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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파일] 프리스커트 캠페인 3 - "여성은 치마" 고정관념 재생산하는 학교

[취재파일] 프리스커트 캠페인 3 - "여성은 치마" 고정관념 재생산하는 학교
"근데요 사장님.
골뱅이 1만 5천 원, 두루치기 1만 2천 원, 뿔소라가 8천 원.
이 안에 제 손목 값이랑 웃음 값은 없는 거예요.
저는 술만 팔아요. 여기서 살 수 있는 건 딱 술, 술뿐이에요."


최근 큰 인기를 얻었던 드라마 <동백꽃 필 무렵>에서 동백이(공효진)가 자신의 식당에서 진상을 부리는 손님에게 했던 말입니다.

우리는 삶에 필요한 무언가를 위해 비용을 지불하며 살아갑니다. 필요한 게 물건이든 서비스든 그 값어치만큼의 돈과 등가교환합니다. 공급자로서의 위치, 돈을 내는 자로서의 위치가 복합적으로 씨줄, 날줄처럼 얽혀 개개인의 일상을 구성합니다.

그런데 이 등가교환의 법칙이 종종 무너지는 곳이 있으니 서비스 산업입니다. 광의에서 서비스 산업은 무형의 재화를 생산하는 업입니다. 그 중에서도 오늘 얘기하고 싶은 건 누군가를 응대하거나 편의를 제공하는 일, 누군가의 안전을 책임지는 일, 누군가의 고충을 해결하는 일, 이런 일을 하는 서비스업 종사자들입니다. 항공사 승무원, 비서, 안내데스크 직원, 서빙 직원, 콜센터 직원 등이 있겠습니다.
백화점 여성 근로자
이들은 한 명의 직업인으로서 사람들이 필요로 하는 무형의 재화를 공급합니다. 기내 안전, 사람들이 필요한 정보를 얻을 수 있도록 돕는 일, 주방에서 만들어진 음식을 테이블에서 받아 볼 수 있도록 하는 일 등. 사람들은 이런 서비스를 필요로 해 비용을 지불합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종종 이 직종에 종사하는 여성 직업인에게 유독, 지불한 비용에 약속된 것 이상을 기대하고 요구합니다. 외국인들이 '어메이징 코리아'라고 찬사(?)를 보내곤 하는 극도의 친절과 미소, 아름다운 몸가짐…. 일명 '서비스 정신'이라고도 불리는 것들입니다.

등가교환의 법칙이 무너진 자리엔 공급자와 수요자 간의 동등한 관계 대신, 모셔지길 바라는 사람(고객)과 모셔야 하는 사람(서비스업 종사자)간의 기울어진 위계 관계가 형성됩니다. 크고 작은 갑질과 성희롱이 빈번하고, 그 과정에서 당당한 한 명의 서비스 산업 직업인으로서의 자긍심이 훼손되곤 하는 사례를 우린 종종 목도합니다.

"당신이 지불한 비용에 약속된 것만 요구하라"는 동백이의 당당한 일갈이 많은 사람들에게 사이다 같은 속 시원함을 선사한 이유일 겁니다.

서비스 산업 여성 종사자가 선택의 여지없이 입어야 하는 치마 유니폼은 그런 불균형한 위계 관계를 드러내 보이는 하나의 상징입니다. 타이트한 치마로 표현되는 '단정한 몸가짐'은 과연 우리가 지불한 서비스 비용에 포함된 것일까요? 서비스 업무 효율성에 역행하는, 타이트하게 붙어 몸매가 고스란히 드러나는 치마 유니폼, 왜 입어야 하는 걸까요?

