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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 '부부 살인' 리포트 - 아내 살해하는 남편, 남편 살해하는 아내

[마침] '부부 살인' 리포트 - 아내 살해하는 남편, 남편 살해하는 아내
※[마침]은 마부작침의 기사들을 하나로 모은, 길고 긴 종합기사입니다. 스크롤 압박이 심한 장문의 기사지만 링크 건너가지 않고 한 번에 읽고 싶어 하는 독자를 위해 준비했습니다. 기사를 끝마친다는 의미도 담고 있습니다.

"피고인의 이 사건 범행은 절대적인 가치인 인간의 생명을 빼앗은 행위로 그 결과가 매우 중하고 피해를 회복할 방법이 없는 중대한 범죄로 피고인에게 그에 상응하는 엄중한 책임을 묻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부부가 되어 수십 년을 함께 살았던 남편이 아내를, 혹은 아내가 남편을 살해한 혐의로 재판을 받았다. 이유 없는 살인은 없었다. 길게는 35년 징역형부터 짧게는 징역 1년 6개월·집행유예 3년까지 다양한 선고가 내려졌다. 생명을 앗아갔다는 중대 결과는 다르지 않지만, 판결문의 '그러나' 다음은 각 사건마다 차이가 있었다.

SBS 데이터저널리즘팀 <마부작침>은 '그러나' 이후에 주목했다. 결혼과 혼인신고를 거쳐 부부가 된 두 사람이 서로를 살해하는 비극, '부부 살인' 사건을 판결문을 통해 살펴봤다. 극단적인 결과가 빚어지기까지 어떤 일이 있었던 건지 판결문에 나타난 차갑고 건조한 언어를 통해 이면을 들여다보고 비극을 피하고 또 줄이기 위한 방법은 있을지 고민했다.

● 끔찍한 '부부 살인' 5년 치 100건 분석

"피고인은 당시 배우자였던 피해자를 때려 상해를 가한 사건으로 별거하다 이혼한 이후 피해자로 인해 가정이 파탄에 이르렀다고 생각한 나머지 피해자를 원망하며... 거처를 알아내기 위해 가족들을 미행하는 등..."

2018년 10월 22일 새벽 5시쯤. 47살 이 모 씨가 자신의 아파트 주차장에서 흉기에 찔려 살해당했다. 위장용 가발까지 소지한 채 2시간 반 전부터 숨어 있다가 이 씨가 집을 나선 걸 따라가 범행한 이는 전 남편인 48살 김 모 씨였다. 위의 글은 범행에 이르기까지 범죄 사실을 기술한 김 씨의 1심 판결문 중 한 대목이다. 김 씨는 1심 재판에서 살인과 특수협박, 폭행 등의 혐의로 징역 30년을 선고받았다. 피고인과 검사 모두 형이 무겁거나 가볍다며 항소했으나 항소심 결과 또한 원심과 같았다.

<마부작침>은 최근 5년 간 이처럼 부부 사이에 벌어진 살인과 사망 사건 1심 판결문을 모두 조사했다.(법률혼 기준, 사실혼·동거·내연 관계 제외) 대법원 판결문 열람서비스를 통해 확보한 '부부 살인' 1심 판결문은 선고일자 기준으로 2014년 1월 1일부터 2019년 7월 31일까지 정확히 100건이었다. (2014년 24, 2015년 14, 2016년 18, 2017년 24, 2018년 14, 2019년 6건) 확정 판결이 나지 않거나 대법원에서 비공개 결정한 판결문은 제외했다.

● 81%는 살인...상해치사·폭행치사 19%
[마부작침] 부부살인
크게 세 가지 죄- 살인, 상해치사, 폭행치사로 분류했다. 이를테면 위에 거론한 김 모 씨는 살인·특수협박·폭행·위치정보의보호및이용등에관한법률 위반, 이렇게 4가지 죄로 재판받았는데 살인으로 분류했다. 그렇게 나눠보니 살인 81건, 상해치사 14건, 폭행치사 5건이었다.

