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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잇] "네가 암 환자여도 강아지 구충제 안 먹을 거야?"

이학범 | 수의사. 수의학 전문 신문 『데일리벳』 창간

[인-잇] "네가 암 환자여도 강아지 구충제 안 먹을 거야?"
"그래서, 네가 말기 암 환자여도 안 먹을 거야?"

최근 이슈가 되고 있는 강아지 구충제 펜벤다졸(Fenbendazole)에 대한 이야기다. 펜벤다졸이 항암효과가 있다는 영상이 화제가 되면서, 수의사인 나에게도 펜벤다졸에 대해 묻는 사람이 매우 많다. 그때마다 나는 "세포 단계 실험에서 효과가 보였다는 논문이 몇 개 있지만, 아직 사람에 대한 임상시험 결과는 없다. 또한, 동물 약을 사람에게 처방하거나 판매하는 것은 불법이기 때문에 암 환자에게 추천하기 어렵다"고 답했다. 그러자, 이 대답을 들은 친구 한 명이 저렇게 반문한 것이다.

순간 말문이 막혔다. 말기 암 환자의 심정을 이해하지 못한 채 전문가랍시고 너무 원론적인 답변만 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대안이 무엇일까 고민한 끝에 나는 나름대로 이런 결론을 내렸다.

펜벤다졸은 선충, 흡충, 조충 등 장내 기생충을 죽이는 벤지미다졸(Benzimidazole) 계열 구충제로, 동물에게 널리 이용된다. 세포 골격을 유지하는 튜불린(미세소관)에 결합해 세포 분열을 저해함으로써 성장을 억제하고 기생충의 사멸을 유도한다. 이러한 효과가 암세포에도 적용된다는 논문이 꽤 오래전부터 여러 편 발표됐다. 문제는 논문에서 소개한 효과가 세포 단위에서의(in vitro) 실험 결과일 뿐 실제 생체 단위에서의(in vivo) 결과가 아니라는 점이다.

그런데, 여러 논문을 검색하던 중 흥미로운 논문 하나를 발견했다. 2017년 수의비교종양학회지에 실린 논문인데, 펜벤다졸과 메벤다졸이 개의 신경교종 세포를 사멸시키는 효과를 보였다는 논문이었다. 꼭 펜벤다졸이 아니라 다른 벤지미다졸 계열의 약물도 암세포 사멸 효과를 보일 수 있다는 해석이 가능했다.

펜벤다졸뿐만 아니라, 알벤다졸, 옥시벤다졸, 메벤다졸, 파벤다졸 등 다양한 종류의 벤지미다졸 계열 약물이 있는데, 해당 논문에 따르면 세포 내 튜불린에 작용해 세포 증식을 억제하는 효과는 벤지미다졸 구조에 의한 것이므로 펜벤다졸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닌 것이다. 실제 벤다무스틴 등 벤지미다졸 구조를 가진 항암제도 있다.

펜벤다졸이 강아지 구충제로 알려진 것은 펜벤다졸 성분의 구충제가 인체용 의약품으로 출시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메벤다졸을 비롯한 다른 벤지미다졸 계열 약물은 이미 인체용 의약품으로도 출시되어 있다.

동물 약을 사람에게 처방하거나 판매하는 행위는 불법이다. 아무리 말기 암 환자의 심정을 이해한다고 해도 "펜벤다졸을 구해서 복용하세요"라고 불법을 조장할 수는 없다. 하지만, "사람 약 중에 벤지미다졸 계열의 약물이 있으니, 주치의와 상담을 진행한 뒤 주치의 판단 아래 '오프라벨'(의약품을 허가한 용도 이외의 적응증에 약을 처방하는 행위) 처방을 받아 복용해볼 수 있다"고 조언할 수는 있다.

벤지미다졸 계열 구충제는 비교적 부작용이 크지 않지만, 그래도 구토, 설사, 알레르기, 독성 간염 등의 부작용이 생길 수 있다. 특히 항암제나 방사선 치료 등 다른 암 치료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알 수 없기 때문에 더욱 주의가 필요하다.

따라서 선택할 수 있는 다른 치료 방법이 남지 않은 말기 암 환자가 펜벤다졸 복용 여부를 고민하며 "그래서, 네가 암 환자여도 안 먹을 거야?"라고 절박한 심정으로 내게 묻는다면, 벤지미다졸 계열 구충제를 오프라벨 처방해 줄 수 있는 의사를 찾아 상담과 조언을 받아보라고 권하겠다. 마찬가지로 암에 걸린 동물을 키우는 보호자 역시 수의사에게 펜벤다졸을 오프라벨 처방받아, 수의사의 지시에 따라 동물에게 복용시켜보길 권장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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