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8월 이후 발생한 5건의 에너지저장장치(ESS·Energy Storage System) 화재가 "배터리 이상" 때문이라는 정부 발표를 본 배터리 제조업체 관계자 반응이다. 전기가 충분할 때 저장했다가 부족할 때 꺼내 쓰면 사회적 편익을 높인다며 보조금까지 만들어 전국에 보급한 정부에 배신감을 느낀다는 얘기다.
당장 지난해 6월 민관합동조사단(1차 조사단)이 내린 것과는 다른 결론이 논란이다. 2017년 8월~2019년 5월 벌어진 ESS 화재 23건을 분석한 당시 조사단의 결론은 화재 원인이 '복합적'이란 거였다. 1차 조사단은 배터리 자체의 결함보단 영세업체들 위주로 운용되는 ESS 설비의 부실한 보호와 운영을 더 강조하기도 했다. 그런데 정부가 새로 구성한 이번 ESS 화재사고 조사단(2차 조사단)은 단 5건의 화재 조사만으로 배터리를 발화점으로 지목한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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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는 이런 결과를 정작 당사자인 배터리 제조업체들이 전혀 받아들이지 못한다는 것이다. LG화학은 "불이 난 곳과 동일한 곳에서 넉 달 동안 가혹한 환경을 만들어 자체 실증실험을 했지만 화재가 재현되지 않았다"고 했다. 삼성SDI는 "배터리는 가연성 물질일 뿐 점화원은 아니다"고 주장했다. 두 회사 모두 "배터리 용융 흔적 등은 일반적인 현상"이라거나 "화재의 직접 원인이 아니다"라고 반박했다. 특히 삼성SDI는 "조사단이 분석해 발표한 배터리가 불이 난 배터리가 아니다"라고 꼬집었다. 불 난 ESS에 설치된 제품과 같은 시기에 만들어 다른 현장에 설치한 제품을 요구해서 제출했더니 엉뚱한 발표가 나왔다며 "그럼 왜 다른 데선 불이 나지 않느냐"는 입장이다.
1차 조사단에 참여한 한 전문가는 정부 보조금 지원에 힘입어 외딴 야산에 짓고 방치하다시피 하는 ESS 운용사들의 행태도 여전히 문제라고 지적한다. 1차 조사를 옴니버스 소설로, 2차 조사를 단편소설로 비유한 그는 "당시 배터리 외적인 문제가 화재 원인으로 추정되는 장소들도 많아 한 가지로 원인을 특정하기 어려웠는데 이번 조사단이 분석한 패턴은 조금 단순했던 것 같다"며 2차 조사단이 "결과가 '세게' 나온 배터리 쪽 데이터에 집중한 듯하다"고 평가했다. 화재 원인으로 지목된 배터리 제조업체 임원도 "우리는 배터리만 팔았을 뿐"이라고 억울해했다. "외국은 GE나 ABB같은 100년 이상 노하우를 가진 기업이 ESS를 운영하는데 우리는 현장 가보면 뱀 나오고 비 새고 난리"라는 거다.
분명한 건 '앞으로 잘해보자'는 뜻에서 한 정부 발표가 당사자 반발만 산 채 치명적 결과를 불러올지 모른다는 점이다. 포춘비즈니스인사이트에 따르면 2018년 145억 달러였던 세계 ESS 시장규모는 2026년 말 211억 달러(약 25조 원)에 달할 것으로 전망된다. 2030년엔 298억 달러(약 35조 2천5백억 원)에 이를 것이라는 예상도 있다. 이 시장에서 51%를 차지하고 있는 게 한국 기업들인데 정부가 나서서 이들을 'ESS 화재 원흉'으로 지목한 셈이다. 한국 업체를 뒤쫓는 미국 테슬라와 중국 BYD, CATL은 분명 앞으로 영업에 한국 정부 발표를 줄기차게 이용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