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파일] 말이 안 통할거라 생각했던 상대와 대화를 해봤더니

SBS D 포럼 연사탐구 ② - '다이얼로그 저널리즘' 창시자 이브 펄먼

임태우 기자 eight@sbs.co.kr

작성 2019.10.27 09:56 수정 2019.10.28 11:36 조회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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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한 미국 언론인이 캘리포니아주에 사는 25명의 클린턴 지지자들에게 물었습니다. 트럼프 지지자들은 어떤 사람일 것 같으냐, 그들에 대한 '이미지'를 말이죠. 그랬더니 답변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보수적이고 촌스럽고 멍청한 사람들이죠."
"집 마당에 남부 연합기를 내걸고 있고, 인종차별이나 성차별에 둔감하고 무지해요."
"맨발로 막 걸어 다니고 더러운 길가에서 아기를 낳는 사람들 아닐까요?"

클린턴 지지자들이 생각하는 트럼프 지지자들에 대한 이미지는 대체로 '수준이 낮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기에 서로 대화가 전혀 가능할 거라고 믿는 클린턴 지지자는 한 명도 없었습니다.
이브펄먼 SDF이번엔 반대로 미국 남동부의 앨러배마 주에 사는 트럼프 지지자 25명에게 물었습니다. 클린턴 지지자들을 어떻게 생각하느냐고요.

"너무 잘난 척하고 스스로 엘리트주의에 빠져있어요. 그들에게 애국심은 하나도 없을걸요?"
"가족을 위해 희생한다기보다 자기 경력만을 우선하는 이기주의자죠."
"비싼 돈 내고 유기농 음식이나 사 먹는 철부지죠."
"겉으로는 지식인 행세를 하지만, 머릿속엔 비현실적인 생각만 할 겁니다."

트럼프 지지자들은 클린턴 지지자들을 잘난 척하는 '엘리트'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강했습니다. 마찬가지로 서로 대화가 통할 거라고 생각한 트럼프 지지자들은 한 명도 없었습니다. 분명 서로가 만난 적이 없는데도 집단 간 상호 편견의 벽은 너무나도 견고했습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집단 간 '편 가르기' 현상은 왜 나타나는 걸까요?

가장 보편적으로 인정 받는 이론은 사회심리학자 헨리 타즈펠와 존 터너가 제시한 '사회 정체성 이론'입니다. 사람들은 내가 속해 있다고 믿는 '내집단(ingroup)'과 나와 다른 집단인 '외집단(outgroup)'이 있다고 인식하는데, 내집단을 편애하고 외집단을 배척하는 편향성이 나타난다는 게 이 이론의 골자입니다.

외집단 배척 경향이 심해질수록 나하고 다른 집단에 대한 인식은 마치 악마처럼 극단화된 혐오나 공포 이미지로 나타나게 됩니다. 특히 IT 미디어 기술이 발달한 오늘날 이러한 경향은 더욱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요인으로는 자극적인 기사로 편 가르기를 부추기는 언론, 사용자들에게 보고 싶은 것만 보여줘 '확증편향'에 빠뜨리는 콘텐츠 추천 알고리즘 등 다양합니다.

그렇다면 두 집단은 소통 가능성이 '제로(0)'인 채로 영원히 서로를 배척하면서 살아가야 하는 걸까요?
'다이얼로그 저널리즘' 창시자 이브 펄먼실제로 두 집단을 한자리에 모아놓고 진지하게 대화를 하도록 시도해 본 언론인이 있었습니다. 그녀의 이름은 이브 펄먼. 2016년 당시 도널드 트럼프와 힐러리 클린턴 후보가 격돌했던 미국 대선을 지켜보던 그녀는 지지 후보가 다른 두 진영이 지나치게 서로를 헐뜯고 욕하는 모습들을 보고 실험 아이디어를 낸 겁니다.

그녀는 먼저 소모적인 논쟁의 벽을 깨고 대화다운 대화를 가능하게 해보자는 취지로 ‘스페이스십 미디어’라는 스타트업을 만들었습니다. 2017년 1월 다양한 계층과 인종에 걸친 실험 참가자 선별 작업을 벌인 결과, 민주당 지지가 우세한 캘리포니아에서 25명을, 공화당 표밭으로 불리는 앨러배마에서 25명을 각각 뽑았습니다.