법률혼 부부에 한해, 확정 판결이 난 사건으로 한정했기에, 다른 통계와 다소 차이가 있다. 경찰이 집계한 사건 발생 기준 2018년 부부간 살인 사건은 31건이었다. 역시 경찰 통계인 2018년 살인 사건(기수) 322건과 비교하면 10분의 1 정도이다.

● '부부 살인' 피해자, 남편 34%·아내 66%
[마부작침] 부부살인
판결문 정보를 바탕으로 '부부 살인' 피해자 특성을 살펴봤다. 피해자는 남성이 34명, 여성이 66명. 즉 남편이 살해하거나 사망케 한 아내가, 아내가 살해하거나 사망케 한 남편에 비해 약 2배 많았다.

피해자 남편의 평균 연령은 58.7세, 피해자 아내는 49.8세였다. 2018년 결혼한 남성의 초혼 연령은 33.2세, 여성은 30.4세로 '부부 살인' 피해자와는 20년 혹은 그 이상의 차이가 있다. 나이로만 보면 결혼한 지 얼마 안 된 이들보다는 중년을 넘어선 부부 사이에서 '부부 살인'이 주로 벌어졌다.

● 판결문 71%에서 '가정폭력' 언급... 부부폭력률 41.5%
[마부작침] 부부살인
"말다툼하다가 주먹 등으로 때려...", "경찰이 두 차례 출동했으며...", "칼로 찔리고 베이는 것 포함해 지속적인 가정폭력을 당해...". '부부 살인' 사건 판결문 곳곳에서 이런 대목이 등장한다. 결혼 생활 동안 가정폭력이 있었고 사건에 어떤 식으로든 영향을 미쳤다는 걸 짐작할 수 있는 언급이다.

<마부작침> 분석 결과, 5년 치 '부부 살인' 판결문 100건 중에 범죄 사실이나 양형 이유 등에서 가정폭력을 언급한 건 71건, 71%였다. '부부 살인' 사건의 3분의 2 이상에는 가정폭력이 배후에 자리하고 있었다는 말이다.

여성가족부가 3년 주기로 실시하는 가정폭력 실태조사 결과에 따르면 부부 사이에 벌어지는 신체적 폭력·정서적 폭력·경제적 폭력·성학대·방임 등을 가리키는 부부폭력률은 2004년 44.6%였는데 가장 최근인 2016년 조사에서도 41.5%를 기록하고 있다. 가정폭력 처벌법과 방지법이 시행된 지 20년이 지났지만 법의 실효성에 대한 의문은 여전하다.

한국 여성의 전화 최선혜 여성인권상담소장은 "피해자들이 가정폭력을 막거나 저지하는 과정에서 폭력이 발생해도 경찰은 쌍방폭력으로 처리하는 경우가 많다"면서 "수사기관에서 맥락을 간과하고 현상만 보고 판단하면 가정폭력 문제는 더 심각해질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 '부부 살인'에 징역 35년과 2년, 그들의 차이

사례 1. "피고인은 한 차례 피해자를 살해하려다가 미수에 그친 후에도 이를 단념하기는커녕... 치밀한 사전 계획 하에 동일한 방법으로 피해자를 살해한 후 병사한 것으로 위장..."

사례 2. "피고인은 약 20년 간 피해자로부터 갖은 인격 모독, 학대 등 가정폭력을 당하였고... 범행 당시에도 피해자가 술 취해 장시간 칼로 위협하거나 모욕적인 언행을 반복하는 등..."


<마부작침>이 분석한 '부부 살인' 사건에서 피고인에게 가장 중형이 선고된 건 2017년 충남 당진에서 발생한 의사 남편 사건이다.(사례 1) 이 남편은 아내에게 수면제를 먹여 잠들게 한 뒤 근육이완제를 주사해 심정지를 일으키게 해 병사로 위장하려 했다. 자신의 의학 지식을 활용한 범죄였는데 넉 달 전에도 같은 수법으로 살인을 시도했다가 실패한 뒤 다시 범행했다는 사실까지 드러났다. 이 사건 피고인에게는 살인·살인미수·보험사기방지특별법 위반·마약류관리에관한법률위반 4가지 죄가 적용됐다. 검찰은 사형을 구형했으나 법원은 징역 35년을 선고했다. 항소심에서도 검찰은 사형을 주장했으나 같은 결과가 나왔다. 재판부는 "죄가 매우 무겁다" "인면수심의 행태" "비난 가능성 역시 대단히 높다"면서 "불리한 정상이 너무나 분명하여 상응하는 엄한 처벌이 불가피하다"라고 밝혔다.

