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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잇] 아프리카돼지열병이 몰고 온 '살처분 공포'

이학범 | 수의사. 수의학 전문 신문 『데일리벳』 창간

[인-잇] 아프리카돼지열병이 몰고 온 '살처분 공포'
아프리카돼지열병(ASF) 때문에 온 나라가 난리다. 1950~60년대 유럽을 중심으로 발생했다가 잠잠해졌던 이 병은 2007년 아프리카 조지아에서 재발한 뒤 동유럽과 러시아에서 지속적으로 발생해 해당 지역의 양돈 산업을 초토화시켰다.

2017년 러시아-몽골 국경 지역까지 동진한 아프리카돼지열병은 결국 지난해 8월 아시아 국가 중 최초로 중국에서 발생했고, 이후 몽골, 베트남, 캄보디아, 북한, 라오스, 미얀마, 필리핀 등 아시아 전역으로 퍼져나가다가 결국 우리나라에서까지 발병하고 말았다.

과거 국내에서 유행했던 돼지열병(CSF)의 경우 2003년부터 일제 백신 접종을 하여 2017년 이후 발생하지 않고 있다. 반면, 아프리카돼지열병의 경우 백신도 없고, 치료제도 없으며, 치사율이 100%에 이르기 때문에 상황이 훨씬 심각하다.

UN 세계식량자원기구의 아프리카돼지열병 매뉴얼에 따르면, 아프리카돼지열병 바이러스는 냉동 고기에서 무려 1,000일, 4℃로 보관한 혈액에서 약 450일, 건조된 고기나 염지된 고기에서도 182~300일 이상 살아있을 정도로 생존력이 뛰어나다. 이 때문에 해외에서 무심코 가져온 육포, 순대, 소시지, 햄, 피자 등 축산물을 통해 바이러스가 전파될 수 있다. 실제로 올해 들어서만 인천공항을 통해 국내로 들여오던 축산물에서 아프리카돼지열병 바이러스 유전자가 검출된 것이 16건에 이른다.

축산물을 불법 반입할 경우 최대 1천만 원의 과태료가 부과되지만, 여전히 "포장된 육포를 가져오는 게 왜 불법이냐?"고 반문하는 사람이 있다. 육포 한 조각이 우리나라 돼지를 전부 죽일 수도 있다는 경각심을 가져야 할 시점이다.

아프리카돼지열병 방역과 관련하여 논란이 되는 일은 또 있다. 정부가 강화 지역 돼지를 전부 없애는 방역 조치를 단행한 가운데, 반려동물로 기르던 돼지까지 안락사시킨 것이다. 돼지 주인은 "애정을 가지고 길러온 애완용 돼지를 살처분하는 것에 동의할 수 없다"고 반발했지만 해당 돼지는 결국 안락사됐다. 이 돼지를 마지막으로 강화에는 돼지가 1마리도 남지 않게 됐다.

파주에서도 전체 돼지를 제거하는 방역 조치가 이뤄졌는데, 동물단체가 반려돼지 3마리를 고양시로 불법으로 반출했다가 적발되는 일이 있었다. 돼지를 데리고 나왔을 때 '경기 지역 전체 돼지의 이동중지'가 시행 중이었기 때문에, 이 단체는 가축전염병예방법에 따라 1년 이하의 징역이나 1천만 원 이하의 벌금을 물게 될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왜 양돈농장에서 기르는 돼지뿐만 아니라, 집 안에서 반려동물로 기르는 돼지까지 죽여야 하는 것일까?

아프리카돼지열병은 현재 경기도 북부 및 강화에서만 발생했다. 경기 이남이나 충청도로 퍼지기 시작하면, 우리나라 양돈 산업도 초토화될 수 있다. 그래서 정부는 사활을 걸고 방역에 매달리고 있다. 아프리카돼지열병을 잘 방어한 나라 중에 프랑스가 있는데, 프랑스는 발병 지역에서 일정 거리를 경계 지역으로 설정하고, 그 안에 있는 돼지를 전부 없앰으로써 방역에 성공했다. 돼지가 살지 않는 지역(pig-free zone)을 만든 것이다.

우리나라 정부도 이러한 방법을 사용한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발병 지역의 돼지를 모두 없앰으로써 더 이상 질병이 퍼지지 않길 기대하는 것이다.

아프리카돼지열병 바이러스는 가축으로 기르는 돼지뿐만 아니라 야생멧돼지나 반려동물로 기르는 돼지에게도 감수성이 있다. 즉, 반려돼지도 아프리카돼지열병에 걸릴 수 있고, 또 바이러스를 전파할 수 있는 것이다.

실제 캐나다 식품검사기구(Canada Food Inspection Agency)는 "반려동물로 길러지든 농장동물로 길러지든, 모든 돼지는 아프리카돼지열병에 감수성이 있다"고 확인했고, 북아일랜드 농업환경농촌부 역시 "대규모 양돈농장과 소규모 사육농장뿐만 아니라 반려돼지와 야생 멧돼지에서도 감염이 확인된다"고 밝힌 바 있다.

물론, 집안에서만 생활하는 돼지가 바이러스에 실제로 감염될 확률은 높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아프리카돼지열병이 워낙 심각한 질병이고, 과잉대응으로 보일 정도로 방역을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는 점을 이해해야 한다. 방역에서는 '속도'도 중요하기 때문에, 각 돼지의 바이러스 감염 여부를 하나씩 확인하면서 감염된 돼지만 죽이는 방식은 현실성이 떨어진다.

반려돼지 보호자 입장에서는 억울할 수도 있다. 가족처럼 길렀던 동물인데, 돼지라는 이유로 갑자기 안락사시켜야 한다니 납득이 어려울 수 있다. 다만 지금은 국가 재난형 가축전염병 발생 상황이라는 점을 이해하고, 정부의 정책에 따르는 자세가 필요하다.

농식품부에도 부탁드린다. 아프리카돼지열병 방역이 어느 정도 마무리되고 여유가 생기면, 반려돼지까지 죽이는 것이 정말로 과학적인 근거가 있는 방역 방법인지에 대한 진지한 연구를 해줬으면 좋겠다. 그래야 추후 비슷한 일이 발생했을 때 억울한 사례를 줄이고, 설득력 있는 방역 조치를 수행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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