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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파일] '가치에 대한 믿음'으로 담대한 아이디어를 지원한다

사회적 벤처 보육기관 '핼시온'을 가다

미국서 지난해 출시된 제이도(JDoe)라는 앱이 있다. 영어권 국가 신원미상 인물을 일컫는 존 도(John Doe)와 제인 도(Jane Doe)들을 위한 앱이다. 이름 그대로, 익명의 사용자들이 자신이 당한 성폭력을 앱을 이용해 고발할 수 있다. 제이도는 이를 암호화해 보관했다가 2명 이상의 고발이 '매칭'될 경우 이 정보를 변호사에게 '판매'한다. 치열한 미국 법률시장에서 확실한 소송건을 찾는 데 혈안인 변호사들이 이 정보를 연간 1천 달러에 구매한다.

창업자는 25살 라이언 소치아(Ryan Soscia). UC샌디에이고에서 신경과학과 컴퓨터공학을 전공했다. 2012년 고향 코네티컷을 찾았다가 어린 시절 동네 체육관 관장에게 성추행당한 친구들이 10명 가까이 되는 걸 확인하고 창업을 결심했다. 쉬쉬하고 넘어가기 쉬운 성폭력 피해를 누군가와 대면 없이 세상에 알리는 방식으로 추가 가해를 막을 수 있는 제이도는 미투 열풍을 타고 NBC 메인뉴스에도 소개됐다.

푸디니(Foodhini)는 시리아와 방글라데시, 에리트레아 같이 접하기 힘든 나라의 음식을 만들어 워싱턴DC지역을 중심으로 배달한다. 미네소타 라오스 이민자 가정에서 자란 눕싸 필립 뱅(Noobtsaa Philip Vang)이 조지타운대학교 재학 중 어머니의 음식이 생각나도 먹지 못 했던 경험에 착안해 창업했다. 이민자와 난민만 고용해 그들 고향 음식을 만들어 팔며 경제적 자립을 돕는다. 이들의 다양한 음식이 "미국인의 식생활을 바꾸고 있다"고 영국 BBC가 보도하는 등 미디어도 주목했다.

제이도와 푸디니 두 회사의 공통점은 '사회적 벤처기업(Social Venture)'이란 데 있다. 세상 성폭력 피해자 모두가 제이도를 이용한다 해도 분명 지속적 수익 창출엔 한계가 있다. 푸디니의 이민자와 난민 손맛을 뛰어넘을 경쟁자 역시 곳곳에 잠재해있다. 두 사업 모두 큰돈 만지는 덴 한계가 있는 셈이다. 그럼에도, 더 나은 세상을 만들어보겠다는 이들의 아이디어를 이해해주고 독려한다면 분명 세계는 조금 더 전진할 수 있지 않을까? 두 회사 모두 이처럼 담대한 아이디어를 지지하는 한 단체의 후원을 받았다. 사회적 기업을 지원하는 미국 비영리기관 '핼시온(Halcyon)' 이야기다.
1787년 지어진 유서 깊은 건물 핼시온 하우스는 사회적 기업가들의 보금자리가 되어 주고 있다.
● 스타트업에 최대 18개월 무상 거주·체재비까지 지원

주거비 비싸기로 유명한 워싱턴DC에서도 포토맥강이 흐르는 조지타운대 근처는 오래된 부촌이다. '핼시온 하우스'는 유명 브랜드 부티크가 늘어선 강변 M가(街)에서 한 블록 떨어진 프로스펙트가에 자리하고 있다. 월세가 7,000 달러에 달하는 곳도 적지 않은 비싼 동네에서 유독 큰 규모가 눈에 띈다. 미국 초대 해군 장관 벤저민 스토더트(Venjamin Stoddert)가 1787년에 지은 유서 깊은 건물을, 녹내장 치료용 점안액 개발로 부를 쌓은 일본 여성 과학자 쿠노 사치코(久能祐子) 박사의 S&R재단이 2011년 사들여 지금까지 이어온다.