역시 '부부 살인' 사건에서 살인죄, 실형 선고였으나 가장 가벼운 처벌을 받았던 건 2015년 경기 여주에서 발생한 절구공이 아내 사건이다.(사례 2) 술 취해 흉기를 들고 난동 부리던 남편이 넘어지자 아내가 절구공이로 내려치고 넥타이로 목을 졸라 살해한 사건이었다. 이 사건 피고인은 징역 2년에 처해졌다. 재판부는 "죄질이 결코 가볍지 않다"면서도 "피해자의 가정폭력으로 큰 고통을 받아왔고" "피해를 당하던 피고인이 더 큰 피해를 우려하다 우발적으로 범행"이라고 양형 이유를 밝혔고 국민참여재판 배심원 9명 중 5명은 집행유예를 선고해야 한다는 의견을 제시했다.

● 남편 살해 7.6년, 아내 살해 15.8년
[마부작침] 부부살인
살인 사건 81건에서 남편 살해와 아내 살해는 선고 형량에서 확연한 차이를 보인다. 절구공이 아내 사건 같은 '남편 살해' 피고인은 28명, 의사 남편 사건 등 '아내 살해' 피고인은 53명이다. 양측이 선고받은 징역형은 남편 살해가 평균 7.6년, 아내 살해는 평균 15.8년으로 아내 살해가 두 배 정도 더 무거운 처벌을 받았다. 남편 살해에서는 집행유예 선고도 2건 있었으나 아내 살해는 전부 실형이었다. 왜 이런 차이가 생긴 걸까.

● '아내 살해'는 가중 사유 多, '남편 살해'는 감경 사유 多
[마부작침] 부부살인
판결문에는 판사가 형량을 정한 양형 이유가 나와 있다. 법정형 한도에서 양형 기준에 따라 감경이나 가중 요소를 정하고 그렇게 결정한 권고형의 범위에서 다시 판사의 재량에 따라 가중과 감경을 따져 최종 선고 형량을 결정한다.

먼저 가중 사유에서 '죄질이 무겁다'를 보면 남편을 살해한 아내 중에선 92.9%, 아내를 살해한 남편 가운데는 94.3%가 해당했다. 생명 박탈이라는 범행의 결과는 대부분 사건에서 가중 사유로 포함됐다. 피해자 측에서 처벌을 요구하는 것도 가중 사유다. 남편 살해는 절반만 해당했는데 아내 살해는 77.4%였다. 살해당한 아내의 유족이 피고인인 남편을 용서하지 않았던 비율이 저만큼 더 높았다는 뜻이다. 가정폭력 같은 범행 전력이 가중 사유로 거론된 것 또한 아내 살해 쪽이 30.2%로 남편 살해보다 훨씬 높았다.

반면, 감경 사유에서는 피해자 측 선처 호소에서나(남편 살해 39.3%·아내 살해 26.4%) 범행 전력 없음(남편 살해 82.1%·아내 살해 56.6%)에서 남편 살해 측이 더 높았다. 가장 두드러진 차이를 보인 건 가정폭력 관련한 감경 사유였다. 남편 살해한 아내의 71.4%는 가정폭력 피해자라는 이유가 형에 반영됐고 아내 살해한 남편은 단 5.7%만이 가정폭력을 저지른 적이 없다는 점이 참작됐다.(감경 사유의 가정폭력 부분은 남편과 아내에게 기준을 다르게 적용한 부분이다. 남편 살해에서는 가정폭력 피해가 감경 사유에 포함됐는지를, 아내 살해의 경우엔 가정폭력 전력이 없다는 점이 감경 사유에 포함됐는지를 따졌다. 가정폭력을 언급한 사건 71건에서 남편이 아내로부터 가정폭력을 당했다고 언급된 사건은 2건이었는데 가중이나 감경 사유에 거론되진 않았다.)

