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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파일] 백건우의 '홧팅'…우리 모두를 위한 응원

[취재파일] 백건우의 '홧팅'…우리 모두를 위한 응원

아마추어 청소년 오케스트라와 협연한 백건우의 '손편지'

김수현 문화전문기자

작성 2019.11.21 15:52 수정 2019.11.21 15:53 조회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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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파일] 백건우의 홧팅…우리 모두를 위한 응원
전 세계 정상급 오케스트라와 협연해온 피아니스트 백건우가 지난 11월 10일, 세종문화회관 대극장에서 아마추어 청소년 연합 오케스트라와 협연했다. 세종 꿈나무 오케스트라, 서울 서대문 노원 강서 강남 서초구 아동 청소년 오케스트라, 평창 꿈의 오케스트라, 그리고 함께 걷는 아이들 올키즈스트라 관악단이 함께 한 오케스트라 페스티벌 공연에서였다.

나는 이 공연의 주축 멤버였던 세종 꿈나무 오케스트라를 취재하면서 백건우 선생과 아이들의 협연 리허설을 볼 기회가 있었다. 세종 꿈나무 오케스트라는 2010년 세종문화회관이 사회공헌사업으로 창단한 어린이 청소년 오케스트라다. 베네수엘라의 청소년 음악교육 시스템인 '엘 시스테마'가 전 세계적으로 화제가 되면서 국내에서도 비슷한 취지로 오케스트라가 여럿 창단됐는데, 이 중 계속 명맥을 잇고 있는 곳은 많지 않다. 세종 꿈나무 오케스트라가 가장 오래, 튼실하게 운영되고 있는 것 같다.

이 오케스트라는 풍요로운 사교육 기회를 얻기 힘든 지역아동센터와 학교에서 추천한 아이들로 구성되었다. 과거 서울시향 바이올린 주자로 활동했던 김은정 감독이 창단 때부터 지금까지 헌신적으로 운영해 오고 있다. 아이들은 오케스트라의 다양한 악기 중에 자신에게 맞는 악기를 골라 기초부터 익힌다. 아이들에게 악기를 빌려줄 뿐 아니라 김은정 감독이 초빙한 전문 강사들이 차근차근 지도한다. 이들은 매주 수요일 세종문화회관 연습실에 모여 연습한다. 처음에는 악보조차 볼 줄 모르는 아이들이 많았지만, 차차 음악에 재미를 붙이고, 친구들과 만나는 재미로 매주 수요일 저녁을 기다린다고 했다.

아이들은 오케스트라 활동을 통해 성취감과 자존감을 얻고, 협동과 연대의 방식을 익힌다. 다른 사람의 소리를 들을 줄 알아야 함께 연주할 수 있기에, 오케스트라 활동은 아이들이 사회에서 잘 살아갈 수 있는 힘을 길러주는 일이기도 했다. 음악가 양성을 목표로 만들어진 단체는 아니지만, 오케스트라 활동을 통해 몰랐던 자신의 소질을 발견하고, 음악가를 꿈꾸는 아이들도 늘어나고 있다. 선생님들의 도움을 받아 음대에 진학한 경우도 꽤 있다. 음대생이 된 아이들은 자신의 꿈을 키워준 오케스트라에 봉사자로 돌아와 후배 단원들을 가르친다.

그동안 세종 꿈나무 오케스트라는 매년 발표회를 열었지만, 세종문화회관 대극장이라는 큰 무대에 서는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창단 10년을 맞은 자축 무대이기도 했다. 게다가 협연자가 피아니스트 백건우라니! 공연의 취지에 공감한 백건우는 흔쾌히 재능 기부로 공연에 참여하기로 했다. 서울시향 부지휘자인 윌슨 응도 지휘자로 나섰다. 백건우와 협연하는 곡은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2번 1악장. '야심 찬' 선곡이었다.
오케스트라에서 찾은 꿈...'백건우와 협연해요
11월 10일에 열린 본 공연은 다른 취재 일정과 겹쳐 보지 못했지만, 공연 며칠 전에 열린 리허설을 본 것만으로도 뭉클했다. 피아노와 오케스트라가 처음 맞춰보는 날이었다. 사전 인터뷰에서 상기된 얼굴로 '백건우 선생님처럼 유명한 분과 같이 연주하게 되다니, 떨려요! 긴장돼요!'를 연발한 아이들. 지휘자 윌슨 응은 리허설을 시작하면서 유쾌한 표정으로 이렇게 말했다.

"자, 함께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즐겨봅시다!"

연주가 시작되자, 비록 프로 오케스트라처럼 매끄럽지는 못했지만, 아이들의 손끝에서 웅장한 화음이, 서정적인 선율이 흘러나왔다. 중단 없이 쭉 연주를 한 번 마친 후, 누가 먼저 시작했다 할 것도 없이 저절로 박수가 터져 나왔다. 이후 음악을 세부적으로 계속 다듬고 맞추는, 쉽지 않은 과정이 이어졌다. 연습이 예정보다 길어지면서 아이들이 힘들었을 텐데, 연주가 점점 좋아지는 걸 스스로도 느꼈는지 끝까지 집중하려고 애쓰는 모습이 참 예뻐 보였다.

연습이 끝난 후 피아니스트 백건우와 짧은 인터뷰를 했다.

