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 우리 사무실에 한 분이 판결문을 가지고 찾아왔다. 치과진료를 받다가 의료사고를 당했는데, 2년 넘게 소송을 진행했지만 졌다고 한다. 그런데 이 분이 화가 나는 건 2년 넘게 진행한 소송에서 졌는데, 그 이유를 판결문을 통해 알 수가 없다는 것이다.
실제 이 분의 판결문에는 '원고의 청구를 기각한다'라는 주문은 기재되어 있지만, 왜 그렇게 판단한 것인지에 대해서는 아무 설명이 없고, 단지 판결문 끝에 이런 문구가 붙어 있었다. '소액사건의 판결서에서는 소액사건심판법 제11조의 2 제3항에 따라 이유를 기재하지 아니할 수 있습니다'라는 문구. 이 분은 나에게 이렇게 반문하였다.
"왜 제 사건이 소액사건이죠? 제가 청구한 2,400만 원은 제 전 재산보다도 많은 돈인데요?"
청구금액이 상대적으로 작은 사건에 '소액사건'이라는 딱지를 붙인 건 1973년 소액사건심판법이 제정되면서부터이다. 최초 법 제정당시 20만 원을 초과하지 아니하는 사건으로 시작한 소액사건의 범위는 1980년부터는 법률이 아닌 대법원규칙으로 바뀌었고, 이후 대법원은 그 범위를 넓혀 2017년에는 3,000만 원에 이르게 되었다. 그리고 소액사건의 경우 판결이유를 생략할 수 있는 제도는 1981년부터 시행되어 지금에 이르고 있다.
사법부가 제한된 인력으로 각종 소송을 더욱 능률적으로 처리하기 위해 이러한 조치는 불가피할 수도 있다. 그런데 청구금액의 크기만을 사유로 판결이유 기재가 생략 가능하도록 한 것은 당사자의 권리구제를 등한시한 것이 아니냐는 비판의 목소리가 나온다.
2019년 법원이 발표한 자료(사법연감)를 보면 2018년 전국 법원에 접수된 민사소송은 95만 9,270건이고 그중 소액사건은 70만 8,760건이다. 무려 73,9%를 차치하는 사건, 일반인들이 생활에서 겪는 대부분의 사건에 '소액사건' 딱지를 붙여 사건 처리의 능률을 높이겠다는 발상은 제고되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더군다나 2018년 근로자 상위 40~50%의 연봉평균이 2,864만 원이라는 점을 감안할 때 소액사건의 기준 3,000만 원은 지나치게 높다. 대법원이 단순히 규칙변경으로 소액사건 범위를 결정하는 것부터 중단시키고, 최초 법이 시행되었을 때처럼 법률에 의해 그 범위를 정하는 것이 옳다.
문제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소액사건이 아니어서 판결이유가 기재되어 있는 경우에도 아무리 읽어봐도 판결이유를 알 수 없는 판결문들을 볼 때마다 컴퓨터에 고이 간직하는 습관이 생겼고, 여기서 '불량판결문'이라는 폴더 안에 있는 판결문 하나를 공개해 본다.
[수원지방법원 안산지원 2015년 판결]
'제출한 증거만으로 주장하는 사실을 인정하기에 부족하다'는 기재는 판결이유로 충분한 것일까? 이런 판결문으로 당사자를 설득시킬 수 있을까? 판결문 공장의 대량생산 라인에서 찍어낸 듯한 판결문, 판결이유가 기재되어 있지만 그 이유를 제대로 알기 어려운 판결문들이 쏟아지다 보니 차라리 인공지능(AI) 로봇을 판사로 대체하자는 거친 주장들도 나온다.
우리나라 헌법은 재판받을 권리를 보장하고 있다. 이는 단순히 내 사건을 법정에 가지고 갈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을 것이다. 판사가 그 사건을 성심성의껏 검토하고, 내 주장이 받아들여지든 아니든 그렇게 판단한 이유가 판결문에 설명되어 있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재판받을 권리를 충분히 보장받고 있을까? 판결이유가 생략되어 버리거나 부실하게 기재된 불량 판결문은 어디서 AS를 받아야 하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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