범행수법이 잔혹하거나 미리 범행을 계획했거나, 범행 후 시신을 훼손하거나 유기한 경우가 아내를 살해한 남편이 훨씬 많았다는 점도 형량 차이를 부른 요인이었다. 사전에 치밀하게 계획하고 준비한 끝에 범행을 저지른 사례1의 남편과, 오랜 기간 가정폭력에 시달리다 흉기 난동을 부리던 남편을 살해한 사례2의 아내에 대한 선고 형량은 33년이나 차이가 났다.

● '법원의 젠더 편견', 이전보다 나아졌지만...

허민숙 국회 입법조사처 입법조사관은 2013년 발표한 논문 <살인과 젠더>에서 "남편이 아내를 살해한 판결문에서 '순간 격분', '우발적', '술에 취하여', '화가 나'라는 문구가 빈번히 등장하며 이 문구는 남성에 대한 매우 중요한 감경 사유가 됐다"라고 지적했다. 반면 아내가 남편을 살해한 판결문에는 '격분하여' 혹은 '화가 나'라는 문구가 거의 등장하지 않고 "남편이 저지른 폭력이나 외도 등은 여성들의 분노나 폭력 유발의 원인으로 인정받지 못한다"라고 밝혔다. 허 조사관은 이를 '법원의 젠더 편견'이라고 규정했다.

<마부작침> 분석에서 감경 사유에 '우발적 범행'(순간 격분, 우발적, 화가 나 등 포함)이 거론된 건 남편 살해 46.4%, 아내 살해 54.7%였다. 논문 <살인과 젠더>에서 분석한 '부부 살인' 판결문이 1990년 이후부터 2010년대 초반까지이고 <마부작침> 분석 판결문은 2014년 이후라는 점을 감안하면 '법원의 젠더 편견'이 어느 정도 개선됐다고 볼 수 있다.

그럼에도 가정폭력이 원인이 된 '부부 살인'이 전체의 70%가 넘는다는 점, 그리고 남편에게 살해당한 아내가 훨씬 많다는 점은 가정폭력이 흘러간 이슈가 아니라 지금 개선해야 할 시급한 문제라는 걸 보여준다.

<살인과 젠더> 논문은 이렇게 마무리된다.

"망치와 칼을 들고 방문을 부수고 들어오는 남편을 피해 벽을 넘어 베란다로 도망쳤던 여성은 결국 추락사하여 죽음에 이르렀지만, 그 가해자는 폭행치사에서 무죄를 선고받고, 벌금 100만 원 형에 처해졌을 뿐이다. 가정폭력 피해 여성에게 '벽을 넘으라'라고 더 이상 주문하지 말기 바란다. 목숨을 걸어야 하고, 실제 사망에 이르는 것이 현실이기 때문이다. 그 대신, 재판부가 합리적이지도, 객관적이지도, 그리고 중립적이지도 않은 성차별의 벽을 넘고, 성 편견의 문을 열고 나가기 바란다. 그곳엔 중립성의 훼손이라는 사법부의 사망이라는 결과가 놓여 있는 대신, 인권의 확립, 정의의 실현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이제는 그 벽을 넘어서길 바란다."

● 인생의 황혼에서 맞닥뜨린 '부부 살인'

"피고인은 피해자로부터 수십 년 동안 지속적인 폭행 및 폭언에 시달려왔고, 특히 2007년 피해자가 청각을 잃은 후부터 서로 간에 의사소통이 되지 않아 수시로 피해자로부터 폭행을 당했고, 2013년 피해자가 치매 증상을 겪으면서 피해자의 폭행 정도가 더 심해져 이에 대해 불만을 품고 있었다..."

2015년 1월, 충남 논산의 한 시골 마을에서 충격적인 사건이 벌어졌다. 58년 동안 혼인 생활을 유지해 오면서 노년에 이른 노부부 가운데 85세 남편이 자기 집에서 살해된 것이다. 더 충격적이었던 사실은 범인이, 함께 살던 77세 아내였다는 점이었다.

