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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잇] 책의 미래, 독서의 운명

서메리 | 작가 겸 번역가. 『회사 체질이 아니라서요』 저자

[인-잇] 책의 미래, 독서의 운명
영화 <달콤 살벌한 연인>의 주인공 미나(최강희 분)는 연인 대우(박용우 분)의 친구들과 인사하는 자리에서 망신을 당한다. 식사 도중에 화두로 나온 책 이야기를 따라잡지 못했기 때문이다. 대화에 끼지 못하고 어색한 미소만 짓고 있는 미나의 모습을 눈치 챈 지인은 그녀에게 묻는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 몰라요?" 그 말투에는 놀람과 경멸의 기색이 가득하다. 상대를 무시하고 깔아뭉개는 지인의 태도는 대단히 밥맛 없지만, 어쨌든 이 장면이 전달하고자 하는 의미는 분명하다. 미나는 평소에 책을 읽지 않는, 그다지 교양이 없는 캐릭터이다.

사실 이 영화가 개봉했던 2006년 당시에도 독서의 위상은 내리막길을 걷고 있었다. TV와 인터넷이 보급되면서 영상 매체에 익숙해진 대중들은 점점 책을 멀리했다. 하지만 이 때까지만 해도 독서는 최소한 필수 교양의 영역에 포함되어 있었다. 공중파와 케이블 채널 몇 개로 전달할 수 있는 정보의 양에는 한계가 있었고, 책은 여전히 지식의 주요한 통로 대접을 받았다. 게다가 아무리 재미있어도 TV나 컴퓨터를 이고 지고 다닐 수는 없는 노릇이니, 출근길 전철 안에서 무료한 시간을 때워 주는 역할은 책이 상당 부분 담당했다. 독서량으로 상대의 지성을 판단하는 <달콤 살벌한 연인>의 대화 장면은 이러한 배경 속에서 관객들의 공감을 얻을 수 있었다.

하지만 그로부터 1년 후, 검은색 폴라 티에 청바지를 입은 미국의 한 CEO가 스마트폰이라는 혁신적인 발명품을 내놓으면서 책의 운명은 또 한 번 급격한 전환기를 맞는다. 사람들은 손바닥 만한 화면에 펼쳐지는 화려한 시청각 자료에 시선을 빼앗겼다. 스마트폰과 와이파이만 있으면 언제 어디서든 필요한 지식을 얻고 지루한 시간을 때워줄 여흥거리를 찾을 수 있었다. <죄와 벌> 내용이 궁금하면 위키피디아를 검색하면 된다. 스트리밍 어플에 접속하면 각 시대별로 개봉한 동명의 영화를 통째로 감상할 수 있고, 유튜브에 가면 줄거리를 요약해주는 동영상도 찾을 수 있다. 이런 마당에 굳이 1,000페이지에 육박하는 원작 소설을 찾아 읽을 필요가 있을까?

결론적으로 말해서, 나는 '그럴 필요가 없다'고 보는 입장이다. 이전 시대의 사람들이 지식과 교양 습득의 목적으로 독서에 매진했던 것은 다른 대안이 없었기 때문이지, 요즘 사람들보다 더 똑똑했기 때문이 아니다. 조선 시대에 스마트폰이 보급되었다면 과연 우리 선조들이 유튜브와 넷플릭스를 제쳐두고 개울가에서 한시나 읊었을까? 성균관 유생들도 한자로 된 사서삼경과 경국대전을 달달 외우는 대신 일타 강사의 동영상 강의를 듣지 않았을까?

기술이 발전하면서 책의 입지가 줄어드는 것은 당연한 일이며, 딱히 우려할 만한 현상도 아니다. 80, 90년대만 해도 TV가 아이들을 바보로 만든다며 걱정하는 어른들의 목소리가 심심치 않게 들렸지만, 지금에 와서 4D영화와 인공지능과 자율주행자동차를 만들어낸 것은 그 바보 상자를 보며 자란 아이들이다.

하지만 책을 읽을 필요가 없어지는 현실이 필연적으로 책의 종말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동영상 강의에 지식 전달의 역할을 내주고, 게임과 스트리밍 서비스에 오락의 기능을 나눠준다 하더라도, 책에는 여전히 다른 어떤 매체로도 대신할 수 없는 매력이 있기 때문이다. 2차원의 글자를 3차원 장면으로 재구성하는 재미, 빽빽한 활자의 숲에서 교묘한 복선의 나뭇잎을 찾아내는 짜릿함, 이런 것들은 동영상 콘텐츠가 결코 줄 수 없는 즐거움이다. 페이지가 넘어갈 때 느껴지는 종이의 사각거림과 문장 아래로 미끄러지는 연필심의 감촉은 그 자체로 세파에 찌든 마음을 '힐링'하여 준다. 게다가 독서는 하루 종일 우리를 옭아매는 와이파이와 배터리, 카톡 알림음의 구속에서 벗어나 마음 편히 즐길 수 있는 몇 안 되는 유희이다. 비록 예전처럼 세상 모든 이들에게 어필할 순 없을지라도, 나를 포함한 일부 사람들에게는 스스로 '책 덕후'를 자청하고, 배고픔과 고달픔을 감수하면서 책을 읽고 쓰는 일을 직업으로 택하게 할 만큼 치명적인 것이 바로 독서의 매력이다.

전자책이나 오디오북같은 기술적 변화는 차치하고라도, 독서는 그 자체로 의무에서 취향의 영역으로 넘어가고 있다. 하지만 내가 보는 독서의 미래는 결코 어둡지 않다. 책이 지식의 독과점 공급처라는 고압적 지위를 내려놓고 좋은 음악이나 영화처럼 멋진 취향의 하나로 자리 잡는다면, 모임에서 "<죄와 벌>도 몰라요?" 같은 경멸조의 말을 들을까봐 전전긍긍할 필요가 전혀 없게 된다면, 오히려 더 많은 사람들이 마음 편히 책을 찾아 읽으리라는 생각도 든다. 역사를 통틀어 대중의 사랑을 많이 받았던 취미들은 하나같이 머리 아픈 의무와 한참 동떨어진 것들이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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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잇 사람과 생각을 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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