사태 많이 하니까 이런 것 좀 확 도입해 가지고 속 시원하게 해 줬으면 좋겠지만 그러면서 알게 모르게 우리의 법체계는 자꾸자꾸 꼬여가는 겁니다."

"집단소송제, 더 큰 문제입니다. '그냥 소송에 참가하지 않은 사람들도 이참에 편하게 다 혜택을 주자' 이것은 우리 소송법 원칙에 반하는 겁니다. 그러면 정말 소송에 참여하고 싶지 않은 사람에게까지 그 효과가 바로 미치는 것이거든요. '나는 참여하고 싶지 않아요' 왜?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을 수가 있어요. 그러다가 그 소송에 지면 다 책임질 겁니까?"

"입증책임을 바꾸는 문제 이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이것은 기본적으로 원고가 입증하는 겁니다. '입증하기가 힘드니까 이것 한번 바꿔 보자', 그러면 피고는 없는 사실을 입증해야 돼요. 소극적인 사실을 어떻게 입증합니까? 내가 잘못한 것을 입증해야지 잘했다는 것을 어떻게 입증해요? 이 계약을 시작할 때부터 끝날 때까지 모든 것을 내가 다 잘했다는 것을 입증하라는 얘기인데 이것은 소송법 원칙에 너무 벗어납니다. 그래서 저는 그 세 가지에 대해서는 일단 아주 반대 의견입니다."


금융위원회는 민주당보다는 오히려 야당 쪽에 가까운 입장을 보였습니다. 금융위 관계자는 '금융회사의 부담'과 '부작용'을 계속 강조했습니다.

(2019.10.24. 국회 정무위 법안심사1소위 회의록)
김진태 미래통합당 의원
"징벌적 손해배상 또 입증책임 전환, 집단소송제. 그러면 이게 이제 어떻게 되는 건가요? (민주당) 의원 안에는 다 들어가 있는 건데 정부에서는 그것을 빼도 되겠다 이런 뜻이지요, 지금?"
손병두 금융위원회 부위원장 "예."
김진태 미래통합당 의원 "그렇지요. 그러면 제 의견은 그 세 가지에 대해서 다 부정적인 입장입니다."

손병두 금융위원회 부위원장
"이 법(금융소비자보호법)이 당장 있는 게 좋냐 없는 게 좋냐, 두 가지를 저희에게 물으신다면 불완전한 법이라도 당장 제정하는 것이 맞다는 생각입니다. 그래서 여러 가지 위원님들의 다양한 의견이 그동안 있었고요. 그래서 오늘 많이 쟁점을 좁혔고, 지금 제기해 주신 징벌적 손해배상, 입증책임 전환, 집단소송 이런 부분에 있어서도 저희가 드린 대안이 상당히 양자의 의견을 절충한 부분이다 이런 말씀을 드리고 싶고요."

"징벌적 손해배상은 아까 법체계 문제를 말씀하셨습니다. 김진태 위원님 말씀하신 대로 이게 기본적으로 영미법적 발상입니다. 대륙법 국가에서는 일반적으로 인정하지 않고 있습니다. ... 업계의 부담이 크다는 점을 저희가 감안을 해서 금융소비자 보호까지는 도입을 안 하더라도 이 안에 이미 포함이 되어 있는 징벌적 과징금, 위법계약해지권, 청약철회권, 판매제한명령 등으로써 유사한 소비자 보호 문제를 거행할 수 있을 걸로 생각하기 때문에 저희가 드린 의견대로 굳이 징벌적 손해배상을, 논란이 있는 걸 이번에 반영을 안 하더라도 충분한 소비자 보호 효과를 저희가 거둘 수 있다는 그런 저희 입장을 말씀드리고."

"입증책임 전환도 저희가 여기 집어넣었습니다. 그런데 입증책임 전환에 대한 대상을 무엇으로 할 것이냐? 굉장히 폭넓은 법부터 좁은 법까지 있습니다. 그런데 말씀해 주신 것처럼 일반 소비자가 정보나 전문성에 상대적으로 열위에 있기 때문에 이게 필요는 한데 금융회사가 갖는 부담도 저희가 고려를 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최소한으로 도입하자는 것이 저희 정부의 입장입니다."