'황혼 이혼'은 결혼 후 오랜 세월을 함께 살아오다 나이 들어 하는 이혼을 뜻한다. 정식 이혼까지 가지 않더라도 결혼생활을 끝낸다는 의미로 '졸혼'이라는 말도 이미 십여 년 전 등장했다. <마부작침>은 '부부 살인' 사건에서 피해자 연령대에도 주목했다.(대법원은 개인정보 보호를 이유로 피고인 연령 정보는 공개하지 않고 있다.) 위 사건처럼 노년기에 이르러 빚어진 '부부 살인'에 대해 '황혼 살인'으로 명명했다.

● '황혼 살인' 비율 23%... 남편 살해 비율 높다
[마부작침]부부살인3_수정
<마부작침>이 세운 '황혼 살인' 기준은 피해자 나이 60세 이상인 사건이다. 피해자가 남편인 사건이 13건, 아내인 사건이 10건으로 합쳐서 전체 100건 중 23건이 '황혼 살인'에 해당했다. '부부 살인' 4건 중 1건인 꼴이다. 피해자 연령은 평균 70.9세로 남편은 72.3세, 아내는 69세였다. 60대와 70대 피해자 남녀 비율이 5:5로 같았고 80대 피해자는 모두 남편이었다.

2018년 결혼한 부부의 초혼 연령은 남편 33.2세, 아내 30.4세이다. '황혼 살인' 피해자와 비교해보면 남편이나 아내 모두 약 40년 동안 결혼생활을 한 뒤 비극적인 결과를 맞은 것이다. 각 사건마다 차이는 있으나 과거 초혼 연령은 더 낮았다는 걸 감안하면 '황혼 살인' 당사자들의 결혼 기간은 그 이상일 가능성도 있다.

● 황혼 살인 69.6% 배후에도 가정폭력

수십 년을 함께 살며 자녀도 다 키워 놓고 서로 건강에 신경 쓰며 노년의 삶을 여유 있게 보내야 할 시점에 왜 저런 '황혼 살인'이 벌어지는 걸까. '황혼 살인'도 '부부 살인'과 다르지 않았다. 판결문에 가정폭력이 언급된 사건은 23건 중 17건, 69.6%였다.

위에 언급한 2015년 충남 논산 사건의 피고인은, 수십 년 폭행과 폭언에 시달리다 그날도 피해자에게 별다른 이유 없이 폭행당하자 범행하게 됐다고 진술했다. 2013년 7월 전남 해남에서 80대 남편을 살해한 할머니의 '황혼 살인'도 남편의 간병과 생계 유지를 위해 수십 년 간 매우 힘든 생활을 해왔던 피고인을 남편이 폭행하고 무시해왔던 게 원인이었다. 좀 더 가깝게는 지난해 1월 경기도 성남에서도 '황혼 살인'이 벌어졌는데 57년 함께 산 82세 남편을 살해한 아내의 범행 동기 또한 반복적인 남편의 폭행과 폭언이었다.

● 가정폭력, 주변에 도움 요청 1.1%

'가정폭력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 '가정폭력방지 및 피해자보도 등에 관한 법률'은 가정폭력이 단순한 개인 문제나 가정 내 문제로 치부하기엔 매우 심각한 사회 문제로 발전했다는 인식 아래 만들어진 법이다. 이 두 법이 시행된 지 20년이 지났지만 <마부작침>의 '부부 살인' 리포트에서 드러났듯 가정폭력 문제, 특히 살인까지 이어지는 극단적인 사건은 끊이지 않고 있다.

