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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적북적] '인생 소설' 후보로 일요일의 문을 열어요! - 더 리더: 책 읽어주는 남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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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룸] 북적북적 217: '인생 소설' 후보로 일요일의 문을 열어요! - <더 리더: 책 읽어주는 남자>

"때로는 나 스스로 어서 계속해서 읽어야겠다는 마음이 생기기도 했다. 해가 길어지기 시작했을 때 나는 황혼 속에서 그녀와 함께 침대에 머물고 싶어서 더 오랫동안 책을 읽었다. 그녀가 내 몸 위에서 잠이 들고, 마당의 톱질 소리도 잠들고, 지빠귀의 노랫소리가 들려오고, 그리고 부엌에 있는 물건들의 색깔 중에서 약간 밝거나 약간 어두운 잿빛 색조만이 남게 될 때면, 나는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했다."

오늘 '북적북적'에선 동명의 영화 [더 리더: 책 읽어주는 남자]의 원작 소설을 읽습니다. 스티븐 달드리 감독이 연출하고, 케이트 윈슬렛과 레이프 파인즈가 연기한 영화도 정말 걸작이지만, 원작 소설은 더더욱 그러합니다. 여러 번에 걸쳐 나타나는 반전 같은 전개가 단순히 재미나 충격을 위한 게 아니라, 그 전환마다 천 갈래 만 갈래의 생각과 감정들, 끝까지 질문을 던지는 주제의식이 얽혀있는 걸작입니다. 섬세한 심리묘사와 사유들을 곱씹으며, 묵직한 '읽는 재미'를 느낄 수 있습니다.

"나는 그녀의 몸과 태도와 몸놀림이 가끔 굼떠보였다고 기억한다. 그렇다고 그녀가 몸이 무거웠다는 뜻은 아니다. 오히려 그녀는 자신의 몸의 안쪽으로 들어가 앉아 자신의 몸을 몸 자체에, 그리고 머리가 내리는 어떤 명령에도 방해받지 않는 그 나름의 조용한 리듬에 내맡긴 채 외부 세계를 잊어버린 듯이 보였다. 바로 이와 같은 외부 세계에 대한 망각이 그녀가 스타킹을 신을 때의 모든 태도와 몸놀림에도 깃들어 있었다. 그러나 스타킹을 신을 때의 그녀의 태도는 굼뜨지 않고 오히려 유려하게 우아하고 고혹적이었다. 그것은 젖가슴과 엉덩이와 다리에 대한 유혹이 아니라 몸의 내면으로 깊이 들어가 바깥세상을 잊어버리라는 요구였다."

이 소설의 배경은 1950년에서 60년대 언저리 어디쯤의 독일입니다. 주인공 소년인 나는 고등학생이고요. 황달에 걸렸다 나아가던 회복기에 오랜만에 외출에 나섰다가 길에서 곤경을 겪던 중에 30대 중반의 한 여성에게 도움을 받습니다. 그리고 그녀와 사랑에 빠집니다.

" "이름이 뭐예요?"

나는 그녀에게 일곱째인가 여덟째 되는 날에 물어보았다. 그녀는 내 몸 위에서 잠이 들어있다가 막 눈을 떴다. 나는 그때까지 당신이라든가 너라는 호칭을 피했었다.

그녀는 놀라서 벌떡 일어났다.

"뭐라고?"
"이름이 뭐냐고요!"
"그건 왜 알려고 그러니?" 그녀는 나를 의심하는 눈길로 쳐다보았다.
"당신하고 나는… 나는 당신 성만 알고 이름은 모르잖아요. 난 당신의 이름을 알고 싶어요. 그게 뭐 잘못되기라도…"

그녀는 웃었다.

"아무것도 아니야, 꼬마야, 아무것도 잘못된 거 없어. 내 이름은 한나야."

그녀는 계속해서 웃었다. 웃음을 그치지 않았다. 그 바람에 나도 덩달아 웃었다.

"당신 모습이 정말 우스꽝스러워 보여요."
"난 반쯤 잠들어 있었거든. 네 이름은 뭐니?"

나는 그녀가 내 이름을 알고 있을 걸로 생각했다. 학교에서 쓰는 물건들을 책가방에 넣어가지고 다니지 않고 겨드랑이에 끼고 다니는 것은 정말 멋진 일이었다. 그래서 내가 나의 물건들을 그녀의 부엌에 있는 테이블에 올려놓으면, 맨 위에, 즉 공책들뿐만 아니라 책들 위에 적혀있는 내 이름이 보였다. 나는 책들을 튼튼한 종이로 싸고 거기에다 책 제목과 내 이름을 적은 표찰을 붙여놓곤 했다. 그러나 그녀는 그것을 보지 못했던 모양이다.

"내 이름은 미하엘 베르크예요."
"미하엘, 미하엘, 미하엘."

그녀는 내 이름을 음미했다.

"내 꼬마의 이름은 미하엘이고, 대학생…"
"고등학생이에요."
"…고등학생이고 나이는, 열일곱 살?"

나는 그녀가 내게 덧붙여준 두 살을 자랑스럽게 여기며 고개를 끄덕였다."