"김병욱 위원(민주당 의원)님 제기해 주신 판매수수료 고지의무, 소비자 보호를 위해서 충분히 필요한 부분이라고 생각을 합니다만 저희가 부작용을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을 것 같습니다. 수수료 고지로 인해서 상품에 대한 고객의 리베이트 요구가 확산될 우려가 있다는 현실적인 고민이 있습니다. 그래서 저희가 도입에 좀 신중하자는.."


민주당 의원들은 발의안을 관철하려 했지만, 양보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2019.10.24. 국회 정무위 법안심사1소위 회의록)
최운열 더불어민주당 의원
"법률전문가 대가(김진태 미래통합당 의원) 앞에서 이런 말씀 드려서 대단히 죄송합니다만 징벌적 손해배상의 경우에는 조금 전향적으로 검토할 때가 됐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CES 박람회에 갔다 오면서 미국 기업들을 방문했는데 그분들 얘기가 한국은 건별 규제를 하고 그 대신 손해배상에 대해서는 너무나 미미하다고. 그래서 선진국형 규제라는 것은 포괄주의적인 형태를 취하면서 강력한 징벌적 손해배상을 부과한다고 그러더라고요. 우리나라의 경우에 정치권에서는 사건만 나면 그 사건이 재발하지 않도록 법을 하나 만들되 거기다 또 징벌적 손해배상을 붙이니까 기업이 감당할 수가 없거든요. 그러니까 선진국형 규제체계로 자유는 한없이 주되 거기 자유에 대한 책임을 묻는 것이 바람직하다, 그래서 포괄주의적인 규제체계로 가면서 징벌적 손해배상을 도입하는 것이 궁극적인 문제 해결이다 이런 생각이 많이 들었습니다."

이학영 더불어민주당 의원
"저는 규제는 풀고 책임은 강하게 하는 데 동의를 합니다. 그런데 그동안 규제의 중요성을 끊임없이 이야기했던 것은 현실이 그렇지가 않아요. 규제는 풀고 책임도 안 지는 겁니다, 힘이 강한 그룹들은. 그래서 규제는 자유롭게 풀고 얼마든지 사업을 자유롭게 하되 스스로 책임을 질 만큼 무겁게 책임의 부과 기준을 만들어야 된다 해서 아까 우리가 징벌적 손해배상제랄지 집단소송제랄지 사후적 책임을 묻는 제도를 강화하자는 겁니다. 그런데 금융소비자보호법 중요하지요. DLF 사태 날 때 여야가 너나없이 책임을 물었습니다, 금융 당국에게. 어떻게 했길래 이 사태가 났느냐? 그런데 이제 와서 책임질 조항들을 차도 떼고 포도 떼고 다 떼 버리면, 아예 입증책임마저 못 하면 금소법 만들어서 도대체 얻다 쓰자는 거지요? 정부가 물러서도 너무 물러섰다 그렇게 생각하고요."


결국 타협을 통해 핵심 요소들은 삭제되고, 입증책임 전환 부분도 축소됐습니다.

(2019.11.25. 국회 정무위 전체회의 회의록)
손병두 금융위원회 부위원장
"지난번에 빼기로 한 것은 적합성․적정성․설명의무 중에 설명의무만 남기고 적합성․적정성은 뺀 것이고요. 그것이 위원님들이 제안한 여러 가지 법안 중에 가장 입증책임 전환의 범위를 축소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렇게 결정을 내려 주신 것이고, 고의․과실의 입증책임 전환입니다."

민병두 국회 정무위원장
"박선숙 의원, 박용진 의원, 최운열 의원, 이종걸 의원, 민병두 의원이 각각 대표발의하고 정부가 제출한 이상 11건의 금융소비자 보호 관련 법률안은 각각 본회의에 부의하지 아니하고 소위원회에서 심사보고한 대로 이들 법안의 내용을 통합 조정한 의사일정 제29항 금융소비자 보호에 관한 법률안(대안)을 우리 위원회안으로 제안하고자 하는데 이의 없으십니까? (예) 각각 가결되었음을 선포합니다."

