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파일] 집값과 세금, 그리고 노블레스 오블리주

한세현 기자 vetman@sbs.co.kr

작성 2020.01.25 07:50 수정 2020.01.25 09:48 조회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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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년 2월 14일, 미국 뉴욕타임스에 기이한(?) 기사가 실렸습니다. 제목은 '부유층 미국인들, 상속세 유지를 위한 투쟁에 동참하다(Dozens of Rich Americans Join In Fight to Retain the Estate Tax)'이었습니다. 세계적 투자자 워런 버핏과 조지 소로스, 자산가 빌 게이츠 부친인 윌리엄 게이츠 같은 거부들이 부시 대통령 상속세 정책에 반기(!)를 들었다는 내용이었습니다.
 
당시 부시 대통령은 "감세를 통해 경제를 일으키겠다."라며 상속세 폐지정책을 선언했는데, 미국 내 최고 상류층들이 "그렇게 하면 안 된다."라고 반대하고 나선 것입니다. 버핏은 "상속세를 없애는 것은 '끔찍한 실수'가 될 것이다(Repealing the estate tax would be a 'terrible mistake')."라고까지 비판했습니다.
 
경제학에서 정의하는 '경제인(Homo economicus)'은 '자기 행복을 추구하는 이기적인 존재'입니다. 그런 관점에서 보면, 감세로 혜택을 볼 당사자들이 "세금을 깎으면 안 된다."라고 반대하는 것은 한마디로 '난센스', 당찮은 일입니다. 어떤 면에서는 황당하기까지 합니다. 이런 시선을 의식한 듯, 이들은 "상속세 폐지에 반대한다."라는 광고를 지속적으로 실으며 자신들의 진정성을 입증하려고 했습니다. 이쯤 되면 경제학 교과서를 다시 써야 하는 것이 아닌가 싶을 정도입니다.
 
이들은 왜 이처럼 '비교과서적인(?)' 행동을 한 것일까요? 이유는 간단했습니다. 자신들이 세금을 적게 내면 중산층과 저소득층이 세금을 더 많이 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유한하고 희소성 있는 부(富)가 특정한 소수에게 편중되는 것은 국가나 사회를 위해 도움이 되지 않는다.'라는 철학, 세금을 우리만의 이익이 아닌 사회 공동체 관점에서 보는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 사회 고위층에 요구되는 높은 수준의 도덕적 의무)'를 실천하는 것이었습니다.'상속세 폐지 반대'를 주장한 미국 부유층…뉴욕타임스 기사(2001.2.14)● 부동산발 초강력 세금 대책…"강남 사는 게 죄냐?"
 
20년 가까이 지난 오늘 기사를, 그것도 다른 나라 '부유층 세금' 얘기를 왜 꺼냈느냐, 그것은 바야흐로 '세금'이 우리 사회의 뜨거운 논쟁거리로 떠올랐기 때문입니다. 이른바 부동산발 '세금 폭탄' 논쟁입니다. 문재인 정부는 지난 2017년 5월 출범 이후 2년 8개월 동안 4차례에 걸쳐 부동산 세금 개편안을 내놨습니다. 목표는 '강남'으로 대표되는 고가주택 보유자들이었습니다. 한마디로 치솟는 집값을 잡으려고 8개월마다 부동산 세제를 개편한 셈입니다.
 
정부는 보유세 부담 상한을 150%에서 300%로 확대하고, 종부세 최고 세율도 2%에서 4%로 높였습니다. 과세표준을 정할 때 기준이 되는 공시가격 비율(공정시장가액비율)도 2년 전 80%에서 2022년 100%까지 올립니다. 이렇게 되면, 집값이 안 올라도 세금을 매기는 기준점이 높아지기 때문에 세금도 계속 오르게 됩니다.
 