핼시온은 2,787㎡에 달하는 이 건물을 온전히 사회적 기업과 예술가들을 위해 내놓았다. "세상을 더 나은 곳으로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혁신가와 창조자들의 아이디어를 실현시키는 데 필요한 도구와 기회를 제공"하겠다는 게 홈페이지에 밝힌 핼시온의 목적이다. 2014년부터 운영 중인 '핼시온 인큐베이터(Halcyon Incubator)' 프로그램이 대표적이다. 창업 초기 단계에 있는 사회적 기업가들이 아이디어를 키워 시장에 안착하도록 돕는다.

인큐베이터 프로그램은 매년 봄·가을 신규 참가자를 받으며 지금까지 12차례 운영됐다. 10명 안팎을 뽑는 데 처음엔 단 50명이 지원했지만 이제는 세계 60개 국가에서 1천 명이 지원할 정도로 경쟁률이 높다. 서류전형과 사업구상 발표(피칭), 개별 인터뷰 등을 거쳐 선발된 사회적 기업가들에게 핼시온이 제공하는 혜택은 매력적이다. 5달 동안 핼시온 하우스 무상 주거 기회가 주어지고 원하면 추가로 13달을 더 머무를 수 있다. 사무·회의 공간은 물론 아마존 클라우드 서비스(AWS)와 딜로이트의 경영 컨설팅도 지원한다. 체류하는 동안 체재비 1만 달러까지 받으며 핼시온이 제공하는 각종 네트워킹 프로그램에 참여할 수 있는 것도 장점이다. 제이도의 소치아와 푸디니의 뱅이 각각 2018년 봄과 2016년 가을 프로그램 참가자다.

핼시온 최고운영책임자(COO) 조슈아 맨델(Joshua Mandell)은 "정부 관계자와 변호사 등 전문가가 많은 워싱턴DC는 비영리조직을 위한 환경이 조성돼있어 사회적 기업에게 특히 좋은 곳"이라고 자랑했다. 스타트업 사이 경쟁이 심한 요즘 실리콘 밸리에선 5만 달러 정도로 창업했다간 투자자 관심을 끌기도 어렵지만 DC는 재능과 잠재력을 중시한다는 것이다. 맨델 COO는 "자본 유치가 쉽지 않다면 DC에서 2~3천 달러 자본금으로 시작해 나중에 벤처캐피털 자금을 유치하면 된다"며 "스트레스 많은 환경인 캘리포니아(실리콘 밸리)에서 일부러 핼시온으로 지원해 온 회사도 있다"고 덧붙였다.

● "내 조국에 번영을…." 핼시온에서 만난 두 사업가

최근 인큐베이터 프로그램 문을 두드리는 스타트업들의 주된 관심은 '헬스 케어' 분야다. 아프리카 대륙 등 제3세계 출신 지원자들일 수록 특히 인프라 혁신을 통해 사회에 기여하고 싶어 하는 경우가 많아졌다. 핼시온 커뮤니케이션 디렉터 니콜 와이스먼(Nicole Weissman)은 "에너지와 환경, 교통 문제 등 자국 인프라를 혁신적으로 해결하고 싶어 하는 저개발 국가 출신들이 많다"고 말했다.

파키스탄서 온 맬리하(Maliha)도 그런 경우다. 한국선 규제 대상인 일종의 원격의료가 사업 모델이다. 파키스탄 어디서든 누구나 모바일로 의사 진료를 쉽게 받도록 하는 플랫폼 닥터리(Doctory)를 창업해 인큐베이터에 지원했다. 맬리하는 "남아시아 모든 사람이 고급 의료 서비스를 받도록 하는 게 꿈"이라며 스스로를 '공공 헬스 관련 제조전문가'라 밝혔다. 고국의 1억 명 넘는 소외계층 2G 휴대전화 가입자들이 간단한 핫라인 통화만으로 의사 진찰을 받을 수 있다는 자기 사업을 설명할 땐 성공한 사업가 같은 자신감도 느껴졌다.

