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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파일] 명절, 오래된 싸움, 그리고 노동법원

설날이었던 지난 25일 아침 9시 반. 마포구에 위치한 일진다이아몬드 농성장 앞에 차례상이 차려졌습니다. 차례상은 서울역 대합실의 고 설요한 중증장애인 동료지원가 분향소, 광화문 광장의 고 문중원 기수 분향소 앞을 지나, 압구정 현대백화점 앞 기아차 비정규직 농성장 앞에서 마지막 차례를 올렸습니다.

차례상 행렬의 시작과 끝, 일진다이아몬드 농성장과 기아차 비정규직 농성장은 이 행사를 기획한 비정규직 노동자쉼터 '꿀잠'의 사람들에겐 익숙한 곳입니다. 지난 추석에도 거리의 차례상이 차려졌던 곳이기 때문입니다. 지난해 추석 차례를 지내며 다음 명절엔 귀향하길 바랐던 이들은 결국 새해도 거리에서 맞게 됐습니다.
충북시민사회 단체 기자회견 (사진=연합뉴스)
● 긴 싸움의 뒤편

회사를 상대로 한 일 하는 사람들의 싸움은 대개 '투쟁'이라는 두 글자 단어로 표현되지만, 이면은 그리 간단하지 않습니다. 지노위, 중노위, 지방법원, 행정법원, 고등법원, 대법원, 조정, 화해, 민사소송, 행정소송, 가처분, 항소, 상고, 재정 신청, 기각, 인용, 승소, 패소… 많은 노동 사건들은 복잡한 행정/사법 절차를 거치며 결론이 나지 않은 채 몇 해를 보냅니다. 일진다이아몬드 노조는 지난해 중앙노동위원회 조정 절차를 시도했지만 결렬됐고, 2010년 소송이 제기된 기아차 비정규직 문제는 올해로 10년째를 맞고 있습니다.

명절 선물을 배달했던 택배 노동자들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고용노동부로부터 노동조합으로 인정받았음에도, 회사는 노조와 교섭에 응하지 않았습니다. 지방노동위원회, 중앙노동위원회에서 두 차례 싸움을 거쳐 교섭에 응하라는 명령을 받아냈지만, 회사는 또다시 행정소송을 제기했습니다. 지난해 행정소송에서도 승소 판결이 나왔지만, 사측은 개별적으로 판단 받아보겠다며 여러 건의 소송을 제기해 다투고 있습니다. 그렇게 3년이 지나갔습니다.

싸우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사람들은 지쳐갑니다. 그 시간만큼 감정의 골도 더 깊어집니다. 명절마다 한 번쯤 지나쳤을 톨게이트에서 일했던 수납원들의 경우가 그랬습니다. 하청업체 소속이지만 도로공사의 직접 업무지시를 받아온 이들이 법원에서 '불법 파견'이라는 최종 판단을 받는 데까지는 6년의 시간이 걸렸습니다. 이 기간 동안 도로공사는 자회사 고용을 추진했습니다. 동의한 노동자들도 있었지만, 법원에서 '불법 파견' 판결이 확정되면 본사에 직접 고용될 수 있다고 판단한 사람들은 도로공사와의 싸움을 이어가기로 했습니다. 하지만 법원의 판단엔 생각보다 더 많은 시간이 걸렸고, 시간이 쌓이는 만큼 마음의 상처도 쌓여갔습니다.

