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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잇] 올해가 너무 빨리 지나가버렸다 느끼는 분들께

김지용 |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정신과 의사들이 참여하는 팟캐스트 <뇌부자들> 진행 중

[인-잇] 올해가 너무 빨리 지나가버렸다 느끼는 분들께
아마 요즈음 전 국민이 알게 모르게 가장 많이 내뱉는 말은 '벌써 연말이네'일 것이라고 추측한다. 어느덧 연말이다.

이맘때가 되면 누가 시키지 않아도 다들 자연스럽게 지나간 한 해를 돌아본다. 마음 같아선 모두가 그랬으면 좋겠지만, 연초의 계획들을 모두 이루고 성취감 가득한 한 해를 보낸 사람은 얼마나 있을까? 아무래도 진료실에서는 후회와 그에 따라오는 우울감을 많이 접한다.

"한 해가 끝나는데 한 게 하나도 없고, 저는 아직도 여기 정신과에 앉아 있네요. 이런 생각들 때문에 다시금 우울해지는 것 같아요."

각자의 지난 1년이 모두 달랐던 만큼, 그때 따라오는 생각과 감정 또한 제각각일 것이다. 흥미로운 점은 사람들이 시간의 속도 또한 다르게 느낀다는 것이다. 분명 모두에게 똑같았던 길이의 1년이란 시간에 대해 다르게 말한다.

"너무 식상한 이야기지만 시간이 참 빠르네요. 한 게 없는 것 같은데 벌써 올해가 다 끝났네요."

"진짜 올해는 너무 길었던 것 같아요. 한 게 없어서 그런 걸까요? 대체 어떻게 이렇게 시간이 안 갈까요."

한 해 동안 이룬 것이 없다고 동일하게 말하면서도 시간의 속도는 다르게 느낀 이 차이는 무엇에 의해 생기는 걸까? 유심히 보다 몇 가지를 깨닫게 된다. 첫째는 '고통'이다. '인생은 짧다. 고통이 인생을 길게 느껴지게 만든다.' 올해 출간된 <백 살까지 유쾌하게 나이 드는 법>이란 책의 저자인 85세 정신과 의사 이근후 선생님의 말이다.

삶은 고통이라는 쇼펜하우어의 말도 있듯, 지난 1년간 우리 모두에겐 고통의 순간들이 있었을 것이다. 어느 정도의 고통은 우리를 붙잡을 수 없다. 발목 깊이의 찰랑거리는 물에서는 평소와 다름없이 움직일 수 있듯이. 그런데 고통의 수심이 깊어지기 시작하여 몸이 잠길 때, 그래서 고통이 내 삶에 깊숙이 스며들었을 때 변화가 생긴다. 깊은 물 속에서 운신이 느려지고 답답한 것처럼, 시간이 느리게 흘러가기 시작한다.

이는 내 기억을 뒤집어봐도 얼추 맞는 것 같다. 세상과 나 사이에 각기 다른 시간대가 존재한다는 것을 국가에서 입증해주는 곳이 있으니 바로 군대이다. 내가 직접 가기 전에는 '국방부 시계는 느리게 간다'라는 말이 그토록 강력한 진실인지 몰랐었다. 의사가 된 후 군대를 가느라 친구들보다 10년 이상 늦게 입대한 후에야 과거에 내가 얼마나 큰 잘못을 저질렀는지 깨달았다. '여기는 시간이 안 가. 너랑 놀던 때가 그립다'라는 친구들의 손편지에 답장하지 못했던 것이, 휴가 나온 친구에게 '얼마 전에 봤었는데 벌써 또 휴가냐?'라고 말했던 것이 후회가 됐다.

그런데 분명히 시간의 속도를 조절하는 요인이 고통만은 아니라는 것을 자주 보게 된다. 진료실에 오시는 분들은 모두 삶의 고통 구간을 지나는 중이다. 고통 중에서도 시간의 속도가 너무 느려지지 않게 바로잡아주는 요인은 다름 아닌 희망이다. 너무나 힘든 상황에서도 마음 깊숙한 곳에 밝은 미래에 대한 희망이 존재하는 분들, 많이 힘들지만 이겨낼 수 있는 힘듦이라고 느끼는 분들은 삶의 고통 구간을 정상 속도로 지나간다. 그래서 올 한 해가 너무 빨리 지나갔다고 말한다.

문제는 이 희망까지 없는 경우이다. 희망이 안 보이니, 삶의 고통 구간이 마치 꽉 막힌 터널처럼 끝나가지 않는다고 느껴진다. 이 정체가 언제 풀릴지 보이지 않는다. 출구가 아예 존재하지 않는다고 느낄 때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이 죽음이다. 자살의 위험성을 가장 높이는 요인이 무망감(희망이 없다는 느낌)인 것은, 안 그래도 힘든 시간을 더 길게 느껴지게 만들기 때문일 것이다.

고통과 희망. 물론 더 추가적인 요인들도 있겠지만, 이 두 가지를 축으로 사람들이 느끼는 시간의 속도가 달라진다.

2019년이 끝나가는 요즘, 글을 읽는 당신은 어떤 생각이 드시는지? 한 해가 너무 빠르게 지나갔다고 느낀다면 축하드린다. 그것은 아마도 고통의 수심이 너무 깊지 않았거나, 혹은 크게 고통스러웠더라도 그 고통에 끝내 삼켜지지 않고 희망을 품고 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한 해가 너무 길게 느껴진 분들도 계실 것이다. 정말 수고 많으셨다. 혹시 내년도 올해와 똑같을 것처럼 느껴지고 희망이 보이지 않더라도, 조금만 더 버텨 보시길 바란다. 한 해 동안 잘 버텨낸 스스로를 칭찬하고, 도움받은 누군가들에게 감사하며 조금만 더 의지해보기를 바란다. 지금 지나고 있는 이 어두운 터널 같은 구간에도 반드시 출구는 있다. 대개는 휘어진 터널이라 출구 바로 앞까지 가기 전까지 보이지 않을 뿐이다.

'어떻게든 살아가고자 애쓰면 마법처럼 막다른 곳에서 새로운 세상이 열린다. 이게 여든다섯 해를 살아본 내가 당신에게 말할 수 있는 단 하나의 진리다.' 앞서 소개한 이근후 선생님의 말이다. 오랜 기간 동안 많은 사람을 만나며 도달한 이 진리를 우리 한 번 믿어봐도 좋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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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잇 사람과 생각을 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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