그녀가 핼시온을 택한 이유는 분명했다. 미국이 선진국이기 때문이다. 멜리하는 "파키스탄에서는 접할 수 없는 선진 경험과 네트워크, 투자 기회를 얻으러 왔다"며 "사업에 있어 제일 중요한 건 이미 먼저 경험한 사람들을 만나 시행착오를 줄이는 것"이라고 말했다. 맬리하는 "사업뿐 아니라 사회 지도자로서도 성장할 수 있는 좋은 환경에서 배운 뒤 고국에 돌아가 활용할 수 있어 고맙다"고도 덧붙였다. 그녀에게 핼시온은 단순히 사업 성공을 돕는 조력자 이상의 의미였다.
파키스탄 소외계층을 위한 원격의료 플랫폼을 운영하는 멜리하에게 핼시온은 단순 조력자 이상의 의미였다.
우간다 출신 카로 헬스(Kaaro Health) 대표 프란시스 자비에르 아시엠웨(Francis Xavier Asiimwe)의 목표도 동포를 돕는 데 있었다. 우간다 의료인의 75%가 도시에 몰려 있지만 인구의 80%는 도시 밖에 거주한다는 사실이 그를 창업으로 이끌었다. 프란시스는 "도시 의료 전문가를 시골 사람들과 연결하는 소셜 서비스를 구상 중"이라며 고국의 도농 의료서비스 격차 해결에 대한 포부를 드러냈다. "에너지가 공급되는 박스형 공간에 자율 진료소를 세워 농촌 사람들의 건강을 돕겠다"는 프란시스의 말은 짐짓 공상 과학 소설처럼 들리기도 했지만 동포를 생각하는 그 마음과 열정은 응원하지 않을 수 없었다.
우간다 출신 프란시스의 ‘에너지 박스형 자율진료소’ 구상은 짐짓 공상 과학 소설 처럼 들렸지만 동포를 생각하는 그의 열정을 응원하지 않을 수 없었다.
● "목표는 임팩트…미국으로의 부의 회귀도 기대 안 해"

핼시온에게 있어서 멜리하와 프란시스 같은 지원자의 성공 여부를 따지는 척도는 무엇일까. 적어도 '수익'은 중요한 게 아니란 설명이다. 맨델 COO는 "우리의 목표는 사회에 임팩트를 주는 것"이라고 잘라 말했다. "어떤 창업 보육기관은 300개 중 5개 정도만 성공하면 된다는 생각으로 10% 씩 지분을 받아 운영한다. 재정적으로 성공할 수 있겠지만 우리가 추구하는 방향은 아니다"는 것이다. 그는 "우리가 지원한 기업이 세계 어디로든 가서 임팩트를 일으켜 사회적 환원을 하면 되는 것"이라며 "그들이 굳이 미국서 사업을 하지 않아도 된다. (법인세 등) 미국으로의 부의 회귀도 기대하지 않는다"고 밝혔다.

핼시온이 이렇게 '수익'에 초연할 수 있는 덴 뜻있는 거부들의 지원도 한몫한다. 자체 모금 인력을 두고 철저히 기부받은 수익으로 기관을 운영하는 걸 원칙으로 했다. 지난 9월에도 큰 모금 행사가 있었다. 니콜 디렉터는 "핼시온 보다 핼시온 프로그램에 참가한 창업자 개개인의 경험과 스토리가 모금 경쟁력"이라고 말했다. "기부자들이 오히려 참가 기업들의 스토리에서 영감을 많이 얻는다"는 것이다. 요컨대 가치를 전파하려는 기관을 찾아, 그 가치에 동의해 기꺼이 지갑을 여는 미국 독지가들이 핼시온 모델의 토양이다.