Q. 공연에 어떻게 참여하게 되셨나요?
A. 얘기를 들어보니까 너무 아름다운 모임이더라고요. 같이 만나고 같이 음악을 한다는 게 저한테도 너무나도 큰 기쁨이 될 것 같고 의미가 있는 것 같아서, 그래서 하기로 했죠.

Q. 이 공연 때문에 멀리서 오셨는데.
사실 비엔나에서 미국으로 가야 하는데, 그사이에 들른 거예요.

Q. 오늘 처음 맞춰보니까 어떠세요?
A. 이 곡이 많이 알려진 곡이지만, 사실 이 곡을 제대로 전달하려면 작업을 좀 해야죠. 그런데 전부터 느꼈지만, 한국 아이들이 굉장히 음악성이 좋아요. 그래서 조금만 지도를 하면 그 음악이 나오더라고요. 그래서 참 보람을 느끼죠.

Q. 같이 연주한 아이들에게 해주고 싶은 얘기가 있으세요?
A. 이 음악이라고 하는 건, 모든 게 마찬가지지만 서로 마음을 주고 진심으로 음악을 대할 때 훌륭한 음악이 나오죠. 그런 분위기를 만들어 주고 싶고요. 오늘도 같이 느꼈지만 음악 소리를 통해서 한마음이 된다는 게, 여기 백 명 이상이 모여 있는데, 그때가 제일 행복한 것 같아요. 인생에 있어서도 서로 마음이 맞고 서로 이해하고 서로 마음을 나눌 때, 그때가 가장 행복하지 않은가 싶어요.

Q. 꿈을 꾸는 청소년들에게 조언 좀 해주세요.
A. 사실 저도 특별히 할 말이 있는 건 아니지만, 각자 자기의 '보금자리'가 있는 것 같아요. 거기를 찾아가야죠. 그건 각자가 찾아야 되는 거고요.

Q. 이전에 수많은 유명한 오케스트라와 협연하셨는데, 이렇게 구성된 오케스트라하고 연주해 보니까 어떠셨는지요?
A. 훌륭한 오케스트라 하고 협연하게 되면 특별히 할 게 없더라고요. 그냥 연주하면 되니까. 그렇지만 이건 의미가 좀 다르겠죠, 아무래도. 저는 세계적인 오케스트라하고만 연주하겠다, 어떤 수준이 안되면 안 하겠다, 이런 생각은 하나도 없어요. 그냥 누구든지 같이 하고 싶으면 하고, 누구든지 듣고 싶으면 어디든지 가고, 이런 게 음악인의 태도가 아닌가 싶어요. 그렇기 때문에 저는 즐거울 뿐이에요.

백건우는 이후 다른 매체와 인터뷰에서 아내 윤정희 배우가 알츠하이머로 투병 중이라고 밝혔다. 이는 음악계 내부에서는 어느 정도 알려진 사실이었고, 나도 알고 있었으나 기사화한 적은 없다. 그동안 백건우가 이 사실을 외부에 알리고 싶어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아내가 주변 사람을 몰라볼 정도로 병세가 악화되자, 영화 팬들에 대한 의무감에서 이제는 '공식적으로' 밝혀야겠다고 생각했다 한다. 윤정희는 지금 파리 근교의 호숫가 마을에서 지내며 딸의 보살핌을 받고 있다. 백건우는 영화 팬들이 윤정희라는 배우를 앞으로도 사랑하고 응원해 줬으면 좋겠다는 소망도 밝혔다.

백건우는 1976년 결혼한 이후 아내와 항상 해외 연주 여행을 같이 다녔다. 두 사람은 영화계에서도, 음악계에서도 소문 난 '잉꼬부부'였다. 이제 윤정희는 장거리 여행을 할 수 없다. 11월 10일 아마추어 청소년 연합 오케스트라와 협연한 날, 백건우는 프랑스에 있는 아내를 더 그리워했을 것 같다. 이날 백건우는 공연이 끝난 후 무대 뒤 대기실에서 급하게 종이를 찾았다 한다. 함께 연주한 아이들에게 해주고 싶은 얘기가 있다고. 공연 관계자가 급히 찾아서 내민 이면지에 그는 이렇게 편지를 썼다.
백건우의 손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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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 친구들에게

우리가 같이 한 시간이 모자라서 이렇게 편지를 쓰기로 했어요.
음악을 한다는 건 단지 소리를 내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모든 것을 담아내는 표현이기 때문에, 음악은 우리가 처해 있는, 느끼는 모든 것이 담겨 있어요. 또 우리는 음악을 통해서 호소하고 자백하고 사랑을 표하지요.
나 역시 힘든 시기를 거쳐 지금까지 왔어요. 배고프고 외롭고 희망이 없다 할 때에도 음악은 저를 버리지 않았어요. 늘 저의 영원한 친구로 격려해 줬기에 참고 견딜 수 있었어요.
그 대신 우리는 그 진정한 친구에 대해 사랑과 진심으로 존경하고 내 몸같이 아껴야 해요. 음악을 이해하며 노력하면 꼭 언젠가는 답을 줘요. 음악은 절대 우리를 배반하지 않아요. 우리만 그를 진심으로 사랑한다면.

홧팅.
백건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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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연이 끝난 지 며칠이 지나서야, 이 손편지 내용을 김은정 감독으로부터 전해 들었다. 한 글자 한 글자마다 백건우의 따뜻한 마음이 배어나는 것 같았다. 맨 마지막, '홧팅'이라고 쓴 글씨를 보며 저절로 미소가 떠올랐다. 백건우가 '홧팅!' 하며 나까지 격려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아니, 백건우의 '홧팅'은 그 자신과 아내를 위한, 우리 모두를 위한 응원 구호인 것처럼 느껴졌다. 이 '홧팅' 때문에 어찌 보면 뒷북 같은 취재파일을 이렇게 쓰게 되었다. 백건우는 12월 쇼팽 리사이틀로 다시 한국에 온다. 그의 영원한 친구, '절대 우리를 배반하지 않는' 음악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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