이런 세제 개편은 고가주택 보유자에게 큰 영향을 끼칩니다. 실례로, 서울 서초구 전용면적 85m² 아파트에 사는 어느 1주택자는 올해 종합부동산세를 572만 원을 내게 됐습니다. 2017년 105만 원 냈으니, 3년 새 5배 넘게 오른 셈입니다. 종부세에 재산세까지 더한 보유세도 574만 원에서 1,300만 원으로 배 이상 올라갑니다.
 
당장 볼멘소리가 나옵니다. "강남 사는 게 죄냐?", "법적 안정성과 예측 가능성이 중요한 세제를 이렇게 막 바꿔도 되는 거냐?" 일각에서는 '세금 흡혈 정부'라는 얘기까지도 나옵니다. 실제로 취재과정에서 만난 서울 강남지역 일부 주민은 "난 은퇴해서 별다른 소득이 없다. 집 한 채가 전부다. 소득도 없는데 집 한 채 있다고 이렇게 세금을 때리면 어떻게 살아가나?"라고 거칠게 반문했습니다. 또, "실제 돈을 낼 수 있는, 또 내야 하는 사람들을 잘 선별해 적절히 과세해야지, 이렇게 기관총 난사하듯이 마구잡이로 쏘는 것은 말도 안 된다."라며 목소리를 높였습니다. 부유층을 혼내기 위한 '징벌적 과세'가 아니냐는 것입니다.
 
● 우리나라 보유세 부담은 어느 정도일까?
 
그렇다면 우리나라 보유세는 어느 정도 수준일까요?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높은 편이라고 보기는 어렵다."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지난해 우리나라 GDP 대비 보유세 비율(Recurrent taxes on immovable, 부동 자산에 대한 반복 과세)는 OECD 평균보다 낮았습니다. OECD 33개국 평균이 1.06%인데, 우리나라는 이보다 0.19%포인트 낮았습니다. 순위로 보면 15위이니 중간 정도 수준이라고 할 수 있을 거 같습니다. 그리고 우리나라 보유세 비율이 OECD 평균보다 높았던 적은 관련 통계가 작성된 1990년 이후 단 한 번도 없었습니다.
 
참고로 지난해 보유세 비율이 가장 높았던 국가는 캐나다(3.13%)였습니다. 이어 영국(3.09%), 미국(2.69%), 프랑스(2.65%), 뉴질랜드(1.92%), 이스라엘(1.91%), 일본(1.89%) 등의 순이었습니다. 주요 선진국과 비교했을 때 우리나라의 보유세는 여전히 낮은 수준이라 이른 시일 안에 격차가 좁혀지기는 어려울 것으로 보입니다.
 
● 정부의 '설명 책임' 의무
 
그렇다고 세금을 더 많이 내게 되는 분들 주장이 잘못됐다거나 비도덕적이라는 뜻은 아닙니다. 세금을 더 많이 걷으면, 정부는 그만큼 더 나은 공공서비스를 제공해야 할 의무도 함께 생기는데 그것에 대한 정당한 권리 행사일 수도 있습니다. 쉽게 말하면 "해준 것도 없이 가져가기만 하느냐?"라는 지적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부동산 관련 세금을 더 많이 걷어들인다면,  정부는 그 세금으로 주요 핵심 요충지에 임대 주택을 충분히 공급하고, 지방의 교육, 의료시설 등을 강화하는 등의 의무를 해야 합니다. 그리하여 장기적으로는 사람들이 서울·수도권 혹은 도심 내 특정 지역으로만 몰리지 않게 해법을 제시해야 합니다. 즉, 세금이 소득과 집값의 간극을 좁히고, 사회 구성원의 안정적인 생활을 돕는 수단으로 돌아오게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만 세금을 내는 국민의 부담과 반발을 줄일 수 있습니다.
 
이 대목에서 정부와 예산안을 심의하는 국회는 자문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왜 세금을 더 많이 걷는지, 그리고 그것을 어떻게 되돌려줄지, 자세하고 합리적이며 또 설득력 있게 국민에게 설명했는가?' 그리고 '실제로 그 설명에 맞게 세금을 제대로 집행하고 있는가?'
 