모금을 이어가기 위해서라도 핼시온은 지원기업을 허투루 뽑는 법이 없다. 니콜 디렉터는 "우리 프로그램 지원 절차는 상당히 타이트하다"며 "서류 전형에서 피치, 마지막 개별 인터뷰까지 과정에서 참가자들에 대해 잘 알기 위해 노력한다"고 말했다. 맨델 COO 역시 "핼시온은 설립된 지 이제 갓 4년 된 곳이라 내세울 만한 성공사례가 없다"고 겸양했지만, "그동안 지원받은 회사 가운데 85%가 계속 활동 중"이라고 말했다. 미국 스타트업의 85~95%가 실패한다는 통계에 비춰본다면 압도적인 성과다. 제이도와 푸디니처럼 핼시온의 검증을 거친 사회적 벤처가 순항하는 모습이 잠재적 기부자를 자극하는 셈이다.
조슈아 맨델 핼시온 최고운영책임자는 “우리의 목표는 임팩트”라고 잘라 말하며 “우리 지원을 받은 기업들이 세계 어디로든 가서 사회적 환원을 하면 된다”고 말했다.
실제 핼시온이 지원한 기업 가운덴 돈을 버는 데 성공한 곳도 있다. 안 양(Ann Yang)이 조지타운대 재학 시절 창업한 음료 업체 미스핏(Misfit)이 대표적인 예다. 미스핏은 상품성이 떨어진다고 여겨져 온 "부적절한 생산물"(못 생긴 과일)을 주원료로 압착 주스를 만들어 판다. 샐러드 등을 만들고 버려지는 당근 같은 것들도 미스핏이 찾는 재료다. 맨델 COO는 "농업 부문에서 생기는 많은 양의 폐기물을 상품화 한 미스핏이 투자유치와 매출을 통해 한 해 100만 달러 이상을 벌어들이고 있다"고 말했다. 민간 주도로 성장한 사회적 벤처가 가치와 수익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은 셈이다.

● '의미 과잉' 보다 중요한 건…

핼시온의 경험은 한국에도 적잖은 시사점을 던진다. 2000년대 후반부터 우후죽순 생겨난 한국 사회적 기업이 2,000곳 가까이 되지만 대부분 정부 보조금에 의존한다. 최근엔 '아동' '청년' '마을' '신재생에너지' 등 유행처럼 테마를 바꿔가며 "좌파 비즈니스" "시민단체 밥그릇 챙겨주기"같은 오명까지 뒤집어쓰고 있다. '의미 과잉' 속에 사회엔 아무런 임팩트도 주지 못 하는 그저 그런 사회적 기업이 늘고 있는 것이다.

자립도 못 하면서 아무리 시민에게 "의미"와 "가치"를 윽박질러봐야 공허할 뿐이다. 중요한 건 '가치에 대한 믿음'이다. 민간 기부가 활성화 한 미국과의 직접 비교가 무리일 수 있지만, 필요한 가치라면 그에 동의할 사람은 세상에 얼마든지 찾을 수 있다. 그런 가치를 설파하고 동의하는 이들을 모아 교류하고 사회에 데뷔시키는 것, 세상에 '임팩트'를 주는 행위가 사회적 기업의 본령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는 걸 핼시온은 보여주고 있다.

핼시온도 최근 정부 보조를 받기 시작했다. 미국 정부로부터 그간의 성과를 인정받아 지난 7월 상무부 보조금 지원 사업 수행기관으로 선정된 것이다. 미 전역에서 지원한 183개 단체들 가운데 뽑혔다. 그러나 보조금 수령 양상이 한국과는 사뭇 다르다. 상무부는 "핼시온이 그동안 보육한 77개 벤처 기업이 764개 일자리를 창출하고 9,900만 달러 이상의 자금을 모았으며 전 세계적으로 거의 100만 명에게 영향을 미쳤다"며 3년 간 30만 달러의 보조금 지급을 결정했다.

맨델 COO는 "미국은 1~2년 된 비영리 조직은 정부 지원을 못 받는다"며 "2017년 처음으로 정부 지원을 받을 조건을 갖춘 데 이어 이번에 처음으로 특정 과제 수행을 조건으로 보조를 받는 것"이라며 기부금 위주 기관 운영 원칙을 계속 이어갈 거라고 밝혔다. 임팩트가 목적인 진짜 비영리기관의 자부심이 느껴졌다.

※ 본 취재파일은 방송기자연합회 4차산업혁명과 혁신정책과정 단기연수 지원으로 작성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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