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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잇] 우울증을 겪는 친구에게 당신이 줄 수 있는 것

장재열|비영리단체 청춘상담소 '좀놀아본언니들'을 운영 중인 상담가 겸 작가

[인-잇] 우울증을 겪는 친구에게 당신이 줄 수 있는 것
상담을 하다 보면, 종종 듣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자기 속마음을 꺼낼 수 있는 환경이 적어서 마음의 병이 더 커지는 것 같다고요. 우리나라도 '유럽이나 미국 같은 데'처럼 자기 고민을 상담 받거나, 정신과 문을 열고 들어가는 게 흠이 아닌 문화이면 좋겠다는 이야기 말이지요. "거기 사람들은 정신과 다녀왔다고 주변에도 스스럼없이 말한다면서요?"라는 말도 자주 듣고요. 저는 매번 "그런가요. 하하"라는 말과 함께 모호한 미소로 넘길 수밖에 없습니다. 진짜 그런지는 사실, 저도 잘 모르거든요.

사실 정신건강 인프라의 측면만 본다면, 산업사회화와 도시화가 빨랐던 서구권의 시스템이 한국 사회보다 잘 구축된 건 명백한 사실입니다. 독일에서는 정신건강 치료의 100%를 건강보험에서 지원하고, 핀란드는 국가가 운영하는 모든 공공의료센터에 정신과 간호사를 두고 있지요. 학교도 마찬가지고요. 하지만 인프라가 충분하다고 해서, 그 나라들에 사는 사람들의 '인식'까지 개방적이라고 쉽게 단정하기는 어렵지 않겠습니까?

그런 제 궁금증, "서구권의 사람들은 정말 자신의 정신건강을 커밍아웃하는 것에 스스럼이 없는가?"에 대해 지인인 한 정신의학 전문의가 "글쎄?"라는 말과 함께 권해준 책이 있습니다. 미국의 작가인 네드 비지니의 소설, '이츠 카인드 오브 어 퍼니 스토리'입니다. 2010년 영화로도 만들어져 소소한 반향을 일으켰다지요. 본작의 주인공, 미국 고딩 크레이그를 보면 어쩐지 낯설지 않으실 겁니다. 드라마 스카이캐슬의 예서, 또는 서준이를 닮아있거든요. 어떻게 비슷하냐고요? 이 친구의 독백을 한번 들려드리겠습니다.

"왜 다른 아이들은 나보다 뛰어난 걸까? 이유는 단 하나, 그들이 나보다 뛰어나기 때문이었다. 나는 그런 재능을 가지고 있지 못했다. 우리 엄마는 뭔가 잘못 알고 있었다. 나는 그저 나쁘지 않은 머리를 가지고 열심히 노력했을 뿐." 정말 스카이캐슬의 대사라고 해도 전혀 위화감이 없지요? 그의 면면을 보면 더욱 공감 가실 겁니다.

뉴욕 최고의 명문고를 다니고 있는 크레이그는 명문대 입시를 위한 스펙이 삶의 전부입니다. 공부와 입시만이 자신의 존재를 입증해주고, 성공을 보장해 줄 거라 믿는 크레이그. 하지만 주변에 수재는 차고 넘칩니다.

점점 더 멀어지는 것 같은 성공. 아무리 애써도 뒤처지는 것 같은 압박감의 굴레는 17살 소년의 멘탈을 부숴버리다 못해 우울증과 거식증, 그리고 자살시도의 늪으로 내몰고 맙니다. 심지어 누군가에게 털어놓지도 못하지요. 부모님은 근심하실 테고, 친구들은 (나보다 좀 더 우월한) 경쟁자니까요. 혼자 버텨내려 안간힘을 써보지만, 역부족이었던 소년은 무려 새벽 5시에 '스스로' 정신병원을 찾아갑니다. 하지만 그의 앞에는 생각지도 못한 세 가지 문제가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첫 번째, 이곳은 내 생각보다 훨씬 심각한 환자들이 있는 곳이라는 것. 두 번째, 당장 나가려 했지만, 입원 수속을 밟은 이상 최소 일주일은 입원해야 한다는 것. 세 번째, 일주일이나 결석했으니, "크레이그 정신병원에 입원했대."라고 소문이 날 거라는 것. 하지만 어쩌겠습니까. 어떻게든 일주일을 빨리 보낸 채, 퇴원을 하는 수밖에요.

이 영화의 핵심은 이 '일주일'에 있습니다. 망상증, 상습 자해, 섹스 중독 등의 중증 환자들과 함께 보내는 시간. 아이러니하게도 우리의 눈에 '가장 덜 심각한' 크레이그가 '더 심각해 보이는' 그들로 인해 치유되는 과정을 작품은 담담히 그려냅니다. '정신 질환자'라고 불리는, 보통 사람과는 다른 시선을 가진 이들과 어울리며, 크레이그 역시 삶을 바라보는 '시선'이 확장되고 변화하지요.

작품을 본 누군가는 이런 이야기를 하더군요. 픽션은 픽션일 뿐이고, 크레이그는 너무 운이 좋은 아이라고요. 실제 사회에서는 우울증 환자 주변에 저렇게 많은 지지자는 없다고요. 맞습니다. 우리는 아직 우울증을 앓는 주변인에게 어떤 시선을 전해야 할지, 어떤 말을 건네야 할지 익숙지 않은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 작품에 붙여진 별칭, '우울증을 겪는 사람에게 추천하는 명작'이라는 이름에 반대합니다. 오히려 우울증을 겪는 주변인을 둔 사람에게 추천하는 작품이랄까요.

지금 여러분 주변에도 우울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는 소중한 사람이 있다면, 그런데 당장 무슨 말을 해줄지 떠오르지 않는다면, 잠시 멈춰서 소설 속 그들의 일주일을 살짝 엿보면 어떨까요? 한국이나 미국이나, 우울을 겪는 사람의 고립감은 크게 다르지 않고, 그들에게 필요한 목소리와 손길 역시 크게 다르지 않으니 말입니다.

#인-잇 #인잇 #장재열 #러닝머신세대
인잇소개
   
인잇 사람과 생각을 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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