몇 번이고 몸을 섞고 난 뒤에야 이름을 확인하는, 외부의 시선에서 바라보자면 '뻔하디 뻔한' 관계입니다. 그러나 그 관계 내부에는 '몸의 내면으로 들어가 바깥세상을 잊어버리는' 절실한 사랑이 자리잡기 시작합니다.

지식인의 아들인 소년에게 스무 살 연상의 여인은 온통 미스터리입니다. 버스 차장 일을 한다는 것 말고는, 종잡을 수 없는 여자. 아마도 가난하게 살아온 쪽에 속하리라는 것, 아마도 배운 것이 별로 없으리라는 것. 그런 정도의 힌트가 간간이 드러나지만, 소년에게는 그런 것이 그때까지 제대로 보이지도 않습니다. 일견 별 뜻 없어 보이는 문장들 하나하나에 앞으로 일어날 일들에 대한 복선과 상징들이 듬뿍 들어있다는 걸 깨닫게 되는 건, 독자나 소년이나 한참 뒤의 일입니다. 그리고, 한참 사랑에 빠지기 시작하는 이들의 은밀한 만남에는 또 하나의 특이한 '루틴'이 자리 잡습니다. 소년 미하엘은 한나의 요구에 따라, 사랑을 나누기 전에 매일 그녀에게 조금씩 책을 읽어주게 됩니다.

" 그러나 다음 날 그녀와 만났을 때 그녀에게 키스를 하려고 하자, 그녀는 몸을 뺐다.

"그전에 먼저 내게 책을 읽어줘야 해."

그녀의 말은 진심이었다. 나는 그녀가 나를 샤워실과 침대로 이끌기 전에 반 시간 가량 그녀에게 [에밀리아 갈로티]를 읽어주어야 했다. 이제는 나도 샤워하는 것을 좋아하게 되었다. 내가 그녀의 집에 올 때 함께 가져온 욕망은 책을 읽어주다 보면 사라지고 말았다. 여러 등장인물들의 성격이 어느 정도 뚜렷이 드러나도록 또 인물들에게서 생동감이 느껴지도록 작품을 읽으려면 꽤 집중력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샤워를 하는 가운데 욕망은 다시 살아났다. 책 읽어주기, 샤워, 사랑 행위, 그러고 나서 잠시 같이 누워 있기. 이것은 우리 만남의 의식이 되었다.
그녀는 신경을 곤두세워 경청했다. 그녀의 웃음소리, 경멸에 차서 씩씩대는 소리, 그리고 격분하거나 동조하여 지르는 외침 등은 그녀가 줄거리를 극도로 긴장하여 좇고 있으며 에밀리아와 루이제를 모두 어리석은 계집애들로 생각하고 있다는 반증이었다. 계속해서 읽으라고 나를 재촉할 때 보여준 그녀의 초조감은 그녀들이 어서 어리석음을 벗어던지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나온 것이었다. "도대체 그게 사실이라니!" 때로는 나 스스로 어서 계속해서 읽어야겠다는 마음이 생기기도 했다. 해가 길어지기 시작했을 때 나는 황혼 속에서 그녀와 함께 침대에 머물고 싶어서 더 오랫동안 책을 읽었다. 그녀가 내 몸 위에서 잠이 들고, 마당의 톱질 소리도 잠들고, 지빠귀의 노랫소리가 들려오고, 그리고 부엌에 있는 물건들의 색깔 중에서 약간 밝거나 약간 어두운 잿빛 색조만이 남게 될 때면, 나는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했다."


[더 리더]를 읽으면서, 새삼 책을 읽어준다는 행위에 대해서도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됐습니다. '북적북적'을 들어주시는 분들께 저도, '책 읽어주는 여자'이다 보니까요^^
책을 읽어준다는 행위에는 참 여러 가지 향기와 느낌들이 깃들어 있습니다. 미하엘은 사랑하는 스무 살 연상의 연인이 키스 전에 책부터!라고 명령하니까 마지못해 책을 읽기 시작했지만, 정작 책을 읽어주다 보면, 방금 읽은 문장대로 "등장인물들의 성격이 어느 정도 드러나고 생동감이 느껴지도록 작품을 읽으려면 꽤 집중력이 필요했기 때문에" 샤워하기 전까지는 그야말로 낭독에만 집중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 대목 뒤에는 한나의 생기 넘쳤던 반응들이 기술돼 있을 뿐이지만, 사랑하는 여자가 자신의 낭독을 들으며 그토록 살아있는 반응들을 보였다는 것을 단순히 전달하는 그 문장들 사이의 행간에서, 그때 그 소년 미하엘의 마음이 손에 잡힐 듯 튀어나오는 것 같습니다. 그것이 그에게, 그들에게, 얼마나 행복하고 사적인, 소중한 시간이었는지도요. 미하엘이 책 읽어주는 남자, 가 되지 않았다면, 오후의 정사만으로, 이들의 인생이 그 후 이 관계로부터 영원히 놓여날 수 없는 어떤 궤적들을 그리게 되지는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제가 어렸을 때 엄마와의 시간 중에 가장 좋았던 건, 잠들기 전에 엄마가 머리맡에서 책을 읽어주던 시간이었어요. 엄마가 머리맡에서 완독 했던 동화책 단편집을 저는 아직도 갖고 있습니다. 며칠 전에 마침 대청소를 하다 오랜만에 그 책을 다시 봤는데, 여전히, 버릴 수가 없더라고요. 사랑하는 사람이 읽어주는 책 낭독을 듣는다는 것. 제가 경험해 봐서, 그게 얼마나 포근하고 잊을 수 없는 일인지 잘 압니다. 그런데 이제 수십 년이 지나서, [더 리더: 책 읽어주는 남자]를 다시 읽으면서는, 읽어준다는 행위에 대해 좀 더 생각하게 되네요. 사랑하는 사람에게 책을 읽어주는 일은 읽는 그 사람에게도 스며들어 깊이 각인되는 일이라는 것을요. 북적북적을 들어주시는 모든 분들께, 그런 마음으로 책을 읽고 싶다는 생각도 감히 새삼 들었습니다^^