두 달간의 사전 작업을 마친 뒤 이들의 첫 만남이 이뤄졌습니다. 참가자들이 느낀 감정은 그야말로 충격이었습니다. 잘난척쟁이일 줄 알았는데 잘난척쟁이가 아니었고, 무식쟁이일 줄 알았는데 무식쟁이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두 그룹은 먼저 자신이 누구이고 어디서 왔는지를 설명한 뒤 사회 주제를 놓고 차근차근 서로를 향해 질문하기 시작했습니다. 시간이 흐를수록 참가자들은 상대방의 말에 귀를 기울이며 자연스럽게 고개를 끄덕이고 공감을 표현하기 시작했고, 왜 그렇게 생각하는지 궁금해하며 질문하는 횟수도 많아졌습니다. 상대방의 견해에 대해 "와우(Wow)"라며 감탄사를 던지기도 했습니다.
이브펄먼 SDF중요한 변화는 참가자들이 자기 의견을 표현할 때 한 번 더 생각해본다는 것이었습니다. 상대방이 했던 말을 곰곰이 되씹어보는 데 시간을 들이기 시작한 것이었죠. 과거 자신의 편견에 기대어 상대방 의견은 듣지도 않고 무시했던 모습과 확연하게 달라졌습니다.

이브 펄먼은 "자신에게 선입견이 있었다는 걸 깨닫고 상대방이 왜 그런 행동과 말, 사상을 갖게 되었는지 대립이 아닌, 호기심으로부터 출발하는 것이 진정한 대화의 시작"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두 집단 사이에 소통의 가교를 놓은 실험적 시도를 '다이얼로그 저널리즘'라고 명명했습니다.

과연 참가자들은 이 실험을 통해서 변화했을까요? 이와 관련해 캘리포니아의 공립학교 교사로, 실험에 참여했던 스웨이차 찬두리(Swaicha Chanduri)는 훗날 이렇게 썼습니다.

“실험 이후에도 온라인에서 나와 생각이 다른 주장을 보면, 첫 반응은 컴퓨터를 향해 소리를 지르고 치열하게 반박 댓글을 쓰다가, 멈추고 썼던 걸 지웠다가, 다시 막 댓글을 쓰다가 멈추고 소리지르고 그러다가 마음을 가다듬어 내가 하려고 했던 말의 표현에 대해 좀 더 깊게 생각해보게 되었습니다. 물론 어려운 일이긴 한데, 생각을 표현하기 전에 시간을 들여 어떤 단어로 이 말을 전달할 것인가를 고민하게 되니까 상대방의 말에 대해서도 더 깊게 생각해보게 되더라고요. 그건 언제나 가치 있는 일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어요.”

이브 펄먼의 실험은 집단 간 대립이 심해지는 현 사회 분위기에서도 진정한 대화 경험을 통해서 나와 다른 상대를 '적'으로 여기는 대신, 다름 그 자체를 인정하는 자세를 얼마든지 배울 수 있다는 점에서 의미 있는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민주주의는 문제를 같이 논의하고 공감하는 우리들의 능력에 달려있다는 겁니다.

올해 'SBS D 포럼' 연사로 나설 이브 펄먼은 차이를 넘어서는 대화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이러한 대화가 이뤄지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하고 어떻게 접근해야 하는지 등의 실천적인 문제를 다룰 예정입니다. 또 대립의 시대를 극복하기 위해 언론과 미디어가 어떻게 나아가야 하는지에 대해서 대안을 모색해봅니다.

매년 세계적인 연사들과 함께 하는 지식 나눔 프로젝트인 'SBS D 포럼'의 올해 주제는 '변화의 시작-이게 정말 내 생각일까?'입니다. 전 세계적으로 정치 사회 갈등이 심해지고 있는 가운데 한국 사회를 진단하고 기술과 사회, 정치, 문화 등 다양한 관점에서 해법을 모색하는 자리입니다. 오는 31일 서울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에서 시작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