SBS 이슈취재팀이 26일 보도한 대로 여성 직장인에게 치마를 지급하는 회사들도 막상 치마 유니폼을 입어야 한다는 '사내 규정'을 가진 곳은 거의 없었습니다. 치마 유니폼이 꼭 필요하다고 주장한 곳도 찾아보기 힘들었고 대부분 관행이라는 말만 반복했습니다.
프리스커트_'치마 유니폼' 강요받는 여성 노동자들…규정 없는데 왜?
▶ '치마 유니폼' 강요받는 여성 노동자들…규정 없는데 왜? (SBS 8뉴스, 11월 26일)

이 관행의 시작을 쫓다 보니 그 실마리 중 하나를 교육 현장에서 찾을 수 있었습니다. 여러 대학들은 서비스 학부 아래 비서사무행정학과나 항공운항서비스학과를 둡니다. 서비스 산업에 종사하는 미래 인력을 양성하는 곳인데, 바로 이 곳에서 치마 유니폼에 대한 오랜 관행이 시작되고 있었던 겁니다.

서비스 학부가 있는 수도권과 지방의 여러 대학을 취재한 결과, 이 학과 학생들은 모두 '과복'이라고 불리는 치마 유니폼을 맞춰야 했습니다. 한 벌에 40만 원을 웃도는데 '과복'을 사는 건 선택이 아니라 필수라고 말했습니다.

[충남 OOOO대 학생 : 무릎 위로 올라오는 짧은 치마인데 과복이라 구입해서 입어야 돼요. 안 입고 다니면 선배들한테도 혼나지만 교수님한테도 지적 받아요. 과복 안 입고 등교하면 교수님이 학점을 깎아서 안 입고 다닐 수가 없어요. 심지어 검스(검은색 스타킹)도 못 신게 해서 겨울에는 너무 추워요. 정장 바지를 입고 다니고 싶은데 선택의 여지가 없어요.]

한 대학교를 직접 찾아 갔습니다. 청바지, 롱스커트 등 자유로운 복장으로 캠퍼스를 누비는 학생들 사이로 무릎 한참 위로 올라오는 타이트한 치마에, 살색 스타킹, 왁스로 빚어 넘긴 쪽진 머리를 하고 종종 걸음을 하는 학생들 무리가 눈에 띄었습니다. 서비스 학부에 속한 학생들이었습니다.

이런 불편한 치마 유니폼을 입고 학생 때부터 익혀야 하는 '서비스 정신'이 대체 무엇인지, 학과 사무실에도 가보고, 교수 인터뷰도 시도했습니다. "옛날부터 그렇게 입어 왔다", "취재를 거부하겠다. 우리 애들에게도 말 걸지 말아 달라"는 답변이 돌아 왔습니다.

다행히 학생들은 학교의 구태의연한 관행과는 다른 생각을 갖고 있었습니다. 잘못된 말을 하는 게 아니니 모자이크나 음성 변조를 하지 않아도 된다고 한 학생들, 이렇게 말했습니다.
프리스커트_'치마 안 입으면 점수 깎여요
[조민지·이지연·김서영/OO대 학생 : 요즘은 사회 나가서 비서로 일해도 캐주얼(바지) 정장을 입고 일하지 않나요. 누가 이렇게 꽉 끼는 치마를 입고 일하나요? 한 벌에 40만 원씩 하는데 안 살 수도 없고, 왜 입어야 되는지 잘 이해가 안 돼요. 다리에 이상이 있다고 진단서를 끊지 않는 이상 무조건 과복을 입고 다녀야 돼요. 저희도 바지 입고 학교 다니고 싶어요.]

관행, "원래 그렇게 입어 왔다"는 말은 시대착오적인 구습을 존치시키는 매우 손쉽고 편리한 설명입니다. 그 관행이 때론 직업인으로서의 자긍심을 훼손하고, 때론 성차별의 빌미로 작용한다면 그 관행의 본질적인 의미를 다시 곱씹어 볼 필요가 있습니다. 특히 미래 사회 구성원들을 길러내는 배움의 공간이 성별 고정관념을 재생산하는 곳으로 머무른다면, 사회는 늘 제자리일 수밖에 없을 겁니다.

▶ [취재파일] 프리스커트 캠페인 1 - 치마 유니폼에 담긴 고정관념에서 자유로워지자!
▶ [취재파일] 프리스커트 캠페인 2 - 치마만 입어야 하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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