여성가족부가 3년마다 실시하는 가정폭력 실태조사를 보면 왜 그런지 짐작할 수 있는 단서들이 나온다.
[마부작침] 부부살인
가정폭력 피해자를 대상으로 한 조사에서 가정폭력 발생시 주변 도움을 요청했다는 응답은 가장 최근 조사인 2016년에도 1.1%, 그 이전에도 한 자릿수를 넘어선 적이 없었다. 폭력에 당하고도 스스로 해결하려 하거나 참거나 외면했다는 것.
[마부작침] 부부살인
워낙 주변에 도움 요청한 비율이 낮기 때문에 큰 의미는 없으나 이런 조사 내용도 있다. 가정폭력 발생시 도움 요청을 한 대상이 경찰인 비율은 얼마나 되는지 물었더니 2010년에는 그래도 8.3%인데, 2016년에는 이마저 줄어서 2.8%로 나타났다.

● 가정폭력, 도움 요청하지 않는 이유는...

왜 그랬던 것일까. 도움을 요청하지 않는 이유에 대한 조사 결과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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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순위로 가장 많이 답했던 이유는(중복답변 가능) '폭력이 심각하지 않다 생각해서'였다. '이 정도 가지고 도움 요청하긴 좀...' 그렇게 생각했다는 것. 다음은 '집안 일 알려지는 것이 창피해서'였다. 남편한테, 혹은 아내한테 맞고 산다는 얘기를 듣고 싶지 않다는 것이다.

그다음은 '신고해도 소용없을 것 같아서'였다. 2018년 10월 이혼한 전 처를 살해한 김 모 씨 사건에서 피해자의 딸은 "너무 무서웠고 보복이 두려웠기 때문에 경찰에 신고 못하고 당하면서 살아왔다, 신고한 뒤에는 경찰이 직접 가해가 아니면 처벌 수위가 약할 거라고 말했다"라고 증언한 바 있다. 공권력에 도움 요청하는 걸 경험을 통해 소용 없다고 판단, 자력으로 피해보려 했지만 이 또한 허사였던 것이다.

이 사건 피해자 유족을 지원했던 한국 여성의 전화 김수정 여성인권팀장은 "극심한 폭력이 있던 날 경찰에 신고했는데 피해자 가족들은 하룻밤이라도 격리되길 바랐지만 가해자가 겨우 두 시간 만에 훈방 조치되기도 했다"면서 "2심 나오기 전에도 혹시 감형될까 봐 유족들은 걱정을 많이 했고 (원심과 같은 형이 나오자) 어떤 면에서 다행이라는 말을 하기도 했다"라고 전했다.

박복순 한국여성정책연구원 연구위원은 지난해 발표한 <가정폭력처벌법 시행 20주년의 평가 및 향후 과제> 논문에서 "폭력으로 멍든 가정을 적절한 개입 없이 형식적으로 유지하는 것보다는 피해자와 가족 구성원의 인권 보장을 더 우선 가치로 고려해야 한다"면서 "특히, 가정폭력의 특성상 피해자의 의사가 가해자와의 관계 때문에 왜곡될 수밖에 없는 사연이 존재하기 때문에 피해자 의사의 진정성을 확인할 수 있는 절차적 수단을 마련해야 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 수십 년 가정폭력 피해...칼에 찔리기까지 했으나

2017년 3월 23일 새벽, 강원도 삼척시의 한 아파트. 61살 김 모 씨가 지인들과 모임 후 귀가하자, 남편은 김 씨의 머리채를 잡고 넘어뜨리고 유리잔 등을 집어던졌다. 여러 번 전화하고 문자메시지를 남겼지만 연락을 받지 못했다는 이유에서였다. 김 씨는 장식용 돌을 들어 남편의 머리를 여러 번 내리쳤다. 남편은 2시간 여 뒤 사망했다.

김 씨는 살인 혐의로 재판을 받았다. 결혼 생활 37년, 신혼 때부터 남편은 폭력을 행사했다. 김 씨는 남편이 휘두른 칼에 가슴을 찔리고 베인 일까지 있었다. 이번 범행에 대해 김 씨와 변호인은 정당방위였다고 주장했다. 수십 년에 걸쳐 지속적인 가정폭력을 당해 왔고 사건 당일도 술 취해 들어온 김 씨를 남편이 폭행하자 생명의 위협을 느껴 저항하다 살해했다는 것이다.