은성수 금융위원장
"이번에 위원님께서 의결해 주신 금융소비자 보호에 관한 법률은 2011년에 발의된 이후 8년 만에 제정된 법률로서 소비자의 권리를 보다 두텁게 보호하고 부당한 피해 발생을 방지할 수 있게 함으로써 금융소비자에 대한 보호 수준을 한 단계 향상시킬 것으로 기대합니다. 다만 법안 논의 과정에서 입증책임 전환 범위에 적정성과 적합성이 포함되지 않은 부분에 대해서는 저희가 아쉽게 생각합니다만 위원님들의 초당적 협력으로 중요한 입법정책적 결단을 내려 주신 것을 존중하고 감사드립니다."


● 작은 성과, 큰 과제

징벌적 손배배상, 집단소송제도, 입증책임 전환. 이런 제도는 꼭 금융 부문만의 이슈는 아닙니다. 김진태 의원이 지적했듯 소송법의 대원칙 문제이기도 합니다. 기업과 개인의 소송, 특히 금융이나 의료처럼 복잡하고 전문적인 분야의 경우 '기울어진 운동장'이 있습니다. 정보를 모두 가지고 있고 전문성을 갖춘 기업과 담당 기관을 시민 개인이 소송을 통해 이기는 건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많은 의료사고 소송, 금융상품 소송, 가습기 살균제 소송 등에서 피해자들이 패소해 온 이유에는 구조적인 문제가 있습니다.

처벌과 규제가 무조건적인 선은 아닙니다. 특히 경제 분야에서는 규제 강화로 금융기관들이 위축되면 오히려 투자가 활발하게 이뤄지지 않는다는 주장도 많습니다. 금융위원회가 금소법 통과 과정에서 여당인 민주당 의원들보다 오히려 야당인 보수 정당에 가까운 모습을 보인 것도 이 때문일 겁니다. 하지만 기본적인 규제는 풀어주되 위법적인 부분을 사후적으로 일벌백계해야 건전한 운영 시스템 가능합니다. 금융상품 관련 불완전판매 소송을 여러 차례 진행해 온 법무법인 우리 김정철 변호사는 논문(<자본시장법상 금융투자상품의 투자자보호를 위한 제도에 관한 연구(2014)>에서 금융업이 가장 발전한 미국보다 한국의 규제가 크게 부족하다고 평가했습니다. 미국의 경우 '금융기관의 조사의무'를 강조해 투자자보호의 관점에서 금융기관에 법적 책임을 묻는데, 한국은 '투자자의 자기책임 원칙'을 더 강조한다는 겁니다. DLF 사태 이후 은성수 금융위원장의 "공짜 점심은 없다"는 발언이 개인 투자자들이 스스로 본인의 투자 책임을 져야 한다는 금융당국의 태도를 대표적으로 보여주는 사례입니다.

수익률과 이익을 최대한으로 추구하고, 사고가 터져도 책임지지 않는 금융기관들의 천국이 있다면 개인 투자자들에게는 지옥일 겁니다. 징벌적 손해배상제, 집단소송제, 입증책임 전환. 당초 발의 당시 금소법의 핵심 세 가지는 금융업 종사자의 이익이 아니라 개인 소비자를 위해서 좋은 금융 시스템을 만들자는 취지에서 나왔습니다. 핵심 요소들은 끝내 통과된 법안에는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독립적인 금융소비자보호원을 만들자는 이야기도 추진되지 못했고, 금융감독원 내 금융소비자보호처를 확대 개편하는 정도로 그쳤습니다. 오히려 남부지방검찰청의 증권범죄합동수사단이 해체되면서 금융소비자를 위해 금융기관의 책임을 입증해줄 기관은 줄어든 상태입니다.

다수 시민을 위해 옳은 방향이라고 하더라도 그 법안이 항상 통과되지는 않습니다. 법안이 통과하려면 그만큼의 표와 지지가 필요합니다. 반대하는 상대방과 타협을 통해 내어줘야 하는 부분도 존재합니다. 절망적인 대규모 피해 사례가 아이러니하게 제도 개선의 모멘텀을 가져오기도 했습니다. 지난 3월 5일 본회의에서 통과가 되지 않았다면 금소법은 20대 국회에서 또다시 계류되다 폐기되는 운명을 맞았을 겁니다. 굵직한 요소들을 빼서라도 제정할 수밖에 없었던 미완의 법안. 뼈대는 갖췄지만 살을 내어준 금융소비자보호법은 그렇게 국회를 통과했습니다. 이제 살을 덧붙여 나가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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