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잇] 당신이 존경하는 그 사람, 믿을 수 있습니까

장재열|비영리단체 청춘상담소 '좀놀아본언니들'을 운영 중인 상담가 겸 작가

SBS 뉴스

작성 2020.02.16 11:29 조회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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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오랜 연애가 끝났습니다. 나이가 들어도 힘든 건 똑같더군요. '이별 당일에도 괜찮은 척 출근하고 업무를 할 수 있다'는 것만 좀 달라졌을 뿐, 감정의 롤러코스터는 스무살 때나 지금이나 크게 다르지도 않더군요. 울다가 웃다가 뭔가 허하다가, 더 야무지게 잘 살아보겠다고 다짐을 하기도 하지요. 이별하면 다들 유독 철학자가 된다고 했던가요. 평소엔 일 년에 한 번도 안 가던 도서관으로 향했습니다.

'그러고 보니 이 도서관은 꼭 이별할 때만 왔었네.' 5년 전, 9년 전, 12년 전... 올 때마다 항상 같은 책 한 권을 읽곤 했습니다. 제일 위로가 되는 책이었거든요. 이번에도 역시, 발걸음이 정확히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정문에서 들어가면, 3층 자유열람실, 분류번호는 182.2번. 국내도서 철학 코너. 책을 딱 집어 들려는 순간 '아, 맞다!' 하며 내려놓았습니다. 이제는 못 읽겠구나. 아니, 도무지 읽을 수가 없었습니다. 작년 여름, 그 책의 저자인 모 정신과 의사가 성폭력 가해자로 지목되어 경찰 조사를 받고, 심지어 자기 환자를 성폭행한 의혹까지 불거져 버렸거든요.

참 오랜 시간동안, 이별 한 내 마음에 후시딘이 되어준 문장들. 그것을 엮어낸 사람. 사랑이라는 것의 귀함을 말하던 사람. 그 이면엔 성폭력 분쟁...

난 이런 사람의 책을 보며 십수년간 마음의 지지대 삼아온거야?

배신감과 함께 묘한 허무감이 들었습니다. 속은 마음도 들었고요.


그러고 보면 최근에도 비슷한 일들이 많았습니다. 모 정당의 청년 영입 인재는 데이트 폭력 의혹으로 결국 사퇴를 했지요. 선한 느낌의 사람이라고 생각했기에, 낱낱이 파헤쳐진 뉴스는 더욱 당혹스러웠습니다. 아마 20여 년 전, 그와 어머니를 TV에서 보며 눈물로 응원했던 국민들이라면 비슷한 마음이었겠지요. 또 지난 몇 년간 미디어를 통해 청년들에게 큰 화제였던 소위 '청년 멘토'들은 사기, 표절, 폭행, 욕설 등으로 연일 뉴스에 오르내리며 사라져갔습니다.

여러분도 사회생활을 하면 할수록 '이 사람은 좋은 사람이야!' 라는 확신을 갖기가 어려워지지 않나요? '그 사람 큰일 할 사람 같더라구요.'라는 말도 함부로 하는 거 아니란 생각이 들고요. 사람은 원래 다면적이라고 생각하지만, 그 다면성의 간극이 병적으로 큰 사람들이 점점 더 많이 보이고, 또 그런 이들이 많은 권한을 갖거나, 주목을 받는 세상이 되어가는 건 아닐까 싶기도 하지요.

여러 매체에서 여러 날에 걸쳐 했던 인터뷰가 우연히 몰려서 편성되었는지, 최근 몇일 연속으로 제 인터뷰 기사가 TV뉴스와 포털사이트에 줄지어 나왔더랬습니다. 이런 일이 가끔 있고 나면 며칠간은 청년들로부터 장문의 메일이 오곤 합니다. 참 감사한 일이었지요.

하지만 항상 그중에 일부는 반갑기보단 걱정스러운 편지들이 있어요. 저를 삶의 롤모델로 삼고 싶다는 편지들이었지요. 조심스레 반대하는 답장을 보냈습니다.

그러지 말았으면 좋겠어요. 제가 정말 좋은 사람인지는 인터뷰와 강연 몇 개로는 모를 일이잖아요. 타인을 너무 쉽게 존경하지 않았으면 해요.

우리는 살아가면서 수많은 고민을 마주합니다. 한고비 넘었나 싶으면 또 고비. 아니, 에베레스트가 우리를 막아서지요. 어느 쪽을 선택할지 모를 때, 어딜 가도 막막할 것만 같을 때 우리는 상담을 가장한 '대리 결정'의 유혹에 빠지곤 합니다. 나보다 더 뛰어난 누가 내 삶 결정을 내려주면 차라리 속 시원하겠다 싶은 거죠. 나이가 어리거나, 사회적으로 고립되어 있어 스스로의 판단 근거(사회적 경험이나 배경지식, 네트워크 등)가 부족할수록 더 그런 경향을 띕니다. 그럴 때마다 가장 쉽게 취사 선택하는 것 중 하나가 '멘토 찾기'이지요. 유명한 작가, 기업가, 사회 명사 등 에게 지혜나 답을 구하는 방법입니다. 그러다 보면 어느새 과도하게 존경하게 되고, 본받고 싶어지고, 닮고 싶어 하게 되지요.

사실 그 자체는 크게 나쁠 것이 없습니다. 인생이 흔들릴 때, 누군가의 말을 듣고 배우고, 존경하게 되는 것이 뭐가 나쁘겠습니까. 다만 그 '누군가'가 어떻게 만들어지느냐가 문제겠지요. 미디어가 발전하지 않았던 예전 시대엔 오랜 경험과 업적, 평판이 마치 퇴적물 쌓여 큰 산을 이루듯 천천히 쌓여 존경의 대상이 만들어졌다면, 지금은 마치 3d프린터로 찍어내듯 너무 짧은 시간에 존경의 대상이 만들어집니다. 충분히 검증되지 않은 채 말이지요. 구독자와 팔로워 수가 명예가 되고, 방송 미디어의 출연 경력이 권위가 되어버리는 시대. 몇 년의 빌드업이면 충분히 '존경의 대상'으로 급변신 할 수 있는 시대.

그 물살을 타고 본인이 메시아가 되어, 선한 영향력을 끼치려는 욕망에 사로잡힌 사람이 많아 보입니다. 나로 인해 세상이 나아지는 것. 그 자체는 나쁘지 않지만, 문제는 '자기 성찰'이 충분했느냐는 거지요. 자신의 인품과 덕망, 그릇을 매 순간 점검하지 않으면, 상술한 정신과 의사처럼, 영입 인재처럼, 멘토들처럼 순식간에 몰락하지요. 자신만 몰락하면 다행인데, 문제는 수많은 지지자들에게 더 큰 피해를 입힌다는 겁니다. 자신이 믿어오고 존경해오던 사람의 실체가 추악한 것으로 밝혀졌을 때, 그 충격은 그간의 존경에 비례할 겁니다. 누군가는 언팔로우로 그치겠지만, 또 다른 누군가에겐 PTSD(외상후 스트레스 장애)에 준하는 트라우마가 될 수도 있는 거지요.

타인을 너무 쉽게 존경하지 않았으면 해요.지금 당신은 누구를 존경하고 있습니까?
그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세상은 좁은데, '큰 사람'되길 바라는 사람은 너무 많은 시대. 진짜 거장보다는 인스턴트 멘토가 사랑받는 시대. 응원과 존경이 너무 가벼워진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지 않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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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잇 시즌 2 엔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