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적북적] 당신에게 일은 어떤 의미냐는 질문은 우문인가요?…일의 기쁨과 슬픔

심영구 기자 so5what@sbs.co.kr

작성 2020.02.09 07:37 조회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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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룸] 북적북적 228 : 당신에게 일은 어떤 의미냐는 질문은 우문인가요?…<일의 기쁨과 슬픔>

"사람들이 포인트를 그렇게 좋아하나?"
"다들 좋아하지 않나요?"
"그렇죠. 그래서 또 자신 있게 대답했지. 네, 좋아합니다! 그랬더니 뭐라는 줄 알아요?"
"글쎄요."
"그렇게 좋은 거면 앞으로 일 년 동안 이 차장은 월급, 포인트로 받게."


"감사합니다, 선생님. 사시는 동안 적게 일하시고 많이 버세요."

<일의 기쁨과 슬픔> 중에서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 때문에 다들 걱정이 많으시죠. 저희 회사도 출입문 몇 개는 폐쇄하고 발열 체크와 손 소독을 거쳐야만 출입하도록 하고 있습니다. 회사에서 멀지 않은 한 홈쇼핑 회사는 직원 중 확진자가 나오면서 직장 폐쇄에 들어갔죠. 회사에서 겪어보지 못한 흉흉함이 흘러 다닙니다. 이런 건 지금 어디를 가나 느낄 수 있는 공통된 분위기일 것 같습니다.

한편 저마다 업종 특성 따라 다른 분위기나 공유하는 정서 같은 게 있습니다. 저희 같은 방송사 직원들은 이를테면 방송 직전에 간신히 송출을 마쳤을 때 같은 느낌이랄까요. 한참 전입니다만 뉴스 시간에 대기 위해 촬영한 영상이 든 테이프를 들고 을지로에서 시청까지 2km 남짓을 전력 질주했던 일이 있었습니다. 교통 체증이 심해서 차에서 내려 뛰어갔던 건데요, 양복 차림에 구두를 신고 달려야 했던 저는 땀으로 온몸이 흠뻑 졌었고 뉴스는 다행히 무사히 방송됐습니다. 그때의 쫄깃한, 심장이 오그라드는 것 같은 기분... 조금은 기쁘면서도 이게 뭐라고 이렇게 살아야 하나 하는 허탈함... 일의 기쁨이자 슬픔이었겠습니다.

오늘 읽는 책은, 동시대 직장인들에게 폭발적인 공감과 처연한 슬픔과 야릇한 기쁨을 맛보게 해 줬던 장류진 작가의 소설집 <일의 기쁨과 슬픔>입니다. 표제작인 <일의 기쁨과 슬픔>은 2018년 창비신인소설상을 수상하고 창비 홈페이지에 소개됐는데 40만 이상의 조회수를 기록할 정도로 큰 인기를 끌었습니다. 저도 이때 SNS를 통해 이 소설을 처음 읽었습니다. 판교 테크노밸리를 배경으로 한 어느 스타트업 직장인의 일상을 정말 그린 듯이 그려냈다고 호평받았는데 소설 속 안나가 느끼는 정서, 저도 업종은 다르고 버전은 다르지만 많이 느꼈던 것 같습니다.

<일의 기쁨과 슬픔>
"… 굳이 영어 이름을 지어서 쓰는 이유는 대표가 그렇게 정했기 때문이다... 대표부터 직원까지 모두 영어 이름을 쓰면서 동등하게 소통하는 수평한 업무환경을 만들자는 취지라고 했다... 의도는 나쁘지 않았다. 하지만 다들 대표나 이사와 이야기할 때는 "저번에 데이빗께서 요청하신..." 혹은 "앤드류께서 말씀하신…" 이러고 앉아 있었다."

"서서 스크럼을 시작한 지 벌써 사십 분이 다 되어가고 있었다. 빨리 앉아서 일을 시작하는 게 우동마켓의 발전에 더 도움이 될 것 같은데 대표는 스크럼을 끝낼 생각이 없어 보였다."

"굴욕감에 침전된 채로 밤을 지새웠고, 이미 나라는 사람은 없어져버린 게 아닐까, 하는 마음이 되었다고. 그런데도 어김없이 날은 밝았고 여전히 자신이 세계 속에 존재하며 출근도 해야 한다는 사실을 마주해야 했다... 사실 돈이 뭐 별 건가요? 돈도 결국 이 세계, 우리가 살아가는 시스템의 포인트인 거잖아요."


<나의 후쿠오카 가이드>
"나는 그냥 내 상황만 생각하기로 했다. 원래 사람은 다 이기적이니까. 나에게 다시 주어진 기회라고 여겼다. 배우자가 죽고 나면 언제쯤 괜찮아지는 걸까요? 이런 건 검색창에 쳐봐도 정답이 나오지 않았다. 결혼 기간의 두 배? 두 달 살았으니 그럼 사 개월? 아니면 일 년이면 괜찮아지는 걸까?"
"그게 나만 아는 비밀이라는 듯, 그녀와 나는 사생활을 나누는 사이라는 과시. 지유 씨의 남자 친구 혹은 남편은 나에게 그런 용도로만 존재할 뿐이었다. 딱히 질투가 나지도 않았다. 내가 지유씨에게 더 잘 맞는 짝일 것 같다는 이상한 자신감이 늘 있었다."


이 소설집에는 8편의 단편이 실려 있습니다. 흥미롭긴 하지만 엄청나게 중대한 비밀이 숨어 있다거나 거대한 위험이나 조직의 음모에 빠진 주인공이 겪는 스펙터클한 사건이 일어나진 않을 것 같죠? 실제로 그렇습니다. 다소 황당하게 들릴 때도 없지 않겠지만, 그럴 법하다고 고개 끄덕이게 하는 지독히 현실적인 전개입니다. 우리의 삶은 매일 새롭고 매일 지루하고 매일 되풀이되며 매일 거듭납니다.

장류진 작가는 <일의 기쁨과 슬픔>의 제목을 알랭 드 보통의 동명의 책에서 따왔다고 합니다. 알랭 드 보통의 책에는 일의 세계가 근본적인 의미를 주는 원천이라는 주장이 담겨 있는데 장류진 작가의 소설에는 그보다는 2020년 전후의 한국 사회, 특히 저희 또래가 지켜보고 겪어왔던 여러 단면이 골고루 담겨 있는 듯합니다.

이 책에 실린 8편을 10년 동안 직장 다니면서 써왔고 발표했다는데 아이러니하다고 할지 작가는 소설집의 인기에 힘입어 회사를 그만두셨다고 합니다. 퇴근 후 짬짬이 써왔던 소설이 본업이 된 기분도 궁금하네요.

막상 저는 일에 너무 빠져 있지는 않은지(열심히 하지 않는 건 아니나 다른 걸 별로 안 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러면서도 내 일의 슬픔은 어느 정도 알겠는데 기쁨은 무엇일까 하고 곰곰이 생각하게 됩니다.

*출판사 창비로부터 낭독 허가를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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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BS 뉴미디어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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