영국 경제전문지 이코노미스트의 전 편집장 빌 에머트는 "좋은 정부와 나쁜 정부를 판단하는 가장 중요한 기준은 정부가 국민에게 '설명 책임'을 이행했느냐에 달렸다."라고 지적했습니다. 주요 정책이 국가의 현재와 장래를 위해 올바른 것인지를 권력의 원천인 국민에게 충실히 설명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에버트의 지적에 우리 정부와 국회는 자신 있게 "그렇다!"라고 답할 수 있을까요?
 
당장 앞으로 더 많은 세금을 걷으려면 정부는 앞서 설명한 '조세 저항'이라는 격류에 뛰어들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헤쳐나가야 합니다. 그 영법(永法)이 우아하고 격이 있으면 좋겠습니다. '철혈 재상'으로 불리는 독일 비스마르크도 "정치란 많은 '교수'가 생각하는 것처럼 과학이 아니라 예술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아무리 목적지가 올바르고 바람직하다고 할지라도, 사람들이 거부하면 어쩔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정치는 효율성을 기초로 하지 않습니다. 시간이 걸리더라도 배고픈 사람, 배부른 사람, 배 아픈 사람까지 모두 만족시켜 나가는 최고난도의 기술이 바로 정치입니다. 그런 점에서 가령 "보유세를 올리려면 세계 최고 수준인 거래세라도 낮춰 달라."라는 주장에 대해서도 정부는 합리적인 설명을 내놓아야 합니다. 그래서 설득하거나 혹은 필요에 따라 정책을 수정해나갈 필요가 있습니다. 윽박지르고 우격다짐하기보단 설명하고, 설득하고, 이해시키는 지난한 시간을 충실히 거쳐야 합니다.
 
● "부(富)는 거름과 같다."
 
미국에는 '책임을 다하는 부(Responsible Wealth)'라는 단체가 있습니다. 상위 5% 내 부유층들이 회원입니다. 이들이 내세우는 가치는 '공평 과세'입니다. 부유층이 내야 할 세금을 깎지 말라고 요구합니다. 많이 가진 사람들이 세금을 적게 내면, 세금을 낼 여력조차 안 되는 이들이 피해를 보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들의 세금을 깎는 것은 "공평한 과세가 아니다."라고 주장합니다. 앞서 설명한 상속세 폐지 반대 운동도 이와 맥을 같이 합니다. 세금을 바라보는 우리나라 부유층의 시각은 어떤지, 잠시 창밖을 보며 많은 생각을 하게 됩니다.
 '공평 과세 '책임 있는 부'라는 단체가 이렇게 공평 과세라는 파격적인(?) 주장할 수 있는 건, 밑바탕에 '세금이 우리 사회구성원 모두를 위해 잘 쓰일 것이다.'라는 믿음이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리고 실제로 세금이 적합한 곳에 적합하게 쓰이는지 감시하고, 정부도 자신들이 펼쳐가는 정책에 대해 지속적으로 성실하게 답합니다. 세금을 공익적 차원에서 바라보는 부유층의 인식, 세금을 집행하는 정부의 지속적이고 자세한 설명이 있기에 가능한 모습입니다.
 
일찍이 러시아 대문호 톨스토이는 "부(富)는 거름과 같다."라고 했습니다. 거름은 쌓아두면 악취를 풍기지만, 땅에 뿌리면 생명체들이 잘 자라게 해주는 자양분이 됩니다. 거름을 우리 모두를 위한 공익적 관점에서 바라보고 땅에 뿌리려는 인식과 노력. 그리고 거름을 어떻게 땅에 뿌리는지에 대한 지속적이고 합리적인 '설명'. 우리는 이 두 가지를 모두 잘 갖추고 있을까요? 아직도 어디선가 스멀스멀 악취가 풍겨 나오고 있는 것은 아닌지, 주변을 다시 돌아보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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