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잇] '추억팔이'는 옛말…추억 '구독'하는 시대

박종환 | CJENM 뮤지컬 홍보 담당자. 걷기 모임 <같이 걸을까> 운영 중

SBS 뉴스

작성 2019.11.23 11:02 조회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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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튜브에는 2백 84만 명이 구독 중인 '온라인 탑골공원'이 있다. 종로에 위치한 공원이 아니라, 90년대를 주름잡던 음악방송들을 스트리밍하는 채널이다. 댓글을 훑어보니 어림잡아 10대부터 50대 이상까지 다양한 연령대의 구독자들이 보인다.

넷플릭스의 시청률 2위 프로그램은 90년대 '영어학원의 교과서'로 불리던 미국의 장수 인기 시트콤 '프렌즈'다. 전 세계적으로 OTT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프렌즈'는 독점 방영권을 가지고 있던 넷플릭스와 작별을 고하고 판권을 가진 워너미디어에 둥지를 튼다고 한다. '프렌즈'의 이동은 한쪽엔 '위기', 다른 한쪽엔 '전략'이 되었다.

90년대 음악방송과 고령 시트콤이 주류 시장의 주인공으로 떠오르고 있다. 2008년 금융위기의 힘든 삶을 추억으로 위로하고자 하는 심리에서 시작됐다는 이 '레트로' 현상은 추억, 회고, 회상을 뜻하는 레트로스펙트(retrospect)의 줄임말이다. 그러니 어제오늘의 일은 아니겠지만, 사람들이 더욱 본격적으로 추억하고 회상하기 시작했다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바야흐로 추억을 '사는' 시대다. '추억팔이'라고 업신여기던 시대는 지났다. 사람들이 과거의 것을 적극적으로 찾고 공유하기 시작하면서 경제, 사회, 문화의 방향성도 달라지기 시작했다. 너나 할 것 없이 팔 수 있는 '추억'을 구상하고 찾아내느라 여념이 없다.

디지털뿐 아니라 방송과 광고 패션 등 문화산업 전반이 변화하고 있고, 활용 방식도 다양해지고 있다.

이미 리메이크의 성공을 맛본 뮤지컬의 고장 미국의 브로드웨이와 영국의 웨스트엔드도 무비컬(기존 영화를 무대화 한 뮤지컬)과 주크박스(기존의 대중음악을 활용한 뮤지컬)에 관객이 몰린다는 것을 수년 전부터 더욱 실감하며 작품 개발에 열을 올리고 있다. 보증수표와 같은 <라이온킹>, <알라딘>, <보디가드>, <물랑루즈>에 이어 <백투더퓨처>와 마이클 잭슨의 신작 등 '추억'을 끊임없이 무대화하고 있다.

사람들은 왜 이렇게 '추억'에 집착하는 걸까?

기술의 발달은 무한경쟁 시대를 열었다. 불가능이란 없을 것만 같은 수많은 정보의 홍수 속에 우리는 숨을 허덕이며 살아간다. 사람들을 지치게 만들고 흥미를 잃게 했다. 개인이 선택하고 취할 수 있는 정보의 폭이 넓어지니 선택은 점점 더 어려운 일이 되어간다. 하지만 그럴수록 선택의 중요성은 커지고 선택에 대한 취향이 확고해지고 있다.

김난도 교수는 최근 발표한 <2020 트렌드 코리아>에서 '멀티 페르소나'라는 키워드를 통해 사람들의 취향 정체성이 점점 더 뚜렷해질 거라고 전망했다. 다음 소프트의 <2020 트렌드 노트>는 '변화하는 X세대 엄마'라는 항목에서 4050 여성들 사이에서 낭만에 대한 새로운 욕구가 커질 것이라고 내다봤다. 날카로운 상상력 연구소의 <라이프 트렌드 2020>도 '취향 인플레이션'이라는 키워드를 통해 체험 소비의 확산을 예측했다.

사람들은 경쟁에서 잠시라도 벗어나 자신만의 그 확고한 취향을 SNS에 인증하고 공유하며, 공통의 관심사를 만들어가기 시작했다. 또 취향대로 소규모의 그룹을 만들어 집중하고 삶의 즐거움을 얻는다. 이렇게 취향을 공유하는 경험 속에서 서로를 위로하고 격려하며 관계를 돈독히 다져가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경험은, 과거의 경험이 오늘의 추억이 됐듯이, 미래의 되돌아보고픈 추억이 된다.

철학자 발터 벤야민은 <서사, 기억, 비평의 자리>에서 사람들끼리 '경험을 나누는 것'이 '이야기'라고 말한다. 쉽게 얻을 수 있는 정보가 경험을 대신하는 이 시대에, 정보는 소진되지만 이야기(경험)는 소진되지 않는다는 것. 왜냐하면 이야기(경험)는 자신으로부터, 자신의 힘으로 만들어져 간직되어 왔기 때문에, 오랜 시간이 지나도 펼쳐질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다고 말한다.

'추억'은 끊임없이 진화하고 부활하며 사람들을 끌어당긴다. 그리고 디지털 시대를 만나 가치의 공유는 더욱 쉬워지고 확산의 속도는 한층 빨라졌다. 덕분에 추억은 삭막한 우리의 삶에 작은 쉼과 위로가 되고 있다. 이것이 오늘날 우리가 추억에 더 자주 지갑을 여는 이유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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