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잇] 1순위 지명 처음 받은 날, 나는 울어버렸다

양희연 | 전 여자농구 국가대표. 숙명여대 대학원 스포츠심리학 박사

SBS 뉴스

작성 2020.02.14 11:03 수정 2020.02.14 11:28 조회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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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우리는 무언가를 시작할 때 '처음'이라는 단어에 설레고 열정과 의욕이 생긴다. 그와 동시에 내가 잘 할 수 있을까 하는 '두려움'의 감정도 떠오른다. 그렇다. 모든 일을 '처음' 시작할 때는 설렘과 두려움이 공존하는 법. 처음 '인-잇'에서 글쓰기 제안이 들어왔을 때 꼭 그랬다. 잘 할 수 있을 것도 같고, 잘 할 수 있을까 걱정도 되고, 어떤 주제로 이야기를 풀어가야 하나, 스스로에게 수도 없이 질문을 던졌다.

# 첫 번째_시련_스카우트 파동

'농구대잔치'는 1983년부터 시작된 대한농구협회(KBA) 주관의 '국내 최대 규모' 농구 대회였다. '허·동·택'이라 불렸던 허재, 강동희, 김유택. 그리고 '아시아의 꽃' 전주원, 정은순, 유영주 등 무수히 많은 스타들이 탄생한 곳, 그리고 모든 농구선수들의 꿈의 무대가 바로 '농구대잔치'였다.

(* 1983년 대회 창설 당시에는 '점보 시리즈'로 불렸고, 1년 뒤 1984년부터 '농구대잔치'로 이름이 바뀌었다.)

농구공 (사진=픽사베이)
오늘날 프로와 달리 농구대잔치 시절은 자유 계약 제도로 선수들을 스카우트했고, 여자팀은 남자팀과 다르게 고등학교 졸업 후 바로 실업팀으로 가는 시스템이었다. 유망 선수는 고등학교 1학년이면 눈에 띄고 2학년이 되면 팀이 정해지는 경우도 있었다. 나 또한 어떤 팀에서, 어떤 선수와 함께 뛸지 부푼 상상을 하며 꿈을 키워나갔다.

1993년 고등학교 2학년, 로망으로 삼고 있던 팀에서 우선순위로 센터를 뽑는다고 했다. 1순위든 2순위든, 순위 같은 건 내게 중요하지 않았다. 그 팀에 가고 싶었고, 우상이었던 그 선수와 함께 경기를 뛰고 싶은 마음이 더 컸다.

어느덧 1년이 지나 고등학교 3학년. 1994년 3월 초 그날을 나는 아직도 잊지 못한다. 기다리고 기다리던 1순위 발표날 학교 경비실로 뛰어가 신문을 펼쳤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나를 만난 적도 없고, 연습 게임조차 한 번 안 뛰었던 팀에서 나를 1순위로 지명한 것이 아닌가.

그 자리에서 머릿속이 하얘지면서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고, 주저앉아 눈물만 흘렸다. 나에게 처음으로 '스카우트 파동'이라는 시련이 다가온 날이었다.

부모님은 급하게 학교로 달려오셨고, 감독님과 코치님은 수습을 위해 이리저리 뛰어다녔다. 눈물만 계속 흘렀고, 내 인생은 끝났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농구공을 더 이상 잡을 수가 없었다.

문제는 이거였다.
 
1순위 지명은 본인의 의사와 관계없이 해당 팀에 무조건 가야 한다

는 조항 말이다. 아무도 몰랐던 조항, 그 누구도 말해주지 않았던 규칙이었다. 내 힘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고, 부모님과 선생님조차도 도움을 줄 수 없을 정도로 상황은 꼬이고 말았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무작정 견디는 것뿐이었다.

다른 학교 친구들이 팀에 입단했을 때, 결국 난 '코트의 미아'가 됐다. 학교에서는 최후의 선택으로 수능을 보라고 했다. 당시 여자농구 대학팀은 은퇴한 선수들이 가거나, 운동을 그만두고 학업으로 전환하기 위해 가는, 운동을 조금 못하는 선수들이 가는 곳이라는 인식이 있었다. 수능을 치르고 마지막까지 고민을 했다. 자존심이 도저히 허락하지 않았다. 그동안의 노력, 희망, 꿈이 한순간에 물거품이 되어버린 것 같았다. 결국, 나의 선택은 '대학 포기'였다.

그때의 나는 농구공도 잡을 수 없었다8개월이 흘러 '95~96 농구대잔치'가 끝난 후, 비시즌 기간 내가 가고 싶던 팀에서 너무 오래 쉬면 안 좋으니 팀에 합류해 몸을 만들자고 제안하였다. 고민 끝에 그 팀에 합류했고 몸을 만들기 시작했다. 그렇지만 농구판은 역시 좁았다. 나를 1순위로 지명한 팀이 제재를 하기 시작했다.

훈련하던 팀에서 나왔다가 다시 또 들어가기를 반복하고 있을 때, 지도자 한 분이 일본으로 가는 것도 좋으니 생각해 보라고 권유했다. 좋은 선택일 수도 있었지만 당시 나는 일본으로 가는 건 왠지 모르게 도망치는 기분이었다.

다시 1년이 흘렀다. '96~97년 농구대잔치'가 가까워지자 나를 1순위로 뽑은 팀이 부모님에게 협상을 제안했다. 1순위 지명 선수는 무조건 뽑은 팀에 가야 한다는 조항 때문에 다방면의 여러 노력에도 상황은 바뀌지 않았고, 농구를 하려고 버티고 있는 자식을 보면서 선택의 여지가 없다고 생각하셨을 것이다. 결국 나는 내 의지와 상관없이 1차 지명한 팀에 가야 했고, 또래보다 1년 늦게 농구대잔치에 데뷔를 하게 되었다. 선수로서 치명적이었고 인생에서 가장 긴 시간이었다.

농구의 인기가 시들해지면서 이제 서울에는 대학여자농구팀이 단 한곳도 없다. 그나마 경기도에 있는 2팀 가운데 한 팀은 해체 위기에 몰려있다. 여자프로농구에서 선택받지 못한 후배들은 불투명한 미래 때문에 본인 의지와 상관없이 운동을 중단해야 하는 처지이다. 꿈을 키워야 할 학생 선수들조차 흔들리고 악순환에 빠지게 된다.

농구든 다른 종목이든 운동선수를 처음 시작하는 학생들에게선 과거의 나와 마찬가지로 설렘과 열정, 의욕을 느낄 수 있다. 처음 시작의 두려움? 그들의 땀 냄새를 맡다 보면 어느새 잊게 된다. 그러나 25년이 흘렀음에도 제도의 장벽과 부실함은 '라떼'와 마찬가지로 바뀌지 않고 있다.

프로 선수 생활 10년, 그리고 한 명의 지도자로서 나는 희망한다. 어른들의 이익이 아닌 학생 선수들을 위한 환경, 공부와 운동을 병행하고 시간 관리할 수 있는 환경, 지도자들이 더 이상 학생들을 윽박지르지 않고 체계적으로 건강한 신체를 만들 수 있는 환경, 더 나아가 스포츠 현장에서 공정하고 인권이 보장되는 환경을.

'처음'이 더 이상 '첫 번째 시련'이 아니길 희망한다.
 
#인-잇 #인잇 #양희연
인잇 시즌 2 엔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