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생충'은 국가와 문화의 경계를 단숨에 허물었다. 내가 머물고 있는 미국 캘리포니아에서도 '기생충'에 대한 관심은 엄청나다. 특히 내가 한국인이고 영화평을 쓴다는 사실을 아는 순간 많은 이들이 이 영화와 출연 배우에 대한 질문을 쏟아부었다. 언어가 다르고 문화는 낯설지만 이 영화가 말하고 있는 계급과 불평등의 문제는 보편적이기 때문에 미국 관객들도 쉽게 공감할 수 있었다.
이들의 관심은 스토리와 상징성에서 시작해서 배우들의 연기로 넘어간다. '기생충'은 사실 어떤 한 배우의 뛰어난 연기력이 도드라지는 작품이 아니다. 누가 주연인지 쉽게 판단하기 어려울 정도로 모든 배우의 연기가 조화를 이뤄 빛을 발하는 영화다.
여자 배우들의 경우 그 혼란은 더 심해진다. 누가 주연 여배우의 인상적인 연기를 이야기하면 도대체 어떤 배우를 말하는지 분명히 확인하기 전에는 반응조차 불가능하다. 조여정, 장혜진, 박소담 그리고 이정은의 연기 색깔은 너무 달랐다. 하지만 영화 안에서 그 무게감을 따진다면 우열을 가리기 어렵다. 연말 영화 주간지 설문에서 올해의 주·조연 여배우를 꼽을 때 나 스스로도 누구를 어느 자리에 넣어야 할지 몰라 무척 곤란하기도 했다. 다 넣기도 그렇고, 그렇다고 누구 하나 빼자니 너무 아쉽고.
해외 영화 평론가들의 생각도 비슷했다. 뉴욕 타임즈의 두 평론가, 마놀라 다지스(Manohla Dargis)와 A.O.스캇(A.O. Scott)은 한국 시간으로 내일(10일) 있을 제92회 아카데미 시상식의 주요 부문 후보자를 예상하는 기사를 내놓았다. 두 평론가가 거론했던 여우 조연상 후보 10자리에는 <기생충>의 배우들이 중복해 이름을 올렸었다. 즉 박소담, 이정은, 조여정, 장혜진이 두 리스트의 여우 조연상 후보 자리를 가득 채웠다.
※ '기생충'은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외국어영화상, 작품상, 감독상, 각본상, 편집상, 미술상 등 6개 부문의 후보로 최종 지명돼 실제 조연상 후보 지명은 불발됐다.
다시 SAG 시상식으로 돌아가 보자. 최고 앙상블상을 받은 뒤 송강호가 무대에 올라 밝힌 소감을 떠올려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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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록 제목이 '기생충'이지만
'기생충'은 우리가 어떻게 공생할 수 있을까 고민하는 영화입니다.
오늘 최고의 상을 받고 보니까 우리가 영화를 잘못 만들지는 않았구나 생각이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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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존경하는 대배우들 앞에서 큰 상을 받아 영광스럽고
아름다운 기억을 영원히 간직하겠습니다.
”
당시 객석에는 마틴 스콜세즈 회심의 복귀작 '아이리쉬맨'에 출연한 전설의 배우들, 로버트 드 니로, 알 파치노를 비롯해 한때 미남 배우의 대명사였다가 이제는 연기파 중견 배우들이 된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와 브래드 피트가 있었다. 또 다른 전설인 메릴 스트립과 인디 아트 영화의 여왕인 로라 던도 웃고 있었다. '조커'로 전미 크고 작은 모든 영화제의 남우주연상을 휩쓸고 있는 호아킨 피닉스도 있었다.오늘 존경하는 대배우들 앞에서 큰 상을 받아 영광스럽고
아름다운 기억을 영원히 간직하겠습니다.
”
SAG 시상식의 남우주연상도 역시 호아킨 피닉스의 몫이었다. 그는 자기와 함께 후보에 오른 배우들을 일일이 거론하며 그들이 자신에 준 자극과 영감이 무엇이었는지 밝혔다. 위트와 감동이 가득한 그의 수상 소감도 큰 박수와 관심을 받았다. 그는 마지막으로 모든 영광을 <다크 나이트>에서 '조커'로 열연해 많은 이들에게 조커의 내면을 들여다보게 해준, 이제는 고인이 된 히스 레저에게 돌리고 퇴장했다.
송강호와 호아킨 피닉스의 수상 소감을 보고 있으니 영화도 사람 사는 모습과 전혀 다를 게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훌륭한 작품은 누군가의 독보적인 천재성보다 수많은 사람들이 재능이 조화롭게 어울릴 때 만들어진다. "촬영장 분위기가 좋아야 좋은 영화가 나온다"는 말도 있다. 그리고 누군가의 천재성도 결국은 그 이전에 있었던 수많은 이들이 전수해준 영감과 경험으로 빚어진 것이다. 어느 것도 혼자 이뤄진 것은 없다. 그게 영화라는 예술이 갖는 가장 큰 매력 중 하나다.
'기생충'이 빚어낸 역사는 올 한해 미국에 사는 한인들을 계속 으쓱하게 만들어 주었다. 우리는 그 작품을 통해 한국을 이야기하고 한국 밖 사회와 공감할 수 있었다. 세계 영화 시장에서는 영향력을 무시할 수 없는, 그러면서도 봉준호 감독이 '로컬 영화제'라 칭했던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기생충'의 선전을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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