재판부는 그러나 사회 통념상 방위행위로써의 한도를 넘었고 김 씨가 공포심보다는 분노를 표출했다는 진술 내용을 근거로 정당방위를 인정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또 가정폭력으로 인한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와 음주에 의한 심신 미약 상태에서 범행했다는 주장에 대해서도,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는 인정되나 범행 당시에 심신 미약 상태였다고 볼 수 없다며, 받아들이지 않았다. 재판부는 다만 김 씨의 범행을 살인 양형기준의 제1유형(참작동기 살인)으로 보고 징역 4년을 선고했다.

김 씨는 항소했으나 항소심 결과는 1심과 같았고 대법원에서도 결과는 바뀌지 않았다.

● 가정폭력에서 비롯된 살인, 정당방위 인정받을 수 있나

형법에서 규정하는 정당방위는 다음과 같다. 1항은 정당방위에 대해, 2항은 정당방위에 포함되는 과잉방위에 대한 내용이다.

제21조(정당방위)
① 자기 또는 타인의 법익에 대한 현재의 부당한 침해를 방위하기 위한 행위는 상당한 이유가 있는 때에는 벌하지 아니한다.
② 방위행위가 그 정도를 초과한 때에는 정황에 의하여 그 형을 감경 또는 면제할 수 있다.
③ 전항의 경우에 그 행위가 야간 기타 불안스러운 상태 하에서 공포, 경악, 흥분 또는 당황으로 인한 때에는 벌하지 아니한다.


김 씨처럼 가정폭력에 시달리다 남편이나 아내를 살해한 경우, 정당방위에 해당할까, 아닐까.
[마부작침] 부부살인
<마부작침>은 최근 5년 간 '부부 살인' 사건 판결문 100건에서 정당방위를 주장한 사건이 얼마나 되는지 파악했다. 먼저 '아내 살해' 66건에서는 정당방위를 주장한 경우가 한 건도 없었다. '남편 살해' 34건, 즉 아내가 남편을 살해하거나 사망케 한 사건에서만 정당방위 주장이 나왔는데 위에 설명한 김 씨 사건을 포함해 모두 9건이었다. 26.5%다.

9건 중 법원이 정당방위를 인정한 건 단 1건도 없었다.

정말 없을까.

<마부작침>은 애초에 1심 판결문만을 분석했는데 1심과 달리 2심부터 정당방위를 주장한 사건이 있을 수 있다. 그래서 대법원 판결문 열람서비스를 이용해 2014년부터 2019년 7월까지 '가정폭력', '살인', '폭력', '정당방위' 등의 키워드로 2심 판결문을 검색해 살펴봤더니, 피고인 측이 정당방위를 주장한 판결문 3건이 더 나왔다. (이 중 2건은 2심에서만 정당방위 주장했고, 1건은 1심과 2심에서 모두 정당방위를 주장했으나 1심 판결문을 대법원이 비공개 처리했다. 그래서 '부부 살인' 사건 100건에는 빠져 있다.) 이들 사건 역시 정당방위를 인정받지 못했다.

형사정책연구원의 <남편 살해 피학대 여성의 사회심리적 특성에 따른 형법적 대응방안>(2010)을 보면 분석 대상인 1990년대부터 2000년대까지 남편 살해 사건 70건에서 정당방위를 주장한 건 37건, 과잉방위는 33건에 이른다.(중복 포함) 이 연구에서 정당방위 주장 사건이 52.9%인데 <마부작침> 분석에서는 26.5%로 크게 줄었다. <마부작침> 분석은 2014~2019 사건이기 때문에 최근 사건일수록 정당방위를 덜 주장하고 있다는 추정이 가능하다. 정당방위 주장이 한 번도 받아들여진 판결이 없었다는 점이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 현재 부당한 행위를 당하는지, 상당한 이유가 있는지...
[마부작침] 부부살인
법원의 논리는 한결같다. 형법의 정당방위가 성립하려면 1) 현재의 부당한 침해, 2) 자기 또는 타인의 법익을 방위하기 위한 행위, 3) 상당한 이유가 있어야 하는데 이 현재성과 상당성에 '남편 살해' 사건이 해당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결혼 생활 내내 가정폭력에 당해왔더라도, 사건 당일 폭행이 벌어졌더라도, 그게 사람을 죽일 정도는 아니라는 논리이자 다른 방식의 대처가 가능했을 것이라는 논리다.