이 책의 1부는 계속해서 수수께끼처럼 굴 때가 많은 한나의 행동, 당연한 듯이 따라오게 되는 균열과 갈등, 그리고 어느 날 갑자기 한나가 사라지는 것으로 끝이 납니다. 미하엘에게 한나의 갑작스런, 아무 통보 없는 증발이 남긴 상처는 굉장히 깊었겠죠.

미하엘은 법대생이 됩니다. 그리고 몇 년 뒤, 법학도로서 참여하게 된 세미나 때문에 재판 방청을 시작하게 되고, 거기서 한나를 다시 만납니다.

한나는 미하엘을 만나기 전에, 아우슈비츠 수용소의 감시원이었고, 전범 피의자로 그 법정에 서 있었습니다. 그냥 아우슈비츠 수용소의 감시원일 뿐만 아니라, 2차 대전 막바지에 수감됐던 유대인들을 이끌고 이동하던 중, 수백 명을 교회에 몰아넣고 숙소로 이용하다가, 그 교회에서 불이 났는데도 밖에서 그 문을 열어주지 않아 수많은 사람들을 끔찍하게 타 죽게 했다는 혐의를 받고 있었습니다.

"당신들 중 누구도 뒤로 빼지 않고, 모두 함께 행동했습니까?"

"네."


"당신은 당신이 수감자들을 죽음으로 보내고 있다는 사실을 몰랐습니까?"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새로운 사람들이 왔고, 이전 사람들은 새로운 사람들을 위해 자리를 양보해야 했습니다."

"그러니까 당신은 자리를 만들어야 했기 때문에 '당신 그리고 당신 그리고 당신은 후송돼서 죽어야 해'라고 말했나요?"

한나는 재판장이 한 질문의 의도를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니까 저는…제 말은…하지만 재판장님 같았으면 어떻게 했겠습니까?"

한나는 진심에서 그렇게 물은 것이었다. 그녀는 자신이 어떻게 달리 행동해야 했는지, 어떻게 달리 행동할 수 있었는지 정말 몰랐다. 그래서 그녀는 모든 걸 다 아는 것 같은 제판장에게 그 같으면 어떻게 행동했겠는지 듣고 싶었던 것이다."


이 책이 진짜 시작되는 건, 사실 여기서부텁니다. 여러 번에 걸친 반전을 누설할 수 없어 여기선 더 이상 말씀드릴 수 없지만요. 놓여날 수 없는 한없는 사랑 이야기이기도 하고, 독일의 2차 대전 전후 세대가 자신들과 부모들에게 던지는 질문과 어떤 답변들의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에로틱한 사랑 이야기로 시작했지만, 한나와 미하엘 사이, 독일의 전쟁 세대와 전후 세대의 대화가 그 사랑을 은유로 해서 드리워져 있습니다. 거듭 '반전'이라는 단어를 쓰는 게 경박하게 들리기도 할 것 같은데, 이 책의 모든 반전들은, 그 자체로 주제의식이고, 더더욱 커져가는 삶과 역사에 대한 보편적인 질문들입니다.

거대한 역사의 톱니바퀴에 이지러지고 비틀린, 시대와 나치즘에 대한 고찰이 담긴 책입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그저, 사람 하나하나 각자의 인생이란, 얼마나, 얼마나… 엄연하고 깊은 것인지… 절실한 마음으로 문득 가슴 깊이 느끼게 되는 사람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어느 쪽에 더 방점을 찍으며 읽든, 읽는 사람의 삶에, 미하엘과 한나가 함께 목욕했던 그 허름한 방에 드리우던 저녁 햇살 같은, 깊은 빛과 그림자를 함께 던져주는 작품에는 틀림없어요.
정말 좋은데, 어떻게 더 설명할 방법이 없네요!^^

미하엘과 한나를 이 겨울 초입에 꼭 한 번 만나보시기를 간곡히 말씀드려 봅니다.

들어주시는 모든 분들, 언제나, 고맙습니다.

*출판사 시공사의 낭독 허가를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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