"집에서 밥하다 학원비 벌러 일 나가던, 참고만 살던 아줌마들인데 왜 이렇게 한이 받치게 됐을까요?" (톨게이트 수납원 박순향 씨)

오랜 싸움이 만든 감정의 골은 억울한 일 있어도, 손해 보는 일 있어도 웬만하면 참고 살던 이들을 톨게이트 지붕 위로 올려보냈습니다.
도로공사 본사 점거 농성 중인 톨게이트 요금 수납원들 (사진=연합뉴스)
● '노동법원' 본격 논의 나온 지 올해로 17년째 되지만…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방안은 오래전부터 논의돼왔습니다. 2003년 참여정부 시절 대법원 산하에 설치된 사법개혁위원회는 다음 해인 2004년 활동을 종료하며 노동 전문 법원 설치를 제안했습니다. "노동 사건의 특수성을 고려해 효율적이고 전문적인 노동분쟁 처리기구로서 전문법원 또는 전문재판부가 설치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의견이었습니다. 민법상 대등 관계가 아닌, 힘의 불균형을 반영한 노동법 원리를 충실히 반영하고, 지방노동위원회-중앙노동위원회-1심-2심-3심으로 사실상 5심인 노동 소송 구조를 개선하기 위해선 노동 전문 법원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바탕에 깔렸습니다. 하지만 시기상조라는 주류 법조계와 재계 의견에 노동 법원 설치는 무산됐습니다. 18, 19대 국회에서 관련 법안이 발의되긴 했지만 제대로 된 논의는 이뤄지지 않았습니다.

정권이 바뀐 뒤, 사법 개혁이 다시 화두가 되면서 '노동법원' 논의는 오랜만에 활기를 띄었습니다. 지난 세월 동안 특허법원과 회생법원이 설치됐으니, 노동 사건을 전문적으로 다루는 노동법원을 도입하지 못할 이유가 없다는 주장도 나왔습니다.

노동법원 설치에 대해 많은 연구와 주장을 내놨던 김선수 변호사가 대법관이 되고, 법원행정처가 법원노조와 노동법원 설치에 협력하기로 하는 내용의 단체협약을 맺는 등 노동법원 설립이 현실화되는 듯한 일들도 있었습니다. 당위의 차원을 넘는 실무 차원의 연구와 논의도 많아졌습니다. 노동법원이 도입될 경우 기존의 노동위원회에는 어떤 역할을 맡길 것인지, 독일ㆍ프랑스ㆍ영국 등에 설치된 노동법원 제도를 어떻게 이식할 것인지에 대한 연구 결과가 여럿 발표됐습니다. '노동위원회의 조정 기능을 살리면서 노동법원을 도입해 효율적이고 전문적인 노동 문제 해결을 모색하자'. '노동자와 사용자 대표가 결정에 직접 참여하는 독일 노동법원의 참심제가 우리 헌법과 부딪친다면, 의견 개진까지만 허용하는 준 참심제 혹은 일본식 노동심판제를 검토해 볼 수 있다.' 지난해 노동법원 설치와 관련한 토론회에서 나온 구체적인 이야기들입니다.
법원 재판-법정, 판사, 법전
하지만 여름 이후 연달아 터진 대형 정치 이슈, 이로 인한 정쟁 속에서 노동법원 설립 논의는 또다시 길을 잃고 표류하게 됐습니다. 휘발성 강한 정치 싸움의 틈바구니에서, '일하는 보통 사람들'의 현실 속 싸움과 관련한 논의는 다시 자취를 감췄습니다.

● 논의가 사라져서는 안 되는 이유

설 연휴가 끝나고 진짜 경자년 새해가 됐습니다. 국정 농단, 사법 행정권 남용 의혹 등 과거의 시시비비가 가려지고, 이와 맞물려 새로운 선거가 치러지는 굵직한 한해입니다. 대형 이슈의 한복판에서 수많은 쟁점들이 맞부딪치는 싸움도 치열하게 일어날 겁니다. 하지만 이 모든 것들이 소수의 누군가를 위한 싸움이 아닌, '일하는 보통 사람들'의 삶을 나아지게 하는 것이 되려면 무엇을 가지고 싸우느냐가 중요합니다. '법관들 자리 늘리려는 방편', '극심한 노사갈등을 법정으로 이전하는 것에 불과하다'. 반대 의견도 만만치 않지만, 노동법원 설립을 둘러싼 논의가 논쟁의 장에서 사라져서는 안 되는 이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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