한국여성아동인권센터 대표이자, 가정폭력 사건을 다수 변호했던 이명숙 변호사는 "20년 넘게 수없이 논의했지만 가정폭력 피해 아내의 정당방위는 여전히 인정되지 않고 있다"면서 "어느 한 죄에 대해서만 정당방위를 인정할 수 없다는 데서 더 이상 진도를 못 나가고 있는 것 같다"라고 말했다. 1953년 형법 제정 이후 지금까지 법원이 정당방위를 인정한 사례는, 가정폭력이 아니더라도 14건에 불과하다는 연구 결과도 나와 있다.(김병수, 정당방위의 확대와 대처방안, 2014)

법을 고치자는 움직임이 있었다. 가정폭력 행위자가 가정폭력 범죄를 범하거나 범하려고 할 때 이를 예방하거나 방위하기 위한 행위에 대해서는 정당방위를 인정하도록 하자는 '가정폭력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 개정안을 정춘숙 의원이 지난 2017년 12월 발의했다. 발의 이후 1년 4개월이나 걸려 소관 상임위인 법제사법위원회 법안심사소위에 법안이 상정됐으나 더 이상 논의에 진전은 없는 상태다. 이 법안은 20대 국회가 끝날 때 자동 폐기될 가능성이 크다.

● "폭력이 난무하는 곳보다 더한 공적 영역은 없다"

"이 법은 가정폭력범죄의 형사처벌 절차에 관한 특례를 정하고 가정폭력범죄를 범한 사람에 대하여 환경의 조정과 성행(性行)의 교정을 위한 보호처분을 함으로써 가정폭력범죄로 파괴된 가정의 평화와 안정을 회복하고 건강한 가정을 가꾸며 피해자와 가족구성원의 인권을 보호함을 목적으로 한다."

'가정폭력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 제1조 (목적)이다. 21년 전인 1998년 이 법과, 가정폭력방지 및 피해자보호 등에 관한 법률이 함께 시행됐다. 여성계의 오랜 노력이 일궈낸 성과였으나 20년이 지난 지금 "가정의 평화와 안정을 회복하고 건강한 가정을 가꾸"는데 중점을 둔 나머지 "피해자와 가족구성원의 인권을 보호"하는 목적이 뒷전으로 밀리는 경우가 적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한국여성의전화 최선혜 여성인권상담소장은 "어떻게 해서든 건강한 가정을 회복해야 한다는 시각이 여성들을, 아니면 가해자를 죽음으로 내몰고 있는 것"이라고 진단하고 "국가가 계속 방조하고 있다가 마지막에 살인자로 낙인찍는 게 가정폭력을 제대로 해결하는 태도인지 같이 고민해야 한다"라고 말했다. 이명숙 변호사는 가정폭력에 대한 인식이 바뀌어야 한다면서 "화난다고 때리는 게 아니라 다른 방법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게끔 하는 교육을 아주 어려서부터 모두 동참해서 해야 하고 사회 문화를 바꿔야 한다"라고 강조했다.

"가정은 사적 영역이므로 공권력 개입은 가급적 자제되어야 하고 신중해야 한다는 명제는, 그 가정이 가정으로서 최소한의 기능을 유지하고 있을 때에만 성립될 수 있는 것이다. 한 사람이 작은 사람을 학대하고, 가족 구성원 중 누군가가 폭력으로 누군가에게 고통만을 안겨주고 있다면, 그곳에는 더 이상 가정이라 불리며 보호받을 사적 영역이 존재하지 않는다. 폭력이 난무하는 곳보다 더한 공적 영역은 없다."
- 박주영 <어떤 양형 이유> 중에서

심영구 기자 (so5what@sbs.co.kr)
안혜민 기자·분석가 (hyeminan@sbs.co.kr)
김민아 디자이너
이유림 인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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