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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잇] "우리는 죽으러 오지 않았다"

[인-잇] "우리는 죽으러 오지 않았다"

최정규 | '상식에 맞지 않는 법'과 싸우는 변호사 겸 활동가

SBS 뉴스

작성 2019.12.18 11:00 조회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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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장님 나빠요!"

블랑카라는 이주노동자 역할을 하는 개그맨이 출연하여 사장님의 나쁜 행동을 하나씩 고발하는 코미디 프로그램에서 유행어가 된 말이다. 이주노동자가 합법적으로 일할 수 있는 고용허가제도는 2004년에 도입되어 현재 15년째다. 비전문취업비자(E-9)를 받고 일하는 외국인 근로자 수는 20만 명을 넘었다. 그렇다면 사장님의 나쁜 행동들은 이제 사라졌을까?

올해 8월 '장갑 주세요'라고 말하는 이주노동자가 한국 관리자로 보이는 사람에게 폭행당하는 영상이 공개되어 공분을 샀다. 며칠 전에는 강원도의 한 공장 기숙사에서 한국인 관리자가 여성 이주노동자들을 1년 동안 성추행했다는 의혹이 제기되기도 하였다. 산재사건 발생률은 한국 근로자보다 6배나 높은 실정이다. 그렇다면 왜 이주노동자들의 인권상황은 개선되지 않는 것일까?

"사장님 나빠요!, 고용센터 더 나빠요!"

인권상황이 개선되지 않는 이유는 이주노동자들의 이런 외침에서 찾을 수 있다. 고용센터는 고용허가제를 담당하는 고용노동부의 산하 기관이다. 왜 이주노동자들에게 고용센터는 사장님보다 더 나쁜 존재로 비춰지는 것일까? 그건 고용센터가 이주노동자들의 인권침해에 소극적이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현행 고용허가제도는 이주노동자들이 인권침해에 대해 적극적인 대응을 가로막고 있는 지경이다.

더 좋은 작업환경과 더 높은 임금을 제공하는 직장으로 옮기는 것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런데 그 자연스러운 일이 한국에서 일하는 이주노동자에게는 허용되지 않는다. 현행 고용허가제도는 확실하고도 명확한 인권침해가 일어났다는 것이 확인되는 경우에만 예외적으로 사업장 변경을 허용해 준다. 문제는 인권침해는 대부분 은밀하게 이루어지기 때문에 이를 명확하게 입증하는 게 쉽지 않다는 것이다. 이런 상황 속에서 이주노동자는 인권침해를 당해도 자포자기에 빠져버리기 쉽다.

작년에 제주에서 이주노동자 한 명이 선장으로부터 밀쳐져 바다에 빠지는 사건이 있었다. 이주노동자는 지속적으로 선장으로부터 폭행과 폭언을 당했고 경찰서와 고용센터에 여러 차례 찾아가 도움을 요청하였지만, 바다에 빠져 죽을 고비를 넘기고서야 사업주에 대한 처벌과 사업장 변경절차가 진행되었다. 죽을 고비를 넘기는 피해를 당해서야 사업장 변경이 허용되는 현실은 이대로 괜찮은가?

사업주가 노동자에게 임금을 제대로 지급하지 않은 것은 명백히 근로기준법 위반이다. 따라서 근로기준법 위반 사업장을 떠나겠다는 이주노동자의 요청은 즉각 받아들여져야 함에도 현행 고용허가제도는 '월 임금의 30% 이상의 금액을 2개월 이상 지급하지 않거나 지연하여 지급한 경우' 등 아주 예외적인 경우에만 사업장 변경을 허용해주고 있다. 근로기준법 위반 사업장을 정부가 비호하고 있다는 비판을 피하기 어렵다.

이주노동자들은 열악한 작업환경에 놓여 있다. 하지만 동료 근로자들이 산재로 다쳐나가는 걸 목격하고, 다음 피해자는 내가 될 수도 있다는 위험을 호소해도 현행 고용허가제도는 사업장 변경을 허용하지 않는다. 산재로 한쪽 팔의 기능 대부분을 잃어 계속 치료를 받고 있는 이주노동자는 최근 나에게 이런 질문을 던졌다. "내가 목격한 산재 사건만 열 번이 넘는데 어떻게 이런 회사도 계속 이주노동자를 고용할 수 있나요? 한국법은 그런가요?"

산재가 발생해도 사업주가 신규로 이주노동자를 배정받는데 아무 문제가 없다. 이주노동자 신규 배정에 있어 사업주는 최근 2년 이내 산재 사망자가 1명이면 감점 1점, 2명 이상 사망해도 2점 감점을 받는 것 외에 불이익을 받는다. 반나절 동안 진행되는 사업주 교육 참여 시 가점 1점을 받는 것과 비교해 볼 때 그 불이익이란 너무나 미미하다. 이주노동자는 자신이 배치되는 사업장이 그렇게 위험천만한 곳인지 전혀 알지 못한 채 일을 하다 또 다치고 죽어나간다. 그래서 이주노동자들은 이렇게 외치고 있다.

"우리는 죽으러 오지 않았다."

오늘(12월 18일) 세계 이주노동자의 날을 사흘 앞두고, 지난 일요일 진행된 문화제에서 노동자들이 외친 구호다. 나는 사업장에서 인권침해 피해를 입고 도움을 요청하는 이주노동자를 만날 때면 신안군 염전 노예 사건 피해 장애인들이 떠오른다. 그 당시 피해 장애인들 대부분은 그곳에 가면 돈을 많이 벌 수 있다는 직업소개소의 거짓말에 속아 섬에 갇혀 노동력 착취를 당했다. 다소 심한 표현일지도 모르겠지만, 국가가 이런 문제를 방치한다면 고용허가제도는 또 하나의 아주 나쁜 직업소개소가 될지 모른다.

(사진=게티이미지코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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