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잇] "옛날 직장엔 정이 있었다"…감상적 꼰대의 푸념

김창규│입사 20년 차 직장인. 실제 경험을 녹여낸 직장인 일기를 연재 중

SBS 뉴스

작성 2019.11.06 11:00 조회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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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장을 마치고 사무실로 출근한 첫날, 사업부문장에게 간략한 출장 결과를 구두로 보고했다. 그런데 이상했다. 목소리의 힘이 많이 빠져있다. 예전 같으면 이 대목에서는 화를 낼 타이밍인데…왜 저러지?

알았다. 폭군 같은 그의 언행에 대한 투서가 들어가 사장님한테 심각히 경고를 받았다는 거다. 당시 갑질에 대한 사회적 공분이 하늘을 찌를 때였으니 직원들을 향한 그의 폭언은 자칫하면 회사에 치명상을 입힐 수 있었다. 어쨌든 당시의 상황으로 보건대 한동안은 목표 달성을 재촉하며 이래라저래라 하는 그의 무리한 지시는 없을 것 같다. 내심 좋았으나 기운이 빠진 그를 보며 측은함이 느껴지기도 했다.

출장 보고를 마친 후 팀 회의를 소집했다. 선임인 김 대리가 먼저 우리 팀의 예하 조직인 고객상담센터장 시말서를 받아야 한다고 보고했다. 사정은 이랬다.

"인사팀에서 도급법 위반여부 관련 자체 조사를 했는데, 센터장이 책임자가 아닌 일반 상담원에게 별도 지시한 걸 확인했다고 합니다. 아시다시피 도급법상 회사 직원이 도급회사 책임자가 아닌 다른 일반 직원에게 지시를 하면 불법으로 봅니다. 물론 센터장은 그 상담원과 친하게 지내서 간단한 업무 요청한 것이라고 하지만 인사팀에서는 그런 것도 조사가 나오면 위장도급으로 몰릴 수 있는 단초가 된다는 거죠. 그들과 아예 말을 섞지 말라는 걸 다시 한 번 강조하기 위해 이번 일을 본보기 삼겠답니다. "

지나치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어쩌랴. 법이 그렇다는데. 다음 보고서를 읽으니 지난 한 주 서비스율이 더 악화되었다는 내용이 있다. 담당자인 박 사원에서 "경쟁사는 어때?" 물었더니 이제 파악이 안 된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무슨 사정인지 의아스럽다.

"그쪽 회사 최근 담합 때문에 매우 곤란한 처지에 놓여서, 우리 포함 다른 회사와 정보 교환이나 담당자 접촉을 일체 금하라고 회사에서 엄명이 떨어졌다고 합니다."

"아니 담합이 걸렸는데 왜 다른 부분 직원들의 일상적인 정보 교환까지 막나? 무슨 상관이 있다고. 아무리 자라 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도 놀란다지만."

그러자 하 사원이 박 사원에게 장난스럽게 소곤거린다. "어, 내 절친 그 회사에 있는데, 그럼 만나지도 말아야 하나요?" 그러자 박 사원은 웃으면서 말한다. "만나도 돼. 단지 회사 얘기만 하지마."

하 사원은 "그럼 무슨 얘기 해요?" 응수하며 피식 웃는다. 그리고는 자기 차례인 줄 알고 이내 목소리를 가다듬는다.

"금번 직장 내 성희롱 교육은 팀장님이 인터넷 교육 강의를 들으시고 팀원들에게 하랍니다. 언제로 잡을까요?"

"금요일에 하지"라고 말하는데, 곽 대리가 농담조로 "여자랑 말 안 하면 되는데 굳이 교육을…"이란다. 나는 얼른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마"라고 주의를 주고 다른 안건으로 넘어갔다.

이번에는 곽 대리가 다가오는 명절에 선물을 보내야 하는 명단을 보고했다.

내가 물었다. "법에 위배되는 사람은 없지? 금액도 맞추었나?"

그는 그렇다고 하면서 걸리는 목소리로 이렇게 덧붙인다. "그런데 이 분은 제외했습니다. 저희가 정말 챙겨야 하는 분인데 법에 걸립니다. 선한 의도로 고마움을 표시하고 싶어도 법이 막으니 현재로선 어쩔 수가 없네요."

회의가 끝났다. 이래저래 마음이 심란했다.

사업부문장처럼 갑질한다는 소리 듣지 않으려면 직원들에게 늘 이성적이고 업무적으로만 대해야 한다. 부하직원에게 화를 내거나 나무랄 일이 생기면 근거도 자세히 기록해 놓는 게 안전하다. 팀장들 사이에선 팀원들에게 회사 내 복잡한 속사정을 털어놓는 건 나중에 약점이 될 수도 있으니 피하라거나, 언제라도 대화 내용은 녹취될 수 있으니 말조심하라는 소리도 나온다.

같이 근무해도 신분이 다르면 말을 섞지 말아야 한다고 하고, 경쟁사에 있으면 친구를 만나도 가려 말하고 가려 들어야 한다. 괜히 망신살 뻗치지 않으려면 농담이랍시고 여자 동료들에게 싱거운 소리 하면 안 되고, 계산적인 생각 없이 존경이나 감사를 표하고 싶은 사람에게도 선물을 함부로 보내면 안 된다.

새로운 규범들이 이렇게 많이 생겨난 건 그동안 직장에서 이런 관계들에서 문제가 많이 발생했었다는 걸 의미한다. 지위를 이용해 갑질을 하고 친분을 이용해 담합을 하고 성차별적 발언이나 희롱이 비일비재하고 뇌물이 사회적으로 큰 문제가 되어 왔다는 뜻일 거다.

그런데 기존의 문제들을 모르는 건 아니지만, 나는 이것저것 너무 따지는 회사 생활이 솔직히 좀 삭막하고 답답하다. 문제가 생길 수 있는 관계에 그 관계 자체를 원천봉쇄하는 해법을 쓰는 식이라고나 할까. 직장 동료들 사이에 개인적으로 싹트는 '정'의 영역까지 법과 규범이 침범해 이래라저래라 간섭하는 것 같다.

이 달라진 직장문화가 나에게는 낯설지만, 요즘 젊은 직원들에게는 자연스러운 것이라는 걸 안다. 함께 술잔을 기울이며 내밀한 속내를 드러내고 서로를 '같은 회사 조직원'이 아닌 '한 인간'으로 이해하게 되는 순간들이 좋았는데, 이건 이미 지나간 유행이 되어버린 걸까? 나는 흘러간 유행가를 부르는 '감상적인 꼰대'에 불과한 걸까?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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