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잇] 코로나 전쟁, 대한민국이 얻을 큰 교훈

김지용 |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정신과 의사들이 참여하는 팟캐스트 <뇌부자들> 진행 중

SBS 뉴스

작성 2020.03.03 11:02 수정 2020.03.03 11:06 조회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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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진료실에서는 마스크를 쓴 상대방에게 어색함을 느끼며, 불안과 분노의 감정들을 나누는 일이 잦다. 모두가 불안하다. 여러 회사원 분들이 임시로 삭감된 월급에, 자영업자들은 생존 자체의 위협에 잠 못 이룬다. 병원 근처 확진자 소식에 두려워, 감기몸살 증세로 혹시 병원에 폐를 끼칠까 못 오시는 분들도 많다.

많은 이들이 또한 분노한다. 분노의 대상은 다양하다. 처음엔 중국, 그다음은 정부, 그리고 신천지, 이제는 일상 자체에 대한 분노를 표출한다. 갑작스럽고 기약 없는 어린이집 휴원과 개학 연기에 곤혹스러운 맞벌이 부모들, 마스크를 구하지 못해 마트를 전전하는 사람들의 분노. 남은 마스크 수량을 확인하며 외출 여부를 결정하는 것은 마치 화성에 낙오된 우주인의 삶과 비슷한 느낌마저 들 정도이다. 이렇게 모든 사람들이 동시에 이 정도의 불안과 분노에 빠진 상황을 내가 본 적이 있었던가. 마치 큰 질병을 진단받은 한 거대한 생명체의 심리 반응을 보는 것 같다.

이른 아침부터 시민들이 마스크 구매를 위해 길게 줄을 선 모습. (사진은 연합뉴스)
과거 퀴블러 로스라는 정신과 의사가 임박한 죽음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의 공통적인 심리 단계를 발견했다. 그들 대다수가 부정, 분노, 타협, 우울, 수용의 5가지 심리를 순차적으로 경험한다. 물론 개인차가 있어 어떤 이는 앞의 단계들을 건너뛰어 빠르게 현실을 수용하고 지금 할 수 있는 것들에 집중하는 반면, 어떤 이들은 마지막까지 첫 단계에 머무르기도 한다. 암 진단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치료를 거부하거나 사이비 치료만 받다 세상을 떠나는 안타까운 사람들이 그래서 많다. 그리고 이 심리 단계는 꼭 죽음 앞에서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다. 이별, 실직, 배신 등 충격적인 사건 후엔 누구나 경험할 수 있다. 그렇다면 지금처럼 국가 단위의 전염병을 경험할 때, 사람들의 심리는 각 단계에서 어떻게 드러날까.

알베르 카뮈의 소설 <페스트>에는 평온하던 도시가 한순간 전염병으로 어떻게 무너지는지, 그 속의 여러 사람들이 어떤 심리로 어떤 행동들을 하는지 잘 보여준다. 소설 속 오랑 시와 오늘날의 대한민국, 다른 시공간 속의 사람들이지만 그 심리는 놀랍도록 비슷하다. 첫 번째 부정의 단계부터 그렇다. 전염병의 파급력을 조기에 예측한 의사들, 그럴 가능성은 낮다며 쉽게 받아들이지 못하는 행정 책임자들.


재앙이란 인간의 척도로 잴 수 없는 것이어서 사람들은 그것을 비현실적인 것, 즉 곧 사라지고 말 악몽으로 여긴다. 하지만 재앙은 사라지지 않으며 반복되는 악몽 속에서 사라지는 것은 바로 사람들인데, 그 선두에 인간주의자들이 서 있다. 왜냐하면 그들은 재앙에 주의하지 않기 때문이다.  -중략-  그들은 그저 아직 모든 것이 자기들에게는 가능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해서 재앙이 발생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전제하고 있었던 것이다.
 
- 소설 <페스트> 中에서 -

중세시대 유럽 인구 1/4 목숨을 앗아갔던 '흑사병' (사진은 게티이미지 코리아)
소설 속과 현실의 집권자들은 모두 똑같이 재난 앞에서 겸손하지 못했다. 일상이 흔들리는 것을 두려워한 나머지, 일상을 송두리째 무너뜨릴 수 있는 질병의 무서움을 경고하는 전문가들의 조언을 부정해버렸다. 가벼운 질환이라는, 마스크를 대체 왜 쓰냐는, 곧 종식될 것이라는, 겨울이라 모기가 없다는 발언들. 몇십년 전도 아니고 동시간대 바로 옆 나라의 수많은 사람들이 쓰러져가는 것을 목격하면서도 그렇게 희망찬 말을 할 수 있던 것은 현실을 부정했기 때문이다. 바라보아야 했을 현실적 가능성들을 애써 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지금 가장 다수의 사람들이 겪고 있는 심리 단계는 분노일 것이다. 나 역시 분노를 느낄 때가 많다. 병원에서조차 사용할 마스크를 구하기 힘들고 문의하는 곳마다 재고가 없는 실정이다. 이는 개인의원들만의 문제가 아니다. 대학 병원에 근무하는 친구들도 실정이 비슷하다고 한다. 며칠 전 의사협회 온라인 장터에서 정해진 시간에 선착순으로 신청한 의사들에게 마스크 50개씩을 판매했다. 전날부터 사이트가 마비되어, 미처 가입하지 못한 난 구매에 당연히 실패했고, 다행히 신청은 할 수 있었던 동료의 결과도 역시나 탈락이었다. 진료용 마스크를 구하기 위해 진료를 멈추고 광클을 해야 하는 지금 여기가 2020년의 대한민국이 맞는지.

그리고 이런 분노는 아직까지 부정의 단계에 머물러 있는 사람들에 의해 더 자극받는다. 현실을 외면하기 위해 더욱더 애써 노력하고 있는 그들은, 자신들의 믿음을 지키기 위해 현실을 이야기하는 사람들을 공격한다. 지금의 상황을 예견하며 목소리를 냈던 전문가들을 나라가 망하길 원하는 정치 세력이라며 공격하고, 의사들에게도 마스크가 충분치 않은 현실을 가짜 뉴스라며 공격한다.

분노 이후의 심리 단계에서 나타나는 모습들 역시 소설 <페스트>에 잘 묘사돼 있다. 신에게 용서를 구하며 타협을 하고, 결국 피해갈 수 없는 현실의 잔혹함 앞에 우울해진다. 지금의 현실을 우리보다 한 달 먼저 경험한 중국의 뉴스에서도 우울 단계 속 사람들의 소식을 전해 듣는다. 가족에게 전염시킬까 봐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그 사람은 필경 우울의 단계 속에 있었을 것이다.

아직 우리나라는 분명 타협과 우울의 단계에 들어서진 않았다. 그리고 그 과정을 꼭 거쳐갈 필요도 없다. 마지막 단계로 바로 넘어갈 수 있다면 더 좋을 것이다. 수용의 심리 단계로 전염병 속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은 어떤 모습일까. 이길 수 없는 상대라며 바로 포기하는 것이 올바른 수용의 자세는 아닐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여태까지 모든 전염병을 결국엔 이겨왔으니까.

코로나19 방역 소독 (사진=게티이미지 코리아)우리는 모든 전염병을 결국엔 이겨왔으니까. (사진은 게티이미지 코리아)
현재의 거대한 재난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그럼에도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올바른 일들을 하는 것.  

페스트와의 최전선에서 맞서 싸웠던 의사 리외 씨와 조력자들. 대구로 자원해서 떠난, 그리고 그곳을 지키고 있는 의료진들이 그 표본이다. 우리 모두가 그들처럼 최전선에서 싸울 순 없지만, 뒤에서 도울 수 있다. 3월 첫 한 주 간을 폭설이 쏟아진 시기처럼 집안에서 보내자는 캠페인에 동참하는 것 역시 지금 내 자리에서 코로나와의 싸움에 동참하는 방법일 것이다.

페스트의 종식을 알리던 날, 리외는 그 동안의 일들과 함께 했던 이들의 모습들을 기록하기 시작한다.

재앙의 한복판에서 배우는 것, 즉 인간에게는 경멸해야 할 것보다 찬양해야 할 것이 더 많다는 것만큼은 말하기 위해서 

- 소설 <페스트> 中에서 -
 
 
이 코로나와의 전쟁이 끝난 후 우리에게 서로를 찬양할 기억이 더 많이 남아있을 수 있다면, 우리 사회가 재난 속에서도 잃은 것만 있지는 않을 것이다.

#인-잇 #인잇 #김지용 #정신의방

인잇